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향의 상실(1): 공허함과 불안함
- 고향:의 상실(2): 순수함과 낭만
- 고향: 나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

 

(사진: photo by Sigmund on Unplash)
(사진: photo by Sigmund on Unplash)

 

 

고향에 대한 기억: 귀향의 동력

에스라서는 여호와께서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케 하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 결과 고레스는 포로 생활 중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조서를 내립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합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1:5을 함께 읽어 봅시다.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유다 지파는 남유다 왕국의 핵심 세력이었고, 베냐민은 사울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는 예루살렘의 성전의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옛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그리고 성전은 그들이 권력자 또는 제사장으로써 찬란한 영광을 누리던 기억이 남아있는 장소였지요. 그런데 그 곳을 떠나서 바사 제국으로 오게 되면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들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옛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강한 향수를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예루살렘 귀환과 성전 건축에 크게 감동을 받아 모인 겁니다. 고향에 대한 기억이 귀향의 동력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아직 고향에 대한 기억이 지워질 만큼의 긴 세월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586년에 남유다 왕국이 망한 후에, 537년에 성전 재건 조서가 떨어졌기 때문이죠. 약 5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이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기억이 말살될 만큼의 긴 시간도 아닙니다. 부모들을 통해서 전해 온 아름다운 기억이 후손들 사이에서도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을만한 시점입니다. 지금과 달리 어른들의 구전으로 전해지는 정보가 중요했을 시절이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고향에 대한 기억은 더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본디 그들이 고향에서 누릴 수 있던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현재 타국에 포로로 끌려온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게 되었을 겁니다. 고향에 대해서 전해 들은 것 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옛 시절과 고향을 그리워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미 바사 제국의 체제에 익숙해졌고 편안함을 느끼면서도, 바사 제국의 교육에 따라 양육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바사 제국의 문화를 향유하고 있으면서도, 바사 제국의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는 내가 뿌리 박을 토양이 아니라고 느끼는 것이죠. 자신이 영원히 머물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겁니다. 그러한 연유로 이제는 익숙하고 편안해져 버린 제국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겁니다. 아직 남아있는 아름다운 기억이 그들을 고향으로 끌어당긴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의 기초가 세워진 것을 보고 일부는 눈물을 터트리고, 일부는 기뻐서 소리 지릅니다. 우는 소리와 기쁨의 환호성이 혼재 되어 예루살렘을 가득 메웁니다. 고향의 회복을 보자 타국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자신들의 처지가 떠오른 울음 입니다. 그리고 회복의 기쁨의 탄성을 흘러나오는 겁니다.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으나, 뿌리는 같습니다. “여기가 나의 고향이구나.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여기구나. 고향을 되찾은 자의 안도감이었던 겁니다. 

 

제국의 논리 

그러나 제국은 포로들이 가진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국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관성 때문이죠. 제국에 쉽사리 흡수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제국은 피지배자들의 고향에 대한 모든 기억을 말살하려 듭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게 한국어를 쓰지 못하게 하고, 일본어를 강요했던 겁니다. 그리고 역사 공부, 특히 한국의 상고사를 공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제국의 시스템에 동화 시키려 합니다. 피지배국의 지도자 계층에 제국의 엘리트 교육과 다양한 혜택 제공 합니다. 제국의 문영이 아름답고 탁월하다는 것을 몸소 느끼게 하는 겁니다. 여기가 더 좋은 곳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제국의 화려함과 지혜로움을 만끽하도록 합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한 가지 생각을 주입하는 겁니다. 제국에 비해서 우리의 고향은 뒤떨어지고 발전되지 않는 후진 곳이라는 생각. 고향의 전통과 관습들은 비문명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라는 생각 말이죠.  

게다가 제국에 가장 잘 흡수되고 동화된 피지배 계층 중 소수에게 높은 관직을 수여합니다. 고향에서 멀어질수록, 핏 속에 흐르는 근본에서 멀어질수록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게 해야만 자랑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암묵적으로 주입하는 겁니다. 그렇게 스스로의 뿌리와 정체성을 부정하게 만듭니다. 그런 방식으로 제국에 동화시키고 흡수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제국과 일치 되는 순간 고향에 대한 기억과 회상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죠. 여기가 내 집이 아니라는 자각에 이르렀을 때,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사실에 직면할 때, 비로소 고향을 떠올리며 추억하기 시작하는 법이거든요. 현재 세계가 불편하고 어딘가 허전 해야 고향을 그리워하는 법이거든요. 제국의 일부로 만들어 버리고 고향에 대한 기억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뿌리와 고향은 여기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제국의 시스템의 일부로서 충실하게 봉사하게 만듭니다. 

세상은 제국과 동일한 방식을 사용 합니다. 왜냐하면 제국은 세상의 가장 탁월한 방식의 집대성이거든요. 이 세상은 우리를 자신의 체제와 사상에 동화시키려 합니다. 문명의 혜택을 제공하면서 이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강조 합니다.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면서 현재 이 세계가 얼마나 지혜로운 곳인지 강조 합니다. 그리고 이 세계에 가장 잘 적응한 존재들이 가장 성공한 존재라고 광고 합니다. 그렇게 교회에서 양육 받고 자라온 나의 인생이 마치 뒤떨어지고 후진 것처럼 보이도록. 세상의 가치에 적응하는 대신에, 세상의 기준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대신에, 천국 소망과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따라 살아온 내 삶이 비이성적이고 실패한 삶인 것처럼 보이도록. 나의 뿌리이자 본향인 천국에 따른 삶과 사고방식을 전면 부정하게 만드려 합니다. 천국 소망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쌓아갔던 헌신과 봉사 모든 것이 그릇된 열정인 것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에 발 맞추지 않고 천국의 가치를 따라 살아갔던 이들의 결단과 선택이 어리석은 것처럼, 종교적 열광주의자들이 비합리적은 행위였던 것처럼 말이죠. 

제국의 세련된 문명과 지혜, 탁월한 학문이 이스라엘의 성전 중심의 삶을 비 이성적이며 시대 착오적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던 것처럼. 그래서 너희들이 우리에게 패배했다고 느끼게 만든 것처럼. 그렇게 이스라엘의 성전 중심의 삶과 사고, 그 시절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한 향수를 말살하고 부정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처럼. 그렇게 당신의 영적 고향인 교회와 교회 중심의 삶을 비판하고 우습게 보게 만듭니다. 천국 본향의 소망을 비 이성적이고 시대 착오적인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이처럼 세상은 그렇게 당신의 살아온 과거를 스스로 부끄러워하도록 조종합니다. 우리의 부모님 세대의 삶을 총체적으로 거부하도록 종용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우리의 본향인 것처럼 살아가라고 명령 합니다. 세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말이죠. 세상의 시스템 일부로 충성하게 만들기 위함 입니다. 고향을 상실한 채 살아가게 하는 겁니다. 천국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게 하는 겁니다.

 

(사진: Photo by Annie Sprat on Unplash)
(사진: Photo by Annie Sprat on Unplash)

 

고향의 상실(1): 공허함과 불안함

우리가 고향을 떠나서 아무리 다른 세계에 잘 적응하고, 다른 문화를 잘 흡수하면 별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제국과 세상에 흡수되어 살아도 별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타향살이에 따라붙는 공허함 마저 제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문화에 동화되고 흡수 되었다는 것은 본래 나의 것이 아닌 것이 나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본연의 나의 것은 떨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익숙한 것은 떨어져 나가고 어색한 것이 나의 삶에 들러 붙어 버린 것입니다. 나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들을 잃은 채 살아가니까 공허한 법이죠. 그러한 연유로 타향에 성공적으로 잘 정착하고 적응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낍니다. 이처럼 타향살이는 정체 모를 공허함과 더불어 사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타향살이는 나의 뿌리와 본 토양을 떠나서 다른 곳에 심겨져 있는 삶입니다. 뭔가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지고, 종종 강한 이질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문제는 없는데 붕 떠있고 안정감을 누리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 모든 것은 고향을 잃은 채 살아가는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독교식으로 설명한다면, 그 모든 기분은 천국 본향에 대한 소망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탓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본연의 나의 것인 천국을 떼어 버리고 이 세상을 덕지덕지 붙이고 살아가는 덕택에. 어린 시절 뿌리를 내렸던 교회와 멀어진 삶을 살고 있는 탓에, 어딘가에 뿌리내리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당신의 기분 탓이 아닙니다. 의식과 지성은 감지 못하지만, 나의 영혼은 아는 것이죠. 몸은 예배당에 있지만 나의 영혼과 자아는 어색한 세상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는 것을. 나의 고향과 뿌리내린 토양인 천국과 교회가 어색해질 만큼 말입니다. 그래서 정체 모를 감정들이 우리를 채우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향을 상실한 자는 늘 불안감을 안고 살아갑니다. 여기서 밀리면 돌아갈 곳이 없으니까요. 끝장나 버리는 것이니까요. 벨기에 유학 시절 탈북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독한 고향이라도 상실해 버리고 나니 늘 불안해 합니다. 본국에서 망명한 엘리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여기에서 흡족한 대우를 받아도 불안해 합니다. 고향의 상실이란 돌아갈 곳이 더 이상 없는 벼랑 끝 인생이기 때문이죠.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만일 이 세상에 동화되고 흡수 되어 버려서 더 이상 천국 본향에 대한 소망이 나의 영혼과 내면의 중심을 차지하지 않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으로써 당신의 내면과 영혼은 돌아갈 곳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안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내면과 영혼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겁니다. 나의 영혼은 아는 겁니다. 이제 나의 영혼이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러한 연유로 평소에는 괜찮은 것 같다가도, 문득 떠올라 와서 이유 모를 불안감이 영혼과 내면을 장악하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결국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간단합니다. 천국 본향 없이 세상에 잘 적응하기만 하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고향의 상실(2): 순수와 낭만

그렇다고 고향의 삶이 더 아름답고 나은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객관적으로 못한 것들 것 훨씬 많습니다. 불편한 것들 투성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에 돌아오면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것들이 있는 곳이니까요. 뿐만 아니라 고향은 나의 때묻지 않은 순수한 시절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쉴 틈 없이 경쟁해야 하는 세상에서 고향만큼은 감상에 젖어 순수한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객관적으로 부족하고 불편한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을 아무도 비합리적이라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고향을 이상화 하면서 객관적으로 더 나은 도시보다 더 아름답게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을 비이성적으로 비판하는 이도 없습니다. 도리어 도시의 삶과 문명의 혜택을 버리고 낙향 하는 것은 낭만이라고 봅니다. 순수한 시절로 복귀라고 봅니다. 한 마디로 고향은 안식을 얻는 곳이며, 순수와 낭만이 회복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생존이 버거워지면서 더욱 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 갑니다. 귀농과 낙향이 트렌드가 된 이유는 고향이 주는 낭만과 순수함을 갈구하기 때문이죠. 인생이 성공과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그러한 삶이 영혼과 정신을 피폐해지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겁니다.

이처럼 고향을 되찾을 때, 우리는 비로소 평화와 안식을 누립니다. 순수와 낭만을 회복합니다. 피폐해진 영혼과 정신이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의 본향의 소망을 회복할 때, 공허함과 불안함 가운데서 메말라 버린 나의 영혼이 살아나게 됩니다. 여러분 천국 본향을 바라보며 살았던 삶을 회상해 보십시오. 분명히 나의 몸과 마음, 재물을 쏟아 부었고, 이득 본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생업을 끝내고 늦은 시간 나와서 꾸역꾸역 섬겼던 것 밖에 없습니다. 내 삶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희생했던 것 밖에 없습니다. 무슨 명예와 칭찬을 바라고 했나 싶습니다. 그런데도 그 시절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을 떠올리기만 해도 “참 그 때가 좋았지. 나도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지”라고 되뇌이며 잠시 감상에 젖게 되지 않습니까? 삶에 치여서 죽어버렸던 뜨거운 열정이 다시 조금은 되살아 나지 않습니까? 뭐가 그리 좋아서 그 시절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걸까요? 

이유는 달리 없습니다. 고향의 삶은 본디 낭만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디 인간을 순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이 천국 본향을 바라보고 살았던 모든 순간이 낭만적이고 순수한 것입니다. 당신의 메말라 가는 차가운 인생에 감상에 젖을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도 낭만과 순수가 있었다고.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고 말이죠. 잠시 감상에 젖어서 아름다운 기억 속에서 안식과 평화를 누립니다. 잠시 동안은 번뇌를 내려놓고 말이죠. 고단한 현실 속에서 그렇게 쉬어가는 겁니다. 현실을 망각할 여유를 만끽하는 겁니다. 고향 덕택에 말이죠. 그러나 천국 본향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우리는 잠시 순수와 낭만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영혼과 감성이 메말라 가기만 하는 겁니다. 잠시 바쁜 세상에서 쉬어갈 줄 모르는 겁니다. 삶을 견딜 수 있도록 한 템포 쉬어가는 평화, 안식, 여유를 누릴 줄 모르기에 인생의 고단한 면만 감내하며 살아가기에 현실을 견디는 힘이 현저하게 약한 겁니다. 이따금 찾아오는 시린 고독을 이겨내지 못하는 겁니다. 

 

고향: 나답게 사는 삶

인간의 내면과 영혼 속에 깊게 뿌리 박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지울 수 없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타향살이를 하는 이들일수록 더욱 그러한 법이죠. 부부 단 둘이 넘어와서 성공한 사업가 장로님도, 전문직에 종사하는 영국인 남편이랑 30년간 결혼 생활을 한 부인도, 20년 넘게 프랑스인 남편이랑 결혼 생활을 한 엘리트 여성도, 벨기에 사회에서 전문직으로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두 아이의 엄마도, 벨기에 의사와 결혼한 청년 모두 아무리 남편에게 사랑 받아도, 가정 생활에 만족을 하고 있어도, 이 사회에서 성공하고 인정 받았어도, 늘 고향을 그리워하더군요. 한국 드라마 이야기 하다가 울어 버릴 정도로 고향에 대한 짙은 향수를 품고 살아가더군요. 이와 마찬가지로, 천국을 우리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믿는 우리는 아무리 세상을 살아가도 깊은 곳에는 여전히 천국에 대한 귀향 본능이 남아있습니다. 망각하고 살고 있을 뿐이죠.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와 본성을 따르는 순리이듯이, 그리스도인들이 천국 소망을 품는 것은 어리석고 비합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우리가 하나님의 품을 그리워하는 것은 우리 존재의 본연에 맞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깊이 내재된 천국을 향한 귀향 본능을 따라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가장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순리대로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저는 지금 우리 안에 내재된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인 “고향에 대한 그리움. 고향을 향한 관성”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가장 인간다운 본연의 삶을 우리의 방식대로 풀어내고 있는 겁니다.  

만일 천국 소망이 희미해진 채 살아가고 있다면, 천국을 염두에 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자신의 존재와 본성에 맞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고 있어도, 이 세상에서 뭔가를 이루려고 발버둥 쳐도 공허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존재 본연과 어긋난 삶, 즉 세상과 제국의 논리에 따르는 삶을 사니까 채워지지 않은 채 공허함을 안고 살아가는 겁니다. “이게 아닌데..”라며 불안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나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의 삶, 나의 존재의 순리에 맞는 삶을 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영혼과 본능은 직감하는 겁니다. 열심히 살아갈수록 더욱 메말라 가는 이유 역시에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자연스럽고 편안한 삶을 살아가지 않으니까 지쳐 가기만 하는 겁니다. 이유도 모른 채 나의 영혼과 내면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 보는 겁니다. 

 

결론

여태까지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인 천국을 잊고 살아가게 만든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이 없는 것처럼, 이 세상이 본향인 것처럼 살아간다고. 그래서 뭔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정체 모를 불안감을 안고 살아간다고. 그리고 고향이 채워줄 수 있는 안식과 평안, 순수와 낭만을 잃어간다고. 그렇게 메말라 가는 인생을 경험하며 살아간다고 나누어 보았습니다. 글을 써내려 가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삶을 고되게 하신 이유, 계속해서 피곤하고 지치는 일상을 주신 이유는 우리의 본향이 어디인지 잊지 말라고. 여기는 네 본향이 아니라고 일깨워주기 위함은 아닌가 라는 생각 말입니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위협의 존재하게 하신 이유 또한, 이 세상이 너의 본향이 아니다. 네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주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겁니다. 한울 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고단한 것은 하나님께서 본향에 대한 소망을 잊지 않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천국 본향에 대한 소망을 상실하면서, 겪게 될 공허함과 불안함 그리고 메말라 가는 대신에 본향에 대한 소망으로 채워질 것을 주기 원하시기 때문 입니다. 인생을 아름답게 바라볼 낭만과 순수, 그리고 평화 안식을 누리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에 죽어가는 나의 영혼을 보면서, 천국 소망으로 다시 소생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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