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길 목사의 이탈리아 여행 기행문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서 만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이 글은 필자의 이탈리아 여행 기행문

중세 천년의 역사 궤적을 찾아서에서 발췌, 정리한 것이다-

 

글 순서

사보나롤라가 살았던 시대

사보나롤라가 찾은 도미니코 수도원

사보나롤라의 신앙과 사상

사보나롤라의 삶과 설교

사보나롤라의 개혁 이상

사보나롤라의 최후

마무리 글

 

그곳에 꼭 한 번 가고 싶었다.

마침 기회가 주어졌다. 지난 달 중순 인천에서 로마 피우미치노 국제공항까지 8,974킬로미터(5,576마일) 거리의 비행은 지루했지만, 이국 땅 낯선 공항에서 일곱 가족이 함께 만나는 설렘이 시간을 단축시켰다. 그리고 자녀들과 함께 약10일 동안 이탈리아반도 남북을 넘나들면서, 중세의 궤적을 따라 십여 개 도시와 지역을 방문한 것은 매우 의미 있었던 일로 간주된다. ‘중세 유럽의 중심도시’, ‘중세 유럽의 아덴피렌체(플로렌스)를 비롯한 지중해 시대와 유럽 중심의 제국 로마, 그곳에 남아있는 그 먼 옛날의 흔적들이 21세기를 사는 우리 가족들에게 이토록 새로운 경험에 대한 도전을 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특히 피렌체에서 사보나롤라(Girolamo Sabonarola, 1452-1498)의 마지막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각성을 자극시킨 교훈이도 했다. 그래서 사보나롤라의 짧은 삶을 찬찬히 더듬어 보려고 한 것이다.

▲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베키오 궁전, 그 왼쪽 측면에 넵튠분수대, 사보나롤라의 처형장

 

사보나롤라가 살았던 시대

꽃의 도시피렌체는 중세의 역사와 정치, 예술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어린 단테가 첫 사랑을 마주쳤다는 베키오다리 아래 토스카나의 찬란한 역사를 품고 흐르는 아르노 강(Arnon River) 언덕길을 걸으면서, 500년 전 사보나롤라를 떠올렸다. 그의 분골(粉骨)이 하얀 포말(泡沫)을 이루며 뿌려진 강, 그 강변길을 걷는 21세기 피렌체 시민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피렌체를 찾는 수많은 여행자들 가운데는 사보나롤라의 궤적을 찾아 온 여행자들도 많을 것이다. 그 관광 수입은 피렌체 시의 세수(稅收) 몫일 텐데, 사보나롤라의 궤적은 르네상스의 빛에 가려져 있었다. 사보나롤라는 중세의 암울한 막장 길에서 한 가닥 희망의 빛으로 살았다. 그러나 이룰 수 없었던 이상(理想) 때문이었을까, 마흔 다섯 나이에 죽고 또 죽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시뇨리아 광장은 어렴풋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보나롤라는 정치적으로 나폴리공화국(1282-1816), 교황청(756-1929), 밀라노공화국(1395-1797), 플로랜스 공화국(1115-1532), 베니스공화국(697-1797) , 다섯 개 전제군주 형 도시국가 권력이 지배하던 시대, 그중 피렌체공화국이 중심위치에 있었다는데, 종교적으로는 중세(서로마 패망 476-동로마 멸망 1453) 전 기간 중 전성기였던 로마 천주교의 교권(敎權) 신장 폐해와 부패가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당대 문화적 배경과 관련, 박영근은 그의 석사논문(2003)기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설교 이해와 현대의 예언적 설교연구에서 문화적으로는 과거의 저급한 문예활동에서벗어나 기존권위에 대한 저항과 비판, 개인주의 형성, 그리고 자연을 사랑하며 즐기는 특징을 짓는, 말하자면 이성을 존중하는 새로운(rebirth) ‘문예부흥시대였다라고 진단했다. 사보나롤라의 후반기 생애는 이탈리아반도 토스카나 주의 아르노 강을 끼고, 역사적 기복을 반복하며 400여 년 간 발전한 피렌체공화국의 수도 피렌체를 배경으로 한다. 피렌체공화국 시대의 교황은 제161대 젤라시오 2(재위 1118-1119)로부터 제214대 교황 알렉산더 6(1431-1429)에 이르기까지 모두 55, 사보나롤라의 활동 시기는 중세와 피렌체공화국의 사양(斜陽) 시기에 해당하며, 이 시대는 성직매매와 교황청의 온갖 비리로 점철된 교회의 악과 메디치 가문의 부()에 치부가 빚은 사치와 허영이 팽배한 사회의 악이 지배하던 시대다.

피렌체공화국 말기의 교황이었던 제214대 알렉산더 6(1431-1429) 재위(1492-1503) 시기의 종교적 배경과 메디치 가의 부와 사치로 인한 사회적 부패가 극치에 달한 시대적 배경에서 사보나롤라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시대적 필연이었을지 모른다. 교권(敎權)과 속권(俗權)에 억압된 시대적 배경에서 사보나롤라의 개혁 외침은 이란격석’(以卵擊石)에 불과했다. 1492811일부로 교황 직무를 수행한 알렉산더 6세는 스페인 출신이다. 그는 재위 11년 동안 도덕적으로 존경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최악의 교황이라는 오명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그에 대한 일부 역사적 평가는 냉혹하기까지 하다. 특히 그에 대한 출생의 비밀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알렉산더 6세에 대한 추문들은 주간지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어두운 뒷골목 얘기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여행 중 폼페이의 홍등가폐허에서 본 인간의 추악한 본능은 장구한 인류 역사를 두고 반복되고 있다는 교훈을 되씹었다. 양태자 박사의중세 뒷골목 풍경(2011)에 의하면 매춘 여성들이 그들의 수입 중 상당 부분을 교회에 예물로 바쳤다.’라고 지적한 부분은 중세 교회가 돈을 모으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일 텐데, 이는 역사상 모든 시대 모든 교회가 각골지통(刻骨之痛)의 경계로 삼아야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알렉산더 6세는 르네상스 시대 교황들 중 가장 입소문에 시달렸던 교황들 가운데 예외가 아닌 종교지도자였던 것 같다. 교황의 막강한 권력 자리에서도 끊임없이 세속 권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함으로써, 권력의 속성인 음모와 암투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보나롤라는 바로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개혁의 꿈을 키워왔던 것이다.

한 편 사보나롤라는 메디치가의 재력(財力) 지배 속권(俗權) 남용이 빚은 사회적 병폐들을 주목하면서 기독교의 사회적 양심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당시 피렌체는 정치와 경제가 메디치가를 중심으로 경영된 메디치가 왕국이었으며, 정신문화의 상징인 르네상스발흥지로서 인간이 추구하는 건전한 욕망을 꽃피운 곳이기도 하다. 르네상스가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재흥(再興)이었다면 사보나롤라의 개혁은 성경으로의 회복이라는데 그 의미를 둘 것이다. 그러나 개혁의 현실은 레드카펫이 아니었다. 피렌체의 명문귀족 파치(Pazzi) 가문과 약업에서 금융업으로 떼돈을 모아 유럽의 권력과 재력을 한 몸에 지녔던 메디치(Medici) 가문은 또 하나의 실권적 현실 벽이었다. 14784월 피렌체 대성당에서 파치 가문의 암살자가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와 동생 줄리아노를 상대로 벌인 음모는 피렌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사건은 두 가문의 갈등을 넘어서 로마의 교황과 피사(Pisa)의 대주교, 나폴리의 왕과 용병 등, 당대 정치와 권력가를 주름잡던 핵심 인사들이 대거 연루되었고, 그 중 피렌체의 연루자 80여 명이 교수대에 서야 했었다. 사건은 당시의 부도덕하고 비열한 정치현실을 보인 단면일 뿐 아니라, 돈과 권력을 독점하려던 막후 음모에 의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충격파가 컸다. 두 가문은 다 르네상스 발전에 공헌한 정치와 재정적 후원 실세들이었다. 메디치가의 실질적 창업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1360-1429), 1421년 그는 유럽 일대에서 최고부자, 피렌체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 가문은 제217대 교황 레오 10(1475-1521), 클레멘스 10(1590-1676) 등 두 명의 교황과 두 명의 프랑스 왕비(카트린 드 메디시스, 1519-1589, 마리 드 메디시스)를 배출할 만큼, 종교와 정치의 명문가이기도 하다. 당대 유럽의 최고부자, 최고 권력의 가문, 메디치가의 부와 권력을 400(1379-1793) 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역시 피렌체 시민들의 메디치 가문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었다. 시민의 사랑을 받은 것은 가문의 재산과 유산을 시민들에게 물려주는 사회 기여도에 대한 높은 점수 때문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메디치 가문은 재능 있는 예술가와 학자들을 후원하여 종교적 통제와 문화적 획일성에서 인간 이성을 꽃피우는 중세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은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Anna Maria Luisa de' Medici, 1667-1743)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안나 마리아는 350년 메디치 가문의 끝을 잡고 일으켜 세워 보려고 안간 힘을 다해 노력했지만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메디치 가문은 후사가 없어서 안나 마리아의 죽음으로 18세기에 이미 끝났지만, 현재 피렌체 시민들은 메디치가의 정신 유산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Gelleria degli Uffizi)과 피티궁전(Palazzo Pitti) 박물관에 소장된 막대한 문화유산들은 값으로는 도저히 통산하기 어려운 보물들이다. 2014년 세계관광 순위 5위의 이탈리아는 그 유산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실증이기도 하다.

 

사보나롤라가 찾은 도미니코 수도원

사보나롤라는 퓨리탄 광신자라는 꼬리표와는 달리, 로마천주교의 교리와 신학체계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독일의 개혁자 마틴 루터(1483-1546) 보다 31년 앞선, 1452921일 토스카나(Toscana) 주 피렌체 가까운 이탈리아 북부 에밀리아로마냐(Emilia-Romagna) 주 페라라(Ferrara)에서 부친 니콜로(Niccolo)와 모친 엘레나(Elena) 사이에서 태어난 일곱 자녀 중 셋째다. 사보나롤라는 마흔다섯의 짧은 나이에 모진 죽임을 당할 때까지 당대 교회의 악사회의 악에 저항하는 몸부림으로 살았다. 그리고 1498년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서 한 줌의 재가 되었다. 그의 생애는 비록 짧았지만 역사는 그를 오래토록 기억하고 있다. 기독교 설교가’, ‘개혁자’, ‘순교자’, 부패한 종교 지도자와 전제군주 통치에 맞서 저항한 투사’, 역사는 그에게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영예로운 이름들을 달아주었다. 그러나 정치선동가라는 일부의 곱지 않은 비판도 있다. 사보나롤라는 어릴 때 신앙심이 돈독한 의사인 할아버지 미켈레(Michele)에게 중세적 개념의 죄관(罪觀), 즉 물질에 대한 속물(俗物) 개념을 주입받았다. 또래아이들보다 조숙했던 사보나롤라는 이른 나이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와 아리토텔레스의 주석을 탐독하는데 열정을 쏟았으며, 때로는 페라라의 포 강(Po River) 언덕을 혼자 걸으면서 명상에 잠기곤 했다. 그가 태어난 페라라는 당시 인구 10만 명의 큰 도시였고, 명문가의 사생아 보르소 에스테(Borso d'Este, 1413-1471) 공작이 주관하는 영역이었다. 나이 19세 때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에서 페라라에 추방된 한 귀족의 딸인 이웃 처녀를 연모했다. 그러나 여성은 사보나롤라의 출신 가문이 낮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인 줄 알면서도 사보나롤라는 두 햇동안 공들였으나 끝내 상처만 남겼다. 첫 사랑의 충격파는 깊은 상처가 되어 사보나롤라의 젊은 날을 고독하게 했고, 세상에 대한 혐오감과 자기 모멸감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자기 정체에서 벗어나 매일 기도로 상처를 승화시켰으며, 그 즈음 토마스 아퀴나스의신학대전(1485)을 통해 큰 감동을 받게 되었다. 그 시기에 사보나롤라는 주님! 나에게 내 영혼이 걸을 길을 가르쳐주소서.’ (Lord teach me the way my soul should walk)라는 기도를 반복했다. 마침 사보나롤라가 자신의 고뇌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다가, 1447년 볼로냐에서 50킬로미터 떨어진 파엔차(Faenza) 여행길에서 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의 회개에 대한 강력한 설교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고, 그 때 사보나롤라는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 후 어느 날 비밀리에 훌쩍 집을 떠났다. 그의 발길이 멈춘 곳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도시 볼로냐의 도미니코 수도원, 1475414,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그는 6년 동안 수도원에서 자신의 내공을 쌓았다. 볼로냐의 도미니코 수도원 역사는 전통과 역사를 자랑했다. 1215년 스페인에서 시작된 도미니코 수도회가 스페인 국경을 넘어서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오는 데는 불과 3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중세 때 도미니코 수도회는 주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지역 확대 기반을 조성했으며, 이탈리아반도의 볼로냐에 도미니코 수도회가 터를 닦은 것은 1218, 사보나롤라가 볼로냐 수도원 문을 두드리기 전 250여 년이다. 도미니코 수도회는 초대교회 사도들의 삶을 모델로 삼아 설교로 말씀을 전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며, 특히 중세의 보편적 사상인 스콜라철학의 대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전수하여 중세의 신학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일찍이 철학에 관심이 많았던 사보나롤라의 선택은 다소 의외였다. 사보나롤라는 부모에게 상의 없이 선택한 길이 마음에 걸렸던지 부친 니콜로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는 북받친 울분을 토하듯 세상의 사악함을 참을 수 없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했다. ‘저는 덕이 도처에서 경멸되고 악이 추앙되며 경외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편지는 단순히 수도사의 길을 선택한 이유를 넘어서 사악한 세상이 뒤집혀야 한다는, 그의 개혁적 이상이 암시된 듯하다. 수도원에서 사보나롤라는 엄격한 금욕적 수도 생활을 하면서, 스콜라학파의 거두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에 정통한 신학체계를 확립했다. 한편 사보나롤라는 인본주의적 르네상스 현상을 일종의 타락으로 보았다. 사보나롤라가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한 메디치 가에 고용되어 부자의 입맛대로 그림을 그린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i, 1445-1510), 그의비너스의 탄생(1486)이 여성 나체 그림으로 세상에 선보였다. 로마 신화의 사랑과 미의 여신을 상징하는 이 그림이 논란이 된 것은 인간의 육체를 저주로 본 중세 관점에서 하나님의 축복받은 아름다움의 육체로 본 르네상스의 미적 발상 전환이라는 점에서다. 미켈란젤로의다비드상 역시 예외가 아니다. 신권 중심의 사보나롤라에게 미를 가장한 인본주의 색체는 용납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1478년 페라라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안젤라 수녀원에서 보조 성경교사를 경험하고, 1482년에는 일시적으로 피렌체의 산마르코 수도원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그 때까지 사보나롤라는 좋은 평판을 얻지 못했다. 1485-1489년 사이의 사보롤라는 피렌체 이외 다른 도시에서도 설교했다. 1486년에는 이탈리아 북부 룸바디아 주 브레시아(Bresca)에서 요한계시록을 강해하면서, 그 자신이 처한 시대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종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그로부터 사보나롤라는 영혼구원을 위한 열정에 사로잡히면서 악과의 선한 싸움과 경건한 삶을 위한 목표를 위해 자신을 던졌다. 그 투쟁의 장소가 바로 피렌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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