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돕는 배필을 "그에게 적절한 도우미"라는 번역을 제시했다. 그리고 도우미로서 에덴에서 경작하고 지키는 일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함도 보았고, 이것은 선악과를 따 먹지 않는 것과 연결된다. 남의 음식을 탐욕으로 빼앗는 일에 협력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적절한 도우미로 허락하신 것이다. 이는 때론 갈등이 필요함을 말했다. 갈등의 정당성이 돕는 배필이란 말에 담겨 있다는 것을 정리해 본다.

 

1. 돕는 관계에 담긴 갈등의 정당성

 

아담과 하와 그리고 아간의 가족, 나아가 아나니아와 삿비라의 경우 모두 한마음으로 협력하였기 때문에 언약적 저주를 받은 상황임을 살펴보았다. 그래서 서로 적절한 도움의 관계는 지켜야 할 것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을 돕는 것이 전제된다. 이것을 지키지 않을 때 하나 됨은 선한 것을 이루지 못한다. 선한 세상을 사는 방식으로 하나가 됨이 파괴된 것이다. 바울이 나누어짐이 정당하다고 고발한 성찬식의 광경도 참조점이다. 이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본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14:26).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같이 살펴보아야 할 것은 막10:29~30절이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매우 놀란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오직 하나님만 구원을 주신다고 답변하신다. 이때,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음을 확인한다. 예수님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선언하신다.

 

여기서 집과 형제와 자매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는 개별화된 대상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삶을 설명하고 뒷받침하는 전체이다. 집과 전토 그리고 가족 관계들이다. 이것은 삶을 지탱해주는 물적이고 관계적인 기초이다. 그런데 주와 복음을 위해 이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버릴 때, 백배나 나은 토대를 허락해 주신다.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삶의 양식들을 주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집이나 전토가 백배나 되는 것은 좋지만 어머니가 백배가 되고(이것은 질로 받고 싶고), 형제·자매들도 질로 받고, 집이나 전토는 양으로 받고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일관성이 결여된 것이다. 개별화가 불가능한 것이고, 하나님 나라가 주는 새로운 관계와 삶의 토대가 주어진다. 이것을 믿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 필요하다.

 

비록 제자도의 중요한 본문에서 부부관계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삶의 관계를 망라하고 있다. 복음을 믿고 따르는 일이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창12:1-3절에서 아브라함이 버릴 것과 약속된 것의 대조와 같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한다. 땅과 사람 그리고 아버지 이름이 지배하는 질서이다. 그런데 약속된 것은 약속된 땅, 큰 민족, 그리고 이름의 창대함이다. 새로운 땅, 새로운 가족들, 새로운 이름 아래 있는 새로운 질서가 약속되었다. 이 세 가지가 구약의 구속사를 진행하는 주요 흐름이 된다. 창세기는 번성, 출애굽기에서 사사기까지는 땅의 소유, 그리고 사사기부터 삼하까지 이름의 창대함(삼하7:9) 즉 국가 권력의 안정이다. 다윗 왕조의 형성을 말한다. 하나님의 부름과 약속을 위해서 버려야 할 것들에는 친족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 아내와 함께 떠났고, 조카 롯과 함께 떠났다. 약속을 따라서 함께 가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 앞서 언급한 눅14:26절을 다시 보자. 주님께 오는 자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여야 한다. 이것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야 함을 말한다. 자연적 관계에서 주어진 질서와 관계가 자동으로 구원의 상속자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여기서 갈라짐과 미움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예수님은 자기의 가족에 대해서까지 이렇게 말씀하신다. 3:31-35절이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는다. 이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둘러앉은 자들을 보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들이다. 이들을 보시면서 보라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예수님은 자기 가족도 혈육이란 관계성이 하나님의 나라를 거저 얻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2. 갈릴리 가나의 첫 표적

 

이런 면이 가장 크게 드러난 것이 예수님의 첫 표적 갈릴리 가나의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이다. 결혼식 잔치 자리에 초대받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이다. 그런데 잔치 자리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비상 상황이다. 손님들을 초대해 놓고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잔치가 계속될 수 없음을 말한다. 이런 와중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말한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모자간의 관계에서 일어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상하게 답변하신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세 마디의 말이다. 많은 질문이 생긴다. 왜 어머니를 여자라고 불렀는가? 여자는 존칭인가 혹은 비칭인가? 그리고 나와 상관이 있냐는 말의 대상이 잔치 자리의 포도주가 떨어진 것과 나와 무슨 상관인가 아니면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한 어머니와 예수님이 무슨 상관이냐는 말인가? 더욱이 예수님의 때는 무엇인가? 십자가와 부활의 때가 왜 여기서 나오는가?

 

정리하면 여자라는 칭호는 경칭도 비칭도 아닌 객관적인 칭호이다. 모친과 자신의 관계를 객관화시키는 칭호이다. 다르게 말하면 잔치 자리에 포도주가 떨어진 현실에 개입하기를 요청하는 마리아의 요청은 아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과 어머니의 관계를 객관화하고 있다.

 

둘째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의 헬라어 본문은 의미를 분명히 밝혀준다. 나와 당신과 무슨 관계입니까?(Τεμοι και σοι, γυναι;) 질문은 마리아와의 관계를 묻는 것이다. 여자여! 라고 객관화하면서 내가 당신에게 아들입니까? 아니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의 때를 말씀하신다. 이것은 나의 때를 주관하는 것은 어머니가 아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말씀함이다. 요한복음에서 때를 결정하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예수님은 어머니의 아들로서는 아무것도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몰라도.

 

이런 예수님의 이상한 말씀에 대해 마리아는 흔쾌이 이렇게 말한다.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이것은 마리아가 이미 자신의 육신의 아들로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말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내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이 상황을 알린 것이고 가십거리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이 상황을 구원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세 마디의 말을 충분하게 알아들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진도를 뽑는다. 해결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무슨 말씀이든지 종들에게 말해서 해결해 달라고 요청한다. 유대교의 정결 항아리 여섯이 있지만, 무력한 현실에 예수님의 말씀이 결핍과 부족의 현실을 해소한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한 말을 듣는 순간 인간의 관점에서는 긴장과 이해되지 못한 갈등을 일으킨다. 도대체 예수님이 뭐야? 자기 어머니한테.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혈과 육으로 받을 수 없는 나라이고 그 생명을 누리는 일이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 그리고 지켜야 할 것을 근거로 모자의 관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음을 말한다.

 

부부의 관계가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 됨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하다. 서로 돕는 이로 하나가 됨이 전체이다. 그래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이 나온다. 그런데 그 하나 됨이 지켜야 할 것을 잃어버리면 서로에게 짐이 되는 무거운 관계가 된다. 서로의 책임을 전가하는 일이 벌어진다.

 

서로 돕는 관계는 창조된 인간들 모두에게 필요한 관계이다. 단지 부부에게만 돕는 관계는 아니다. 이웃을 너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의 정신이 모든 인간관계는 서로 돕는 관계가 될 것을 요청한다. 서로의 먹을 것을 챙겨주는 삶이 되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 먹지 않는 삶을 사는 선한 삶의 실체이다. 이러한 선한 삶의 실체를 위해 서로 돕는 관계는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가 되라는 말의 뒷면에는 갈등할 것을 말한다. 실제를 돌아보자. 정말 갈등해야 할 것은 사이가 좋고, 정말 하나가 되어야 할 것에는 갈등하는 현실이 아닌가? 이것은 거짓 관계이다. 서로 지키는 삶을 위한 바른 갈등을 극복하면서 선한 세상을 위해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해 존재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복음을 위한 삶이고 서로 돕는 관계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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