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덕암교회 담임목사)
박영수(덕암교회 담임목사)

 

지난 토요일, 함안에 계신 둘째 형님과 함께 부모님의 무덤이 있는 언양 차리마을 야산으로 향했습니다.

이곳에는 조그마한 마을 공동묘지가 형성되어 있어 지역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모신 곳입니다.

아버님은 몇 년 전 감기에 걸리셨는데 패혈증으로 불과 4일 만에 돌아가셨더랬습니다.

어머님은 돌아가신 지가 20여 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그때의 일이 아직도 마치 어제였던 듯 생생합니다

평소에 당뇨가 있던 어머님께서는 수요일 저녁 예배를 드리고 계시던 중 그대로 의식을 잃으셨다고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다들 지식이 없어 그냥 집에 뉘어 놓으셨는데 곧 돌아가셨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섬기고 있는 덕암교회에서는 수련회 왔던 팀이 23일의 행사를 마치고 막 떠난 직후여서 뒷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소식을 전해 들었지요.

부랴부랴 어머님 계신 언양 집으로 갔을 때 그저 주무시는 듯 침대에 뉘어져 있는 어머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댓돌 옆 한 켠에는 그날 아침까지도 밭을 매고 돌아오셨던 듯 어머니가 쓰시던 호미와 함께 얼마나 사용하셨는지도 모를 만큼 흙에 절어 있는 면장갑이 놓여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쓰시던 호미와 함께 얼마나 사용하셨는지도 모를 만큼 흙에 절어 있는 면장갑/ 사진@박영수
어머니가 쓰시던 호미와 함께 얼마나 사용하셨는지도 모를 만큼 흙에 절어 있는 면장갑/ 사진@박영수

나는 7남매 형제들이 모두 모여와 잘 곳이 마땅치 않아 뉘여 져 있는 어머님 곁에 누웠습니다.

어린 시절 함께했던 포근하기만 했던 어머님과의 마지막 잠자리를 그렇게 함께 보내었더랬습니다.

한 해가 지나고, 어머님이 떠나시고 난 다음 첫 명절을 맞이했을 때의 그 마음 허전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으레 마중 나와주시던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 고향 집은 참으로 낯설기만 하였습니다.

금방이라도 그 모습이 보일듯하기만 한데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어머님의 얼굴이었습니다.

평생을 농촌 목회자의 아내로 살아오시며 모자라는 재정을 채우시느라 마지막 가시는 날까지 밭을 매시던 그 모습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아려 옵니다.

떠나시던 그 날도 마침 엄마를 보러 왔던 막내 여동생에게 이런 말씀하셨다고 하네요.

누가 나한테 돈 좀 주면 좋겠다.”

다들 말은 하지 않지만 그런 마음들을 부모님 모신 그곳 한 켠에 묻어둔 채 벌초를 하고 내려옵니다.

짐짓 길가에 떨어진 알밤을 몇 알 주워 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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