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어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다스린 결과 사람과 짐승들에게 먹을 것이 공급될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다. 이때 육식이 아니라 채식이다. 억압과 폭력과 착취로 얼룩진 제국의 음식이 아니라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 양식이 공급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이 에덴에서 구현되기를 원하였다. 물과 사람이 있기에 먹을 것이 나는 곳이 에덴이다. 그 에덴을 사람이 경작하고 지키게 하셨다. 경작함으로 먹을 것이 계속 나도록 했고, 선악과를 따 먹지 않음으로 모든 사람이 함께 먹는 세상을 유지하게(지키게) 하였다. 이것이 에덴의 선한 질서이다.

 

1. 돕는 이는 무엇인가?

에덴에는 아직 아담밖에는 없다. 혼자서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릴 수 없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할 수 없다(1:22). 복은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한 것을 누리는 것이다. 생육하기 위해서는 혼자 있어서는 안 된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복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이다. 그러므로 혼자 있는 상태는 아직 보시기에 좋은 상태에 이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평가한다.

혼자는 외롭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혼자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돕는 이(배필)를 만드신다. 개역개정은 돕는 배필이라고 결혼 관계에 있는 남녀를 가리키는 용어를 사용한다. 특히 생육과 번성에 대한 성적인 문제가 있으므로 성경 전반이 지지하는 부부의 가치를 유지하는 좋은 번역이다. 그러나 배필은 사실 부부라는 정당한 관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성적 관계를 지향하는 좋은 측면을 넘어서서 일반적인 사람들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번역이다.

 

돕는 배필(עזר כנגדו , βοητον κατ' αυτον)란 말의 원어는 "그에게 (적합한 혹은 적절한) 돕는 이"로 번역된다. 이것이 돕는 배필보다는 더 일반적인 번역이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이 취하는 것이다. 부부관계에만 적용되는 용어를 서구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인간관계 일반에 사용되는 용어로 번역한다. 그래서 a help fit for him, a helper meet for him, helper suitable for him(모두 그에게 적절한 도우미)로 번역된다. 흥미로운 것은 칠십인 역은 그에게 적절한으로 번역되는 전치사를 κατα(against, according to, 대응하여)로 둔다. 이는 단순하게 그의 편에 있는 도우미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히브리어도 단순 도우미를 말하지 않는다. 그와 맞서 있는 도우미란 의미가 히브리어나 헬라어에 맞다. 그래서 영어 번역들은 "그에게 적절한 도우미"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타락 사건인 선악과를 먹는 일에 있어서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같이 먹음으로 돕는 이로써 역할을 잘하지 못했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결국 여자에게 남자와의 정당한 갈등 관계가 필요하다고 적시하신다(3:16). 사람이 죄와 갈등 관계를 가져야 하는 원리와 같다(4:7).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사람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누리야 하기 때문에 홀로 있어서는 안 된다. 홀론 있음은 좋은 세상이 아니다. 복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해 돕는 이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에게 복을 누리는 삶, 선을 향유하는 삶을 살기에 적절한 돕는 이를 하나님이 만드셨다. 여자다.

 

아담밖에 없는 에덴에 하나님께서 아담 말고 다른 사람을 만드실 계획을 가지면서 그 다른 사람을 규정하는 방식이 바로 "돕는 이"이다. 이것은 향후 모든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이 된다. 타인이 누구인가? 내가 부리는 사람인가? 고용한 사람인가? 아니면 나의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인가? 성경은 아담 아닌 다른 첫 사람의 등장을 돕는 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가 서로 돕는 관계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이것은 부부가 서로 도와야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 기본적인 의미가 되기도 하지만, 이것을 뛰어넘은 인간관계 일반을 규정하는 것이 돕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을 서로 도와야 한다. 이용하려고 하지 말라. 서로 도우려고 해라. 하나님의 선한 세상을 위한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려고 해라. 서로 경쟁의 상대로 보지 말고, 서로의 도움이 되는 상대가 되라. 서로서로 도움이 될 때 비로소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에 평화가 임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선한 세상이 된다.

 

육식을 하는 세상은 폭력과 억압 그리고 약탈이 있는 제국시대의 상징이다. 힘과 권력을 가지고 약자를 괴롭히고 이용하고 짓밟는 세상은 평화로운 세상이 아니다. 선한 세상도 아니다. 힘과 권력은 백성들의 삶을 세워주고 먹을 것과 같은 필요를 채워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할 때 힘과 권력이 그 의미를 가지게 된다. 평화가 도래하게 만들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마찬가지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근간이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일은 바로 우리 자신들 각자가 이웃의 도우미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이런 도우미가 되는 삶을 사는 것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섬김이 깨달음을 준다. 하나님의 큰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이웃을 위한 참된 도우미가 되도록 요청한다.

 

2. 돕는 삶과 선악과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돕는 이가 없는 삶이 좋지 않다. 다르게 말하면 돕는 삶이 선한 것이다. 에덴에서 선악과를 먹지 않는 부정적 행위만 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다 드러날 수 없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은 바로 타인의 주어질 먹거리를 지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경작한 것 중에는 타인의 것이 있기에 이것을 지켜내는 삶이 선한 삶이다. 이것을 타인과의 관계의 용어로 말할 때 돕는 삶이다.

 

선악과를 먹지 않고 지켜내는 것은 에덴의 질서이고 하나님의 명령이며 율법이다. 그렇다면 여러 사람이 있게 되는 사회에서 선악과를 먹지 않는 삶은 무엇인가? 이웃의 먹거리를 지켜내는 삶이다. 돕는 이로 살아야 한다. 이웃을 속이며 등치고 배반하고 유혹하는 일을 해서는 돕는 삶이 아니다. 사회의 선한 질서를 위해서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는 지켜야할 질서가 있는데, 바로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의 도우미로 사는 삶이다.

 

이제 돕는 이(배필)가 무엇인지 본문을 통해 더 검증해 보자.

 

2:18-20절은 구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18절은 돕는 이의 필요를 제기한다. 그래서 돕는 이를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결심이 나온다. 그리고 19-20a는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을 만드신다. 그리고 사람에게 이끌어 이름을 주도록 했다. 20b는 다시 돕는 이(배필)가 없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리고 21-22절에 돕는 이(배필)로 여자를 만드신다. 이를 정리해 보자.

 

A 돕는 이를 만들자(18)

X 짐승을 만들고 사람이 이름을 준다(19-20a)

A' 돕는 이가 없다(20b). 그래서 21-22절에 돕는 이를 실제로 만든다.

 

이런 대칭 구조에서 돕는 이(배필)를 만들자는 제안과 실천이 처음과 끝에 나온다. 그리고 그 가운데 짐승을 만들어서 사람이 이름을 주게 한다. 그렇다면 돕는 이가 필요해서 만들면 어떤 일을 하기 위한 것이지를 이 구조가 보여준다. 짐승들의 이름을 지어주기 위함이다. 돕는 이가 도와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름을 짓는 일이다. 다르게 말하면 대상을 파악하고 잘 다스리기 위함이다.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그 이름을 불러야 할 대상에 대한 이해가 전제된다. 논문은 현상을 살피면서 그 현상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고 나아가서 최종적으로 그런 현상에 대한 이름을 지어주는 작업이다. 이름을 준다는 것은 그 현상에 대한 파악과 이해를 끝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현상을 이해하면서 다루는 방향성을 가름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짐승의 이름을 붙여주는 것도 그렇다. 수많은 동물과 식물의 분류와 이름을 붙이는 작업은 학문적 과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가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다. 이름을 주는 것은 다스리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이름을 붙임으로 대상을 파악하고 관리하고 지키는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을 혼자서 할수 없다. 그래서 돕는 이가 필요한 것이다. 세상의 삶을 혼자서 다 처리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필요로 한다. 모든 사람이 농사를 지을 수 없고, 모든 사람이 장사를 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각자가 서로에게 돕는 이가 되어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사람이 다스리도록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음을 보았다. 그런데 이 다스림이 가능하기 위해서 생육과 번성만이 아닌 다스림이 더 일반적인 사람의 특징이다. 다스림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돕는 이를 두신다. 솔로몬은 초목과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하였고 이것으로 그의 지혜와 지식의 소문이 천하의 왕들에게 퍼지게 되었다(왕하4:33-34). 다스린다는 것은 아는 것을 전재하고 이를 통해 각기 자기의 무화과 나무와 포도나무 아래서 평화를 누리며 사는 삶을 살게 된다(왕하4:24-5).

 

돕는 이의 역할은 이름을 짓는 일 즉 다스리는 일을 위한 것이다. 다스리는 일은 하나님의 형상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일을 위해 돕는 이를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3. 왜 돕는 이를 갈빗대로 만드시는가?

사람의 관계가 돕는 관계임을 살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억압하고 짓밟아서는 안된다. 서로 돕는 이가 되어야 다스리는 역할을 하고 그래서 선한 세상을 만들수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가 기록될 당시 세상은 제국적 지배와 억압이 만연한 시대임을 반영한다. 폭력적 시대를 살면서 하나님이 세상을 처음 만드셨을 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어떤 관계였을까를 반영한 창조기사라고 볼 수 있다.

 

아담을 만들듯이 흙으로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서 돕는 이를 만들었다. 그럼으로 만든 여자는 남자의 분신과 같다. 왜 갈비뼈인가를 질문하는 것은 필요한지 모르지만 필자로서는 아담 자신에게서 생겨난 존재가 여자라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 아닌 다른 첫 사람은 나 자신과 같다. 이것을 전달하고 싶은 창조의 방식이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억압해서도 안되고 학대해서도 안되고 짓밟아서도 안된다. 서로 도우므로 다스리는 삶, 서로를 지켜주는 삶을 살아서 선한 세상을 이루도록 하심이다.

 

우리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이 그냥 사람이 아니라 돕는 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평생에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한다. 서로를 지켜주면서 선한 세상을 위한 동역자로 알고 달려가야 한다.

 

다음은 돕는 관계의 기초적 부분이 부부관계를 규정하는 본문을 살펴본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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