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돕는 배필은 '그에게 적절한 도우미'로 번역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히브리 본문을 근거하였다. 돕는 배필이란 번역은 결혼 관계에서 적용되는 아주 제한된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물론 아담에게 허락된 첫 여자가 그의 아내이기에 돕는 배필이라고 번역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첫 사람에게 다가온 또 다른 첫 번째 사람이고, 그들의 관계를 서로에게 적절한 도우미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이것이 부부관계에서는 돕는 배필이 되기도 한다.

 

1. 그에게 적절한 도우미

단순한 도우미가 아니라 그에게 적절한 도우미를 만드셨는가? 무조건 그의 편이 되는 도우미란 뜻은 아니다. 앞서 도우미를 만드신 것은 선악과의 명령을 지키는 것과 연결시켰다. 일하면서(경작하면서) 지켜야 하도록 에덴동산에 사람을 하나님이 두었다. 그런데 선악과를 비롯해서 모든 나무를 가꾸는 일을 하는 것이 경작이고, 그것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명령과 관계된다. 그래서 모든 나무 실과를 먹지만 선악과는 먹지 않아야 하는 명령이 주어졌다.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의 양식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지키는 삶이다. 사람의 먹을 것에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명령이 언제나 들어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먹을 것을 지켜주는 삶이 바로 선한 삶이다. 이런 선한 삶을 사는 선악과 규정을 지키는 것이 서로 돕는 삶의 실체이다.

그러므로 서로 돕는 도우미를 주셨다는 말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도록 돕는 방식의 도우미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지키는 일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아담과 하와의 관계에서 선악과 문제 앞에서 그들을 서로 돕는 관계가 정상적으로 진행이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서로 파괴적인 방식으로 도왔고, 그 결과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일이 발생했다.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 지켜야 할 일이고, 그것을 따 먹지 않는 일에 서로 협조해야 했다. 그런데 하와는 아담과 의논하지 않고 선악과를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 따 먹었고, 그것을 그 남편 아담에게 주어 먹게 했다. 먹을 것을 주었다는 측면에서 돕는 역할을 한 것이지만 그러나 적절한 도우미의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아담도 하와가 따먹은 것을 함께 먹음으로 하와의 일에 협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실제로 하와에게 유익이 되는 도우미가 되지 못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주신 여자가 주어 먹게 했다는 비난을 만들어 버렸다. 먹고 싶어도 남의 것은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고 명령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책망하고 지키는 것이 서로의 역할이다. 뱀은 이러한 서로의 역할, 지키는 역할, 바르게 돕는 역할을 무너뜨렸다.

그래서 3장에서 살펴볼 것이지만 남녀 관계가 서로 갈등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저주하신다. 여자에게 준 저주의 내용은 두 가지다. 첫째는 해산의 고통이 커졌다는 것이고 둘째는 남편과의 관계가 갈등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해산의 고통이 크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저주는 저주를 겸비하게 받아들이고 돌이키면 복이 된다. 그것이 언약적이다. 해산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아이를 가지면서 미래의 소망을 가진다. 마찬가지로 여자가 남편을 갈망하지만, 남편은 그를 다스리게 된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를 이겨내려는 갈등의 표현이다. 4:7절에서 가인에게 하나님이 죄와 갈등하는 관계를 규정한 구문과 어휘가 같다 죄가 너를 갈망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죄와는 갈등이 있어야 정상적인 관계임을 가인에게 알린 말씀이다. 똑 같은 어휘와 구조를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다. 남편과 아내는 무조건적으로 돕는 관계가 아니라 필요한 경우에 갈등의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성경은 갈등과 다툼을 좋게 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분쟁과 다툼이 있어야 옳은 경우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바울은 성찬과 관련해서 고린도 교회가 갈등이 있어야 옳다고 말한다(고전11:19). 가난한 성도들이 늦게 도착하고 음식도 지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먼저 온 성도들이 성찬을 먹고 있다면 성찬식은 단지 식사의 의미 이상이 아니 상황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먼저 온 성도들이 음식을 먹지 않고 기다림이 마땅하다고 가르친다. 이런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식사로만 먹고 마시면 죄를 먹고 마시는 행위이고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 경우가 있음을 경고한다. 시장해서 밥이 필요하면 집에서 먹고 형제를 기다려서 같이 교제의 떡을 나누어야 한다. 갈등이 필요한 경우이다.

남자와 여자가 친밀한 사이이지만 그러나 적절한 도우미의 관계가 된다는 것은 서로 갈등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를 지켜내는 일에 성실한 도우미가 되어야 한다.

 

2. 아간의 집과 아나니아와 삿비라

부부 관계에서 적절한 도우미가 되지 못한 두가지의 경우를 예를 들수 있다. 아간과 그의 집이 함께 무너지는 여리고 성과 함께 무너진 경우이다. 또 한 예는 신약에서 아나니아와 삿비라가 함께 베드로 앞에서 죽어 나간 경우이다. 둘 다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서 적절한 도우미가 되지 못하고 무조건적 편을 들다가 망한 경우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일에 실패한 도움의 관계들이다.

아간의 경우를 보자.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 6일을 돌고 7일에 7바뀌를 돌면서 여리고는 무너졌다. 여리고 가나안의 첫 성읍이다. 진멸해야 할 성읍이다. 사라져야 할 성읍이다. 6일과 제7일의 구조는 창조의 한 주간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사건은 재창조의 사건으로 이해된다. 어둠을 몰아내고 빛이 임한 사건이다.

그런데 무너지는 성과 함께 무너지지 않은 라합과 그의 집이 있다. 반면에 무너지는 성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책임을 가진 유다 지파의 아간과 그의 집은 오히려 여리고 성과 함께 무너졌다. 왜 무너졌는가? 경작하는 일은 성실했다. 즉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일을 했다. 그리고 무너진 성읍에서 하나님의 것을 모았다. 그러나 지키는 일에 실패했다. 여리고는 첫성이기에 첫열매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듯이 모든 전리품이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져야 했다. 그런데 아간은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과 금과 은덩이에 욕심을 부리고 자신의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다. 이것은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6:18-9)는 명령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텐트에 훔친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 땅을 파는 일에 집안 식구들이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함께 망하였다. 아골(괴로움)골짜기는 생겨났다. 적절한 도우미가 되지 못함으로 새로운 시대 즉 가나안 땅에서 새로운 창조의 세계를 맛보지 못하고 옛세상에 속한 자들과 함께 죽게 되었다.

두번째는 아나니아와 삿비라이다.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성령님이 오셨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되었다. 성령님의 역사로 인해서 교회는 한 마음이 되었고, 한 뜻을 이루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각 사람의 필요를 위해 자기의 것을 내어 놓았고, 심지어는 땅과 집을 팔아서 내어 놓기도 했다.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아나니아와 삿비라도 그 대열에 참여하고 싶었다. 그래서 집을 팔아 판 값을 가지고 베드로에게 나아갔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은 감추었다. 그럼에도 전부라고 성령과 하나님을 속였다. 그래서 차례대로 두 사람은 속이는 일에 협력하며 돕는 관계를 유지하고 말을 맞추었지만 결국 함께 망하고 말았다.

오순절의 예루살렘 교회는 새로운 역사의 출발이다. 바벨 이후로 갈라진 세상의 역사, 창조된 세계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묶어내는 새로운 창조의 시기를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 죽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한 삶의 비참이다. 제대로 있어야 하는 갈등을 가져보지 못한 부부의 비참한 결말들을 본다.

적절한 도우미로 관계를 맺고 산다는 것은 갈등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갈등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지킬 수 있는 것을 지킨다. 그러나 이것이 고집이나 아집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에서 발생해서는 안된다. 모든 것을 도울 것처럼 다가오는 경우를 조심해야 한다. 적절한 갈등속에 적절한 도움이 싹트고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야 지키는 삶, 그리고 돕는 삶이 가능해진다.

 

3. 부끄러움이 무엇인가?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나서는 서로가 부끄러워하였다. 그래서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해서 가렸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숨었다. 하나님도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 부끄러움을 인정하신 것이다. 그런데 부끄러움의 실체가 무엇인가? 그것을 따 먹지 않아야 할 것을 먹은 결과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말씀에 명백히 들어있다. 아담이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한다(3:10). 부끄럽다는 말을 하나님 앞에서는 두렵다고 표현한다. 이것을 받아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누가 너희 벗었음을 네게 일렀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즉 벌거벗음을 알게 된 것은 먹지 말라고 명령한 것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콕 집어서 언급하신 것이다. 부끄러움, 두려움은 명령을 지키지 못한 결과이다.

부끄러움이 무엇인가? 성적인 수치심인가? 부끄러움의 실체는 죄의식이다. 죄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두 사람이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움이 없었다.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어 부끄러움이 없는 서로에게 적절한 도우미로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왜 부끄러운 현실이 되었는가? 치마나 옷을 지어 입은 것은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함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부끄러움이고 하나님 앞에서는 두려움이다. 왜 죄 때문이다.

부끄러움이 없었다는 말은 서로에게 적절한 도우미로 경작하는 일과 지키는 일을 잘 하고 있었던 것이고, 서로에게 적절한 도우미의 역할을 잘 감당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관계가 깨어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부끄럽고 부담이 되는 존재가 된다. 부끄러움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서로의 짐을 지는 관계가 아니다. 도우미의 관계가 아니고 멀리하는 대상이 된다. 나아가 가인과 아벨의 경우 미움의 대상이자 살인의 대상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아벨의 피는 보복을 하나님께 호소한다. 불행한 관계가 부끄러운 관계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 하는 마음이 아니라고 바울 사도는 말했다(딤후1:7). 부끄러운 관계는 서로에게 대한 부담을 거절하는 마음이다. 만약에 너희가 나를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너희를 부끄러워할 것이다(8:38). 부끄러움이 없는 관계는 서로 돕는 관계가 적절이 유지될 때 가능한 것이다. 부부의 성적인 관계의 정당성을 말하는 표현 속에는 서로의 거리낌 없는 관계성이 반영되어 있다. 바른 관계, 적절한 도우미로 살아가는 관계성이 만든 실체를 표현한다. 이것은 부끄러움이 있는 세상에서 바라본 창조의 때에 이상적 모습을 부정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표현한 것이다. 부끄럽다는 부정적 언어를 통해서 그것이 없는 세상이라고 본 것이다. 그 증거가 또한 부모를 떠나라는 표현을 사용함이다. 부모가 없는 시대에 어떻게 부모를 떠나라는 말이 성립이 되는가? 부모가 있는 시대에 부부 관계가 적절한 도우미로 존재하도록 격려하여 지킬 것을 지키는 가정이 되도록 요청한다.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과의 관계는 서로의 삶에 필요한 것, 먹을 것을 적절히 공급하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누구는 호화로이 매일 잔치하면서 누구는 그 집에 떨어지는 음식을 개와 함께 경쟁하는 현실은 서로가 부끄러운 관계이다. 바울은 예루살렘 구제헌금에 대해서 고린도 교회를 격려하면서 헌금을 미리 잘 준비하도록 한다. 가난하고 핍박을 받는 중에도 풍성한 연보를 한 마케도냐 교회 성도들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을 때, 고린도 교회가 준비를 하지 않으면 너희 고린도 교인들은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믿던 것은 고린도 교회가 일년전부터 열심을 가지고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도우려 했던 일이다. 그런데 실제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움은 이렇게 다른 사람의 필요에 준비하며 응답하지 않는 삶을 말한다.

 

이제 타락의 장으로 유명한 창3장을 읽으면서 타락의 본질이 먹을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본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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