Louis Felix Leullier(1811-82), The Entry Of Christ Into Jerusalem.
Louis Felix Leullier(1811-82), The Entry Of Christ Into Jerusalem.

며칠 전 주일은 교회력으로 종려주일(Palm Sunday)이었다.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복음서 저자 모두 이 사건을 각자의 시각으로 담아내고 있다(마21:1-11, 막11:1-11, 눅19:28-38, 요12:12-19). 예수님께서는 이 날 감람산 벳바게에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으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 나무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맞이하였다. 이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21:9)'라고 외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입성을 환호했다.

예루살렘 입성 기사 이미지에 나타난 상징적 의미 - 세상의 길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이미지는 많은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입성을 지켜본 당시의 무리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왕의 행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먼저는 나귀이다. 미쉬나 산헤드린에 의하면 왕이 타는 짐승은 아무도 타서는 안되는 새로운 짐승이어야 함을 말하고 있고, 예수님께서 나귀 위에 타신 것은 솔로몬으로 하여금 그의 왕위 계승권을 과시하귀 위하여 부왕 다윗의 노새를 타게 한 것을 연상시키기도 한다(cf. 왕상1:38-48).1) 다음으로는 겉옷을 펴는 것과 나뭇가지를 흔드는 것이다. 겉옷을 펴는 것은 왕에 대한 충성심을 나타내는 것이며, 헬라-로마 세계에서도 존경하는 인물 앞에 옷을 펼쳐놓는 관습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또한 이들이 길에 펴고 흔들었던 나뭇가지(이에 대한 많은 논쟁을 뒤로하고)가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바 종려나뭇가지라고 한다면, 종려나무는 고대 로마 제국에서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상징이었고, 황제(또는 정복자)는 전쟁을 통해 정복한 성에 들어갈 때, 감람나무 잎사귀로 만든 화관을 쓰며, 이를 환영하는 인파들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기도 했다. 또한 무리들이 '호산나'라고 부르짖은 것은 그 단어의 의미인 '오! 구원하소서'2)라는 것을 살펴볼 때, 유대인들 마음 속에는 다윗 왕국의 회복에 대한 소망이 가득찼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로마로부터 유대의 독립을 성취하실 수 있는 메시야적 인물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리해보자면,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환호하며 호산나를 외쳤던 무리들의 모습은 민족주의적 열정과 흥분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통해 민족적이고 정치적으로 인식된 종말론적 구원이 이루어 질 것으로 기대했던 모습이었다.3)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인식하고 마치 왕의 행진 내지는 정복자의 입성처럼 바라보며 정치적인 구원을 열망한 것이었다. 이는 일반 사람들이 기대했던 세상의 길이었다.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 그리스도의 길

하지만 예수님은 일반 대중들이 기대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예살렘에 들어가셨다. 그는 평황의 왕이시며, 겸손의 왕이셨다.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심으로 스가랴 9장9절 말씀을 의도적으로 자신과 연결 시키셨으며, 이를 통해 세상의 정복자요, 유대인들을 정치적으로 구원해 낼 메시야가 아닌, 겸손의 왕으로 오셨음을 드러내셨다. 또한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 곁으로 몰려나와 흥분과 열광 속에서 예수님을 맞이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휩쓸리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잊지않으셨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새 왕으로 이 땅에 오셨고, 왕의 즉위식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맞지만 정치적으로 이를 이루시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릴 왕으로 오신 것이었다(마27:29).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1474-1564), The Crucifixion.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1474-1564), The Crucifixion.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인한 소동이 한 차례 휘몰아 치고 난 이후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행보는 대중들의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소위 고난주간의 일정이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등극하여 영광을 누리시기 보다,  자신의 죽으심을 예언하며 베다니로 다시 돌아가셨다. 월요일에는 예루살렘으로 다시 들어가셔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고,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다. 화요일에는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두 아들의 비유, 악한 소작인의 비유, 혼인 잔치의 비유 등)로 가르치셨고, 가룟유다는 이때 예수님을 배반하여 산헤드린 공회에 넘길 모의를 시작하였다. 수요일에는 특별히 기록된 바가 없고, 목요일에는 유월절을 보내시면서 최후의 만찬, 세족식을 진행하셨다. 그리고 그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기도하신 이후에 가룟유다에 의해 산헤드린 공회에 붙잡혔고, 가야바의 집에 잡혀가셨다.  마지막 금요일에 예수님은 다섯 번의 재판을 받으셨고, 십자가 형을 언도받고 형이 집행되었다.

불과 일주일도 되기 전에 예루살렘에 있던 무리들로부터 정치적 메시야로 칭송을 받았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는 동일한 무리들에 의해 십자가 형을 요구 받으셨던 것이다. 세상은 왕이 되기를 원하였지만, 예수님은 사명의 성취를 선택하심으로 모진 고통을 받으신 후 십자가 위에서 운명 하셨다. 이는 세상의 길과는 완전히 다른 그리스도의 길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시이다.

고난 주간을 보내는 그리스도인

우리는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한다. 이때, 우리는 세상의 길과 그리스도의 길 사이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명을 좇아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궤적도 함께 묵상한다면 더 풍성한 고난주간이 될 것이다. 성공을 원하고, 영웅이 되기를 원하는 세상의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모진 고난과 십자가의 고통을 감내할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낮아지심의 길을 걸어가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며,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갈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1)  크레이그 A. 에반스, 『WBC 주석시리즈 마가복음 하』, 309.

2) 크레이그 키너, 『IVP 성경배경주석 신약』, 190.

3) 도날드 헤그너, 『WBC 주석시리즈 마태복음』, 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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