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에 대한 비판과 도전, 새삼스러운 사실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사도신경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중세로마교회의 유산이라는 이유로 거절하는 대신,

개혁교회가 믿는 바를 새롭게 하고 예배와 성례를 재정립하는 기초로 삼았다

2020년 제70회 고신총회는 ‘사도신경의 재번역(수정)과 해설서 발행’ 을 신학위원회와 고려신학대학원교수회에 맡겨 1년간 연구하게 하여 제71회 총회(2021년 9월 28일~30일)에서 아래와 같이 받았다.

사도신경 해설 목차

 

1. 나는 믿습니다◀

   1.1 사도신경과 세례◀ 

(이후는 2022년 총회 보고 예정)


   1.2 사도신경과 예배

   1.3 사도신경과 가르침, 설교

   1.4 사도신경과 교회

   1.5 사도신경을 통한 교회 건설

 

II. 사도신경 해설

사도신경에 대한 비판과 도전이 새삼스러운 사실은 아니다. 1438년에서 1445년에 있었던 피렌체 공의회는 당시 서방과 동방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자 서로 회합하였다. 이 때 동방교회의 대표자들은 사도신경은 두 교회의 통합을 위해서 함께 고백할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사도신경의 존재를 부인하면서 만약 이 신조가 존재했다면 사도행전에 기록된 첫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언급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4세기까지 그 어떤 공의회도 사도신경을 공적으로 인정한 것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된 주장이었다.7)

17세기에 들어서는 루터파 신학자들 안에서 비판이 일어났다. 사도신경이 동정녀 탄생이나 ‘음부에 내려가셨다’와 같은 구원에 필수적이지 않은 항목들을 담고 있다는 점과 반대로 원죄, 은혜, 칭의 등의 내용을 담지 않고 있기에 의미 있는 신조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의문시하였다. 개혁주의 신학자인 빋시우스(H. Witsius)는 믿음의 근본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항목들을 담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예를 들어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 교회와 성도들의 교제와 같은 항목들이 이에 해당한다. 반대로 죄와 칭의, 하나님을 향한 간구, 새로운 삶의 실천 등은 빠져 있다고 보았다.8) 19세기 이성주의의 영향 아래서 사도신경은 평가절하되거나 새로운 해석, 새로운 텍스트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식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미 종교개혁 당시 에라스무스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은 사도신경의 기원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이를 문제 삼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열두 사도들이 이를 썼다는 것을 부인하면서도 사도적인 권위와 순수함의 표를 내포하고 있으며 다른 어떤 신조들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였다.9)

종교개혁자들은 사도신경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중세로마교회의 유산이라는 이유로 거절하는 대신에 개혁교회가 믿는 바를 새롭게 하고 예배와 성례를 재정립하는 기초로 삼았다.

루터는 1529년에 쓴 소요리문답에서 사도신경 해설 부분을 고백의 중요한 부분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사도신경이 사도들 자신이 쓴 문서이거나 사도들의 제자들에 의해 수집된 증언과 설교 그리고 저작이거나 하는 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마치 벌들이 아름다운 꽃들로부터 꿀을 모으듯이 사도신경은 성경으로부터 신중하게 수집되었다고 보았다. 사도신경만큼 기독교 진리를 간략하고 명쾌하게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까지 칭송한다.10)

쯔빙글리와 칼빈도 이와 같은 길을 걸었다. 칼빈은 루터와 함께 그의 첫 기독교 강요에서 사도신경을 해설하면서 이를 믿음의 전체와 요약으로 수용하였다. “우리 주님께서 그 분의 말씀을 통해서 제공하시고 전수해주신 전체의 요약(summa)이며 머리이다”11) 이런 칼빈의 정신을 따라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2문답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22문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답 “복음에 약속된 모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복음은 보편적이고 의심할 여지 없는 우리의 기독교 신앙의 조항들인 사도신경이 요약하여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사도신경에 대한 계속되는 의문과 비판을 극복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을 닮아 사도신경의 본래적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 그래서 정작 매 주일예배에서 사도신경을 반복적으로 암송하고 있는 우리 자신은 문제가 없는가 하는 것을 스스로 물어야 한다.

왜 예배 중에 사도신경을 고백해야 하는가? 사도신경을 당연한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정작 사도신경을 우리의 표증(symbolum)12)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와 성도는 그렇지 않은 교회와 무슨 차별이 있는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은 끊임없이 교회를 새롭게 세워가시는 그리스도의 일에 어떻게 복무할 수 있는가?

사도신경을 매주 입으로는 고백하는 교회에 내재하는 이런 질문들은 사도신경에 대한 연구가 사도신경을 습관적으로 암송하는 차원을 넘어선 더 포괄적이고 깊은 측면에서 접근해야 함을 알게 해준다.

1. “나는 믿습니다.”

사도신경의 첫 구절은 “나는 믿습니다”로 시작한다. 이 첫 구절에 대한 이해는 사실상 우리 믿음의 전부를 포함한다. 사도신경은 단지 교리 항목을 모아 놓은 생명 없는 문서가 아니다. 우리의 믿음과 생활 그리고 교회의 모든 면이 사도신경 안에 총체적으로 종합되어 있다. 교회 개혁, 성도의 실질적인 전인격적 변화 나아가 창조 세계 전체의 변혁과 연관되지 않은 채 사도신경의 항목들만을 따로 떼서 생각하는 것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사도신경을 단지 예배 때 한 번 읊조리는 형식적인 문서에 한정시키는 현실이 계속되는 한 사도신경을 해설하는 것은 그 어떤 의미도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경건의 전체로써 사도신경의 함의는 사실 잊혀진 것이 사실이다. 소위 열린 예배의 유행은 그나마 형식적으로 반복되었던 예배 중의 사도신경 고백을 도외시해버렸다. 세례가 약화하면서 사도신경이 그리스도인의 증표가 된다는 실재성도 상실되었다. 예배와 성례의 기초인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서 사도신경에 압축된 성경을 있는 그대로 전수하고자 했던 종교개혁자들의 구상도 잊혀졌다. 이런 현상은 사도신경 속에 담긴 의미나 이 고백을 통해서 무엇이 실현되고 있는가를 간과한 결과이다.

사도신경을 해설하는 일은 각 항목을 설명하는 작업과 더불어 원래 사도신경이 출현했던 교회적 상황에 대한 재고찰을 요구한다. 사도신경은 그 내용상 성경과 고대교회의 설교와 일치한다. 복음 설교의 핵심적 내용이 사도신경 정립의 기초가 된다. 이뿐만 아니라 세례를 받기 위한 준비과정의 교육과 세례 집례 자체와 사도신경은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사도신경은 예배의 일부로 자리를 잡으면서 예배를 규정하고 개혁하는 부분과도 함께 자리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도신경은 단지 예배 때 한 번의 순서로 변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규정하는 중심적 매개의 지위를 가진다. 우리는 이런 사도신경이 원래 가졌던 이런 총체적인 측면들을 복원하면서 사도신경을 중심으로 성도와 세상을 새롭게 하는 중요한 지렛대로 이를 삼아야 하겠다. 따라서 사도신경 해설은 교회 개혁의 원천으로서 사도신경의 위치를 재확립하는 것과 동반되어야 한다.

한스 리츠만은 “예외 없이 모든 신조들은 세례받는 자에 의해서 고백된 그리고 그의 세례와 함께 한 청중들이 함께 수용한 믿음의 고백문에 뿌리를 두고 있다”13)고 주장했다. 굳이 그의 주장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사도신경은 세례 집례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세례와만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도신경을 단지 세례의 관점에서만 조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협소한 시각이다.

사도신경의 구조는 각각 삼위 하나님을 믿는 세 번의 ‘믿습니다’가 골격을 이루고 있다. 사도신경의 초기 본문들은 ‘내가 믿습니다’(credo)와 ‘당신은 믿습니까?’(credis)라는 두 개의 믿음 문장의 형태를 띤다. ‘당신은 믿습니까?’라는 질문 형태는 사도신경이 세례 집례 시에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성부, 성자, 성령의 한 이름(마태복음 28:19) 안으로 세례받는 것을 반영하여 삼위 곳, 성부, 성자, 성령에 해당하는 세 번의 ‘당신은 믿습니까?’라고 묻고 세례를 받는 자를 ‘나는 믿습니다’(credo)라고 대답하게 된다. 일차적으로 사도신경은 세례 집례 시 묻고 서약함으로써 한 인격이 완전히 삼위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옮겨지게 됨을 인치는 징표가 되었다.

그러나 세례받는 자는 세례 집례 때의 대답을 위해서 오랜 기간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의미를 배우며 또한 이 서약에 근거한 삶의 증거를 요구받는다.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선행의 구체적인 증거를 통해서 자신이 사도신경을 입으로만이 아니라 전 인격으로 고백함을 교회를 통해서 점검받는다.

총체적인 방면에서 사도신경은 세례를 받는 자에게 하나의 가르침으로 반복, 집중해서 묻게 되고, 그는 사도신경에 담긴 내용을 배우게 된다. 따라서 사도신경은 세례를 받기 위한 교육 곧, 교회의 가르침의 내용이 되었다.

한편으로 세례는 예배 때 이루어진다. 예배는 세례를 베푸시는 진정한 주체인 삼위 하나님께서 자신을 주시는 자리이다. 삼위께서 부르셔서 베푸신 구원의 일을 선포하시면서 이 구원을 받고 동참할 자로서 자기 백성을 빚어주시는 현장이다. 삼위 하나님은 설교와 강복선언으로 이 복을 베푸시며 그 복의 내용은 사도신경으로 요약된다.

따라서 사도신경은 설교와 강복선언의 내용으로 예배 중에 봉사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은혜를 함축하고 있다. 세례 집례 뿐 아니라 모인 회중 전부는 사도신경을 고백함으로써 삼위 하나님 편에서 하신 일과 베푸신 복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리면서 삼위 하나님께서 거처로 삼으시는 교회의 지체됨을 확인한다.

따라서 사도신경은 예배와 예배 중의 설교, 강복선언 그리고 찬송과 기도, 송영의 전체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믿습니다’라는 사도신경의 세 번의 구조와 그 전체적인 내용은 세례와 성찬 그리고 예배와 설교, 가르침의 전체적인 그림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1 사도신경과 세례

고대교회에서 사도신경과 세례의 연결성을 보여주는 수 많은 예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유스티누스, 이레니우스 그리고 고대로마신경의 가장 초기 형태를 전해준 히폴리투스의 예만 제시하도록 하겠다.

1) 유스티누스

2세기 중엽의 저작에서 유스티누스는 세례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의 가르침과 설교가 진리라고 믿는 모든 사람들은 그것에 따라서 살 것을 약속하며 기도하고 자신의 과거의 죄를 사해주실 것을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하도록 권고를 받는다. 우리고 함께 기도하고 그들처럼 금식했다. 그리고 우리가 했던 것처럼 물이 있는 장소로 초대받아서 중생의 형태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이 문맥에서 “아버지이면서 온 우주의 주되신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물 안에서 정결케 하는 씻음을 받는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추가적인 설명이 나오는데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이름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전에 예수와 관련된 것을 말씀하시던 성령의 이름으로”를 덧붙여 이 사람이 성부 하나님의 깨닫게 해주심 안에서 씻음 받음을 선언한다.14)


2) 이레니우스

교회는 땅끝까지 온 세상에 흩어져 있지만, 사도들과 그들의 제자들로부터 전능하신 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성육신 하신 한 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그리고 성령을 믿는 믿음을 받은 자들은 하나의 교회이다.

이레니우스는 여기서 교회의 하나 됨이 하나이신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는 사도적 믿음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 믿음의 내용으로서 동정녀에게서 나신 그리스도, 그의 고난과 부활 그리고 승천, 모든 인류의 부활과 심판을 위해서 재림하시는 것을 제시한다.

이레니우스가 제시하는 내용은 사실 사도신경과 유사하다. 그는 이 내용이 게르마니아, 스페인, 켈트 그리고 이집트와 모든 동방의 교회들의 같은 고백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사도적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의 하나 됨을 의미한다. 이레니우스는 이를 세례와 연결한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받는 진리는 다음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우리를 은혜로서 거듭나게 하신다.”15)


3) 히폴리투스

세례 때에 다음과 같이 묻는다.

당신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까?

당신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습니까?

그 분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을 통해서 나셨고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의 오른팔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당신은 성령을 믿습니까?

그리고 거룩한 교회와 육신의 부활을 믿습니까?
 

히폴리투스에 의하면 세례를 받는 사람은 각각의 물음에 ‘나는 믿습니다(credo)’라고 고백하고 세 번 물에 잠긴다. 그러나 이 물음은 단지 세례를 받기 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배의 훨씬 앞부분에서 그리고 세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거듭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세례를 받는 사람은 단지 앞서 말한 항목에 동의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 신조와 완전히 일치되는 더 높은 차원의 훈련으로 인도되기도 하였다.

어쨌든 세례를 위한 문답은 단지 입으로만 하는 동의에만 머무르지 않도록 신조와의 일치(Reddition Symboli)되는 인격을 추구하였다. 사도신경(symbolum apostolorum)의 텍스트는 이처럼 세례를 받는 과정에서 묻는 신조들로서의 형성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신경 혹은 신조(symbolum)는 세례 때의 질문 문항으로서만이 아니라 세례를 받기까기 과정과 세례 집례의 예배를 전체적으로 지배하는 살아있는 신앙고백으로 수용되고 있다. 신조는 곧 표증(signum)을 의미하고, 한 신앙 인격 전체를 규정하는 표로 인식되었다.


◇미주

7) Kelly, Early Christian Creeds, 4.

8)  참고) Hermann Witsius, Sacred Dissertations on the Apostles' Creed (Escondido: The den Dulk Christian Foundation 1993)

9) Henri de Lubac, Christian Faith (London: Chapman, 1986), 15.

10) Martin Luther, LW vol 41 (Weimar, 1910), 275.

11) John Calvin, CO I. 56.

12) 314년 아를(Arles) 총회에서 처음으로 신경(sybolum)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였다. “어떤 이가 이단 공동체에 속하였다가 교회로 넘어오게 되었을 때 교회는 그에게 그의 고백을 물어야 합니다. (interrogent eum symbolum) 그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받기 위해서 온 것을 알도록 말입니다.”

13) Hans Lietzmann, Die Anfänge des Glaubensbekenntnisses, 226.

14) Apologia, I. 61

15) Adv. Haer. I. 10

16) Epistola ad Diognetus. 6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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