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함안에 계신 둘째 형님과 함께 부모님의 무덤이 있는 언양 차리마을 야산으로 향했습니다.
이곳에는 조그마한 마을 공동묘지가 형성되어 있어 지역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모신 곳입니다.
아버님은 몇 년 전 감기에 걸리셨는데 패혈증으로 불과 4일 만에 돌아가셨더랬습니다.
어머님은 돌아가신 지가 20여 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그때의 일이 아직도 마치 어제였던 듯 생생합니다
평소에 당뇨가 있던 어머님께서는 수요일 저녁 예배를 드리고 계시던 중 그대로 의식을 잃으셨다고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다들 지식이 없어 그냥 집에 뉘어 놓으셨는데 곧 돌아가셨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섬기고 있는 덕암교회에서는 수련회 왔던 팀이 2박 3일의 행사를 마치고 막 떠난 직후여서 뒷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소식을 전해 들었지요.
부랴부랴 어머님 계신 언양 집으로 갔을 때 그저 주무시는 듯 침대에 뉘어져 있는 어머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댓돌 옆 한 켠에는 그날 아침까지도 밭을 매고 돌아오셨던 듯 어머니가 쓰시던 호미와 함께 얼마나 사용하셨는지도 모를 만큼 흙에 절어 있는 면장갑이 놓여 있었습니다.
나는 7남매 형제들이 모두 모여와 잘 곳이 마땅치 않아 뉘여 져 있는 어머님 곁에 누웠습니다.
어린 시절 함께했던 포근하기만 했던 어머님과의 마지막 잠자리를 그렇게 함께 보내었더랬습니다.
한 해가 지나고, 어머님이 떠나시고 난 다음 첫 명절을 맞이했을 때의 그 마음 허전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으레 마중 나와주시던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 고향 집은 참으로 낯설기만 하였습니다.
금방이라도 그 모습이 보일듯하기만 한데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어머님의 얼굴이었습니다.
평생을 농촌 목회자의 아내로 살아오시며 모자라는 재정을 채우시느라 마지막 가시는 날까지 밭을 매시던 그 모습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아려 옵니다.
떠나시던 그 날도 마침 엄마를 보러 왔던 막내 여동생에게 이런 말씀하셨다고 하네요.
“누가 나한테 돈 좀 주면 좋겠다.”
다들 말은 하지 않지만 그런 마음들을 부모님 모신 그곳 한 켠에 묻어둔 채 벌초를 하고 내려옵니다.
짐짓 길가에 떨어진 알밤을 몇 알 주워 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