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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노니아, 하나님-자신-이웃-피조세계의 관계회복 위해 죄고백 필수이규민 교수, 루이스 쉐릴(Lewis Sherrill)의 코이노니아와 우리들교회의 큐티목회 철학("THINK")에 관한 분석적 고찰

한국대학기독총장포럼(회장 정상운 교수), 큐티선교회(QTM: Quiet Time Movement), 우리들교회가 주최한 김양재 목사의 큐티목회 철학(THINK)에 대한 신학적 고찰, 제1회 THINK Forum ‘공동체와 고백’이 10월 17일 오후 2시 우리들교회 판교채플에서 개최됐다.

▲제1회 THINK Forum ‘공동체와 고백’이 10월 17일 오후 2시 우리들교회 판교채플에서 개최됐다. 사진은 왼쪽부터 정일웅 교수(전 총신대 총장), 이규민 교수(장신대 석좌), 김양재 목사(우리들교회 담임), 김대진 박사(코람데오닷컴 편집장). 정상운 교수의 사회로 정일웅 교수, 이규민 교수가 발제를 맡고, 김대진 박사가 목회적 적용을 제언했다.

포럼의 발제자로 나선 이규민 교수는 ‘루이스 쉐릴(Lewis Sherrill)의 코이노니아와 우리들교회의 큐티목회 철학(THINK)에 관한 분석적 고찰’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다. 이 교수는  “쉐릴은 기독교교육 이론 및 실천을 위해 무엇보다 하나님-인간-피조세계와의 ‘관계’를 중시했던 기독교교육학자”라며, “쉐릴의 신앙공동체는 구속적 친교의 장(코이노니아,1955:163)을 형성하며, 여기서 말하는 코이노니아의 개념이 우리들교회의 목장과 일맥상통한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하나님-자신-이웃-피조세계의 관계회복을 위해 죄고백(Telling one's own sin before God and God’s people)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일방적 의사소통은 상대방의 자유와 특성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 의도 계획을 주입, 관철시키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상대방 인격의 통전성과 자유가 위협되고 통제되고 억합된다. 결국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기에 진정한 변화와 치유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일갈했다. 이 교수는 쉐릴이 강조하는 코이노니아의 양방향 의사소통의 핵심에 '죄고백'이 있다며, “하나님의 현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공동체는 무엇보다 사죄와 용서가 우선되어야 한다. 빛, 진리, 거룩이신 하나님은 죄와 함께 할 수 없는 분이기에 죄고백-회개-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대속의 은총을 덧입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제1회 THINK 포럼에서 발표하는 이규민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

이어 코이노니아를 ▲관계의 주도성, ▲관계의 특성, ▲의사소통의 특성으로 설명하며, 코이노니아와 기독교교육의 상관성과 연결시켜 설명했다. 하지만 “쉐릴은 인간 자아와 공동체의 원형으로서의 하나님의 내적 관계성을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그의 하나님 이해, 하나님의 내적 삶을 ‘성부, 성자, 성령의 상호순환’, 즉 페리코레시스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었다면 신학적, 성경적 원형의 토대 위에 정립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비평하기도 했다.

또한, “우리들 교회의 핵심 컨텐츠라 할 수 있는 큐니나눔(말씀묵상) QTM은 우리들교회 탄생 모체요, 뿌리”라며, “QTM의 목회철학인 5가지 핵심 THINK는 종교개혁 신앙의 5가지 중심축인 ‘5 Sola’와 일치시켜 ▲Telling: 공동체 앞에서의 죄고백=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 ▲Hoifying: 삶의 목적으로서의 ‘거룩’=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Interpreting: 말씀묵상(Q.T)=오직 말씀으로만(Sola Scriptura), ▲Nursing: 지체 ‘돌봄’=오직 그리스도만(Solus Christus), ▲Keeping: ‘적용’(가정과 이웃 살리기)=오직 하나님의 영광(Sola Gratia)을 위해로 설명했다. 이 교수는 THINK 목회철학은 기독교신앙의 핵심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 확장과 하나님 영광의 실현을 위한 5가지 기둥(Five Pillars)”이라고 평했다.

다음은 이규민 교수의 발표 논문 전문이다. 

루이스 쉐릴(Lewis Sherrill)의 코이노니아와

우리들교회의 큐티목회 철학("THINK")에 관한 분석적 고찰

이규민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

 

들어가는 말

130년의 선교역사를 지나오면서 한국교회는 교인, 목회자, 재정, 본당, 교육 외 제반 시설 등 모든 면에서 그 규모와 크기가 놀랄 만큼 커지고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믿음의 선진들의 노력과 희생, 지도자들의 모범적 봉사,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한국은 미국에 이어 전 세계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하는 선교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2018년 현재 한국교회는 총체적 위기에 봉착해 있다. 기독교인의 수가 급격하게 감소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영적, 정신적 역동성이 급속하게 약화되고 있다.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잃어 가고 있으며, 교회에 대한 부정적이고 배타적 여론이 늘어가고 있다. 사회 전반에서는 탈종교화와 무신론이 확산되고 있으며 다양한 형태의 이단과 사이비 종교들이 발호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래학자 최윤식 박사는 한국교회가 이제 분명한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현재의 목회패러다임으로는 2050년이 되면 전체 교인수가 300~400만으로 줄고 교회학교는 30~40만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진단한다(최윤식, 39). 2017년 현재 한국의 교인수가 총 967만 6000명(19.7%)인 것을 감안할 때, 이 추세로 가다보면 30년 후에는 현재의 40% 이하로 교세가 위축된다는 전망인 것이다.

한국사회는 소위 서구유럽의 제1세계가 수백 년에 걸쳐 경험한 변화를 한 세기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거치게 됨으로써 사상과 가치관의 상당한 혼란과 갈등 속에서 사회불안이 가중되고 있다. 세대간, 계층간, 남녀간, 지역간의 현실인식이 너무나 다른 데서 오는 대립과 반목도 과거 어느 때보다 심각한 상황이다. 그 결과 가족, 친구, 교회 등의 기초공동체 속에서도 과거와 같은 소속감, 친밀감, 유대감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진행될수록 더욱 더 공동체에 대한 갈망도 높아져가고 있다. 기성교회가 공동체의 소속감, 친밀감, 유대감에 대한 필요를 채워주지 못할 때, 다양한 형태의 이단과 사이비 종파들이 발호할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와 사회가 겪고 있는 이러한 문제와 위기를 바라보며, 본 연구자는 바람직한 기독교 신앙공동체 형성과 사역을 위한 이론적 접근과 함께 실제 사례를 제시하고 성찰하고자 한다. 특히 본고에서 언급하는 “바람직한 신앙공동체”라는 용어는 성경에 기초하고 건강한 개혁전통에 입각하여 참된 공동체 정신을 구현해나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회를 지칭한다. 본 연구자의 연구 분야가 기독교 교육신학 및 심리학이기에 교육신학적이고 심리학적 관점에서 “바람직한 신앙공동체”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

본 연구의 이론적 작업을 위해 “신앙공동체와 교육목회”를 중점 연구한 권위 있고 정평한 학자인 루이스 쉐릴(Lewis Sherrill, 1892-1957)의 연구를 기반으로 할 것이다. 쉐릴은 3대째 장로교 목사 및 지도자의 집안에서 자라났으며 교회 담임목사, 기독교교육학교수, 미국 장로교총회 커리큘럼 위원장, 루이빌신학대학원 학장으로서 관계성에 기초한 “만남의 기독교교육”을 주창한 탁월한 학자이다. 쉐릴은 바람직한 신앙공동체(Koinonia)는 그 공동체 자체가 이미 치유, 회복, 교육의 기능을 훌륭히 수행한다는 것을 학문적으로 밝힘으로써 그 타당성과 설득력을 학계에서 인정받았다. 쉐릴이 주창한 이론의 핵심을 “코이노니아를 통한 기독교교육”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대안이 이 코이노니아적 생명력의 회복에 있다고 판단하기에, “바람직한 신앙공동체”를 위한 이론적 접근을 쉐릴의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중심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본 연구자는 큐티선교회(QTM, Quiet Time Movement) 주최 제1회 “THINK FORUM”의 주제강연을 요청받게 되어, “THINK”의 목회철학과 이를 토대로 한 우리들교회의 목회비전, 구조, 방향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이 연구를 수행하면서 놀라운 발견을 할 수 있었다. 여러 각도와 관점에서 자료들을 검토하면 할수록, 쉐릴의 코이노니아론과 QTM의 목회철학 사이에는 부인할 수 없는 공통점과 상응성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코이노니아 중심의 기독교교육과 심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코이노니아 교육론”의 신학적, 교육적 정당성뿐만 아니라, “QTM”의 구체적 사역을 통해 코이노니아 교육론의 실천적, 목회적 타당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기회가 되리라 기대한다. 이는 한국교회의 위기 극복을 위한 새 패러다임을 발견하는 의미 있는 시도가 될 것이다.

이제 신앙공동체 형성을 위한 성경적, 신학적 토대로서,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관계론적 이해에 대해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I.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관계론적 이해

하나님과 인간, 피조세계에 대한 관계적 이해는 교육목회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의 삶을 우연의 산물이나 진화의 산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따라 지어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것은 교육 이론 및 실천의 전(全) 과정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게 마련이다. 하나님에 대한 관계적 이해는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의 수많은 발견과 공헌들을 통해 볼 때 인간 개인과 집합적 삶의 궁극적 방향을 제시한다. 또한 개인 및 공동체의 삶을 통해 우리가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떤 방향을 향해 성장해나가야 할 것인가에 관한 통찰을 제시해준다. 존재의 궁극적 근거인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크리스천 개인은 물론 크리스천 공동체와 교육목회마저도 세속사회의 사회화(socialization)의 힘에 휩쓸려버리고 만다. 세속 사회는 기독교 신앙이 실천되어야 할 선교의 장임에 틀림없다. 그런 면에서 크리스천 개인과 공동체가 세속 사회 속에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세상 속에서 책임 있는 삶을 사는 사회인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비전을 가지고 이 세상을 변화시켜나가야 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이다.(Boys, 1989) 우리는 세상 속에(in the world) 살지만 세상의 존재가 아님을(not of the world) 성경은 증언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교회는 단순히 세상에 동화(conform)되기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transform)시켜 나가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교공동체, 치유공동체, 교육공동체이다. 개인과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분리되지 않고 상호 돌봄과 양육(비옥화)를 통해, 개인은 그 잠재력과 가능성을 실현해나가고 공동체는 더욱 성숙하고 풍요로워지는 것이 기독교공동체, 신앙공동체의 특성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숙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개인의 죄와 집합적 죄는 끊임없이 개인과 공동체를 왜곡하고 위협하기 때문이다. 개인과 집합의 죄의 구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해 형성된 온전한 관계성이 개인과 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왜곡되고 일탈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만든다. 죄로 인해 파괴된 관계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은 인류 역사를 통해 개인 및 모든 피조물의 희망이요 복음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인간, 피조세계 모두가 철저히 관계성 속에 놓여 있기에 관계론적 접근은 교육목회 이론 및 실천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기독교교육 이론과 실천은 하나님과 인간뿐만 아니라 피조세계에 대한 관계론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 홀 역시 이러한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관계론적 이해는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동료 인간은 물론 피조세계 전체에 대해 책임 있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촉구한다.”(Hall, 106)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세계에 대해 주도적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특권과 동시에 책임을 부여받았다. 인간은 그 능력과 힘을 가지고 피조세계를 파멸과 파국으로 몰고 갈 수도 있고 하나님의 주권, 그리스도의 주되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다. 하나님, 인간, 피조세계에 대한 관계론적 이해를 통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드라마에 동참하는 구속적 동반자로서 크리스천 개인 및 공동체는 부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장에서 기독교교육은 인간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근원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 삶의 궁극적 의미와 목적은 그 원형이신 하나님을 떠나 설명될 수 없듯이, 인간 공동체의 궁극적 의미와 목적 역시 그 원형 되신 하나님 공동체를 떠나 설명될 수 없다. 이처럼 하나님 형상, 인간, 공동체는 상호 불가분의 유기적 관련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I.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과 기독교교육의 상관성

인간에게 나타난 하나님 형상은 창세기의 아담보다는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두 번째 아담을 통해 보다 분명히 나타난다.(골 1:6, Barth, 1980: 207-210, 258-259) 그리스도 예수의 독특성은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뿐만 아니라 동료 인간들과의 하나 됨에 있다는 것이다.

거트리(Shirley Guthrie)는 또한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곧 관계 속에 있는 인간, 공동체 속의 인간, 만남 가운데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다.”(Guthrie, 192)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와 같은 성경의 증언은 아담과 하와가 철저히 관계적 존재로 지음 받았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창 1:27)라는 구절은 하나님 삼위의 개별성과 동시에 일체성이 함께 유지되듯, 아담과 하와 역시 개별성과 동시에 일체성이 유지되는 관계적 존재로 지음 받았음을 의미한다.

밀리오리(Daniel Migliori)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아버지, 아들, 성령 간의 상호적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한 상호적 사랑은 상대방의 독특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기뻐하는 것을 의미한다.”(Migliore, 74) 밀리오리는 계속해서 주장한다. “삼위일체에 있어 삼위의 위격과 공동체성이 상호 연결되어 있다면 그것은 곧 공동체 속에서 누리는 개인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자유 속에서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Migliore, 74)

바르트는 이러한 자유를 “고립된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의 연합 속에서 누리는 자유”라고 서술한다.(Barth, 1960: 71) 이러한 “삼위일체적”, “관계적” 자유는 곧 “만남과 연합”의 자유를 의미한다.(Barth, 1960: 72) “하나님의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이기보다는 무엇을 향한, 무엇을 위한 자유이다. ...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자유하신다. 인간과 더불어 자유로이 공존하신다. 인간의 역사 속에 자유로이 참여하신다.”(Barth, 1960: 72) 또한 밀리오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움직여 나아간다”고 주장한다.(Migliore, 76)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삶이 이루어지며 나아가서 공동체의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실제 일상 속에서 바람직한 공동체 속에서의 만남이 얼마나 가능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삶 속에는 허무, 불신, 무질서, 죽음 등의 부정적인 힘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실존적 허무를 피할 수 없다. 만남이 없으면 외롭고 쓸쓸하지만 만남이 있으면 또한 갈등이 생겨난다. 이것은 인간의 삶이 처해 있는 실존적 상황이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각자 속에 들어있는 부정성으로 인해 서로 고통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이러한 인간 삶의 부정성을 로더(James Loder)는 “허무”(the Void)라고 부른다. 이 허무는 하나님의 “거룩”(the Holy)의 충만성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음을 로더는 확신한다.(Loder, 1989: 80-84) 하나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의 영은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궁극적 대안을 향해 나아간다. 콜버그나 파울러 같은 발달론자들은 인간의 도덕적 발달과 신앙발달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통찰과 지혜를 제공한다. 하지만 콜버그와 파울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인간의 삶은 발달과 성숙뿐만 아니라 문제와 죄성도 함께 가중되어 간다는 점이다(Loder, 1998: 191-194, 255-259). 즉, 인간 실존이 피할 수 없는 허무, 불신, 무질서, 죽음의 부정성도 인간의 성장과 함께 가중되어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자기 존재를 기뻐해주고 인정해주는 ‘엄마의 얼굴’을 통해 기쁨을 누리고 안전감과 행복감을 느끼지만 그러한 ‘엄마의 얼굴’이 언제나 항상 평생을 통해 존재할 수 없음을 경험하고 그러한 얼굴을 부인하거나 필요없는 것처럼 일종의 “반동형성”을 하게 되는 것과 같다.(Loder, 1992: 314-318) 인간의 실존적 공허는 이러한 ‘얼굴’의 상실과 부재에서 오는 것이다. 이러한 얼굴은 어느 누구가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유한하고 가변적이기에 그러한 얼굴을 대신해줄 수 없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얼굴, 인간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용서와 희망을 주는 얼굴이 있다. 그는 곧 세상에 하나님의 얼굴로 오신 그리스도인 것이다.(Loder, 1992: 319-321) 그리스도는 인간 개인과 공동체가 피해갈 수 없는 죽음 속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셨다.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인간 개인과 공동체가 경험할 수밖에 없는 허무, 불신, 무질서, 죽음은 결코 마지막 말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는 인생의 언어일 뿐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인생은 충만, 신뢰, 질서, 생명을 향한 새로운 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마치 엠마오의 두 제자와 같은 사람들이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만난 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부활의 증인이 된 것처럼, 크리스천들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치유공동체, 사랑공동체, 생명공동체를 형성한다.(Loder, 1989: 97-112) 이들 모임의 주체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런 모임을 가능케 하셨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신앙공동체는 사회에 동화되기보다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하나님의 영에 동참하는 신앙공동체는 세상을 향한 대안공동체를 형성한다. 삼위일체 하나님 형상은 신앙 공동체 속에 평등성과 상호성, 친교와 참여가 점점 더 확장되어가야 할 것을 제시한다. 상호간의 필요와 어려움에 대해 보다 더 민감한 돌봄이 요청된다. 거트리와 밀리오리의 주장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철저히 관계 속에서 삶이 이루어지며 만남을 통해 자아가 형성, 변형, 재형성 되어가기 때문이다.

만남과 관계를 통한 자아의 형성, 변형, 재형성의 역동을 중요시하고 신앙공동체, 치유공동체, 사랑공동체의 중요성을 제시한 대표적 학자로서 루이스 쉐릴(Lewis Sherrill)을 꼽을 수 있다. 쉐릴에 의해 묘사된 신앙공동체의 구성과 역동성은 어떠한지 그리고 이러한 신앙공동체의 실천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해 분석한 후, 쉐릴이 기독교교육의 장으로서의 한국교회에 어떤 대안을 제공할 수 있는가 살펴보도록 하자.

 

III. 루이스 쉐릴(Lewis Sherrill)의 신앙공동체 개념

 

A. 쉐릴의 관계 및 공동체 개념 연구의 중요성

쉐릴은 기독교교육 이론 및 실천을 위해 무엇보다 ‘관계’를 중시했던 기독교교육학자이다. 쉐릴하면 흔히 ‘만남’의 기독교교육학자로 불리지만, 실은 ‘만남’ 이전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신-인적 관계, 인간 자신의 내적 관계, 인간 상호 간의 대인적 관계, 인간과 피조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 변형, 재형성, 치유가 일어나는 철저히 ‘관계’ 중심의 교육이론을 펼쳤던 학자이다.(Fairchild, 1958: 406-407)

그는 기독교교육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기독교교육은 하나님, 교회, 다른 사람들, 세계,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참여할 뿐 아니라, 그러한 관계를 통해 일어나는 긍정적 변화를 위한 신앙공동체의 교육적 노력이다.”(Sherrill, 1955: 82)

 

이러한 복합적 관계의 교육적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쉐릴은 그의 학문적 노력 전체를 통해 기독교교육의 주요 장으로서의 교회를 철저히 신앙공동체, 사랑공동체, 소통공동체, 회복공동체로 이해하였다.(Sherrrill, 1932: 18-23; 1955: chap. 3-7; Sherrill & Purcell, chap. 1-4)

쉐릴은 또한 ‘계시’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교육학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계시’가 일어나는 곳은 신앙공동체의 관계 속에서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윅스(Louis Weeks)는 “쉐릴은 신앙공동체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한다.(Weeks, 248)

종래의 쉐릴에 대한 연구는 주로 계시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기에 쉐릴의 공동체 개념에 대한 연구는 심도 있게 이루어진 바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면 쉐릴에 대한 연구가로 인정받는 로이 훼어차일드(Roy Fairchild)나 윅스도 쉐릴의 공동체 개념, 즉 코이노니아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를 시도하지 않는다. 단지 필요에 따라 조금씩 설명을 덧붙이는 정도에 그칠 뿐이다.(Fairchild, 405-407; Weeks, 245-247)

쉐릴은 기독교공동체의 독특한 성격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기독교교육은 기독교공동체의 독특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다른 일반 공동체나 세속사회와 구별된 기독교공동체의 특성이 일반 교육과 구별된 기독교교육의 특성을 잘 나타내준다.”(Sherrill, 1955; xi)

 

쉐릴은 계속해서 기독교교육과 관련된 신앙공동체의 특성의 중요성을 이렇게 진술한다:

“지난 세월동안 나는 무엇보다 기독교공동체를 위한 신학적, 철학적 토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기독교공동체는 하나님과 관련된 차원은 물론 인간과 관련된 차원을 중시해야만 한다.”(Fairchild, 1958: 404에서 재인용)

 

물론 쉐릴이 사용하는 ‘기독교공동체’, ‘신앙공동체’는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 학교, 사회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이다. 하지만 쉐릴은 동시에 다른 공동체 중에서도 교회야말로 기독교교육에 가장 중요한 공동체임을 강조한다.(Sherrill, 1955: 80, Sherrill & Purcess, 1937: chap. 2) 부모가 아이에게 미치는 지대한 영향력을 알고 있기에 가정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또한 크리스찬 부모교육과 크리스찬 가정교육을 지속적으로 일관성 있게 시킬 수 있는 곳이 곧 교회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쉐릴은 한 단체가 교육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한 사회단체는 그 자체로서 그 단체에 속한 사람들에게 의도하지 않더라도 일종의 비공식적 교육(informal education)을 시키고 있다. 이러한 교육은 비록 체계적, 조직적인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매우 강력한 교육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 단체가 어떤 일을 수행하거나 또는 수행하지 않음으로써, 상을 주거나 벌을 줌으로써 비공식적인 미묘한 방식으로 그 단체에 속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가치를 전달해준다.”(1955: 79)

여기에서 쉐릴이 말하는 기독교교육에 있어서의 “비공식적 교육”은 아이즈너가 말하는 일반교육에 있어서의 “잠재적 교육과정”(implicit curriculum)과 상통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Eisner, 93)

쉐릴이 이처럼 한 단체의 삶의 방식, 생활유형이 그 구성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함을 지적하면서 기독교공동체, 신앙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때, 그의 신앙공동체에 대한 신학적, 교육학적 입장을 비판적으로 성찰해보는 것은 신앙공동체와 기독교교육 이론 및 실천 사이에 들어있는 유기적 상관성을 이해하는 데 많은 통찰을 제공할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쉐릴의 기독교공동체, 신앙공동체 이해가 신-인(God-human), 인간 내적(intrapersonal), 대인관계적(interpersonal), 인간-환경(human-environment)의 모든 관계를 포괄하는 통전적 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볼 때(Sherrill, 1955: 65f.), 쉐릴의 신앙공동체 개념을 연구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문제점, 특히 관계의 축소 또는 왜곡의 문제에 대한 수정안을 도출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B. 쉐릴의 신앙공동체 이해

쉐릴은 신앙공동체는 “구속적 친교의 장”(the scene of redemptive fellowship)을 형성한다고 하면서 이러한 “구속적 친교의 장”을 가리켜 “코이노니아”(koinonia)라고 부른다.(1955: 163) 여기서 말하는 코이노니아의 개념이 우리들교회의 목장과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다음에서는 코이노니아의 특성을 관계의 주도성, 관계의 특성, 의사소통의 특성의 범주로 나누어 고찰해보도록 하자.

 

1. 코이노니아의 특성

 

a. 관계의 주도성

쉐릴은 신앙공동체가 일반 여타 공동체들과는 다른 독특성을 그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주도성과 권위의 장소에서 찾는다.(Sherrill, 1955: 51, 1949: chap. 1) 신앙공동체는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이기에 그 주도권과 권위가 공동체의 주체인 그리스도에게 있으며 그리스도를 따라 본받는 삶을 사는 공동체임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크리스천 개인 및 공동체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가치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랑이라 할 수 있다.(1944: 104, Sherrill & Purcell, 99) 인간은 본질적 한계를 지니고 있기에 그리스도와 같은 자기희생적 사랑을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행할 수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공동체는 이러한 구속적 사랑을 실현해나갈 수 있다.(Sherrill, 1955: 49) 쉐릴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역동화된 공동체를 가리켜 “코이노니아”라고 부른다.(Sherrill, 1955: 50)

“코이노니아는 하나님이 그 관계와 공동체 속에 함께 임재하며 참여함을 통해 일반 공동체와 구별된다. 즉, 하나님의 영은 공동체 구성원 각 자에게 그리고 그 구성원 사이에, 관계성 속에서 역사하신다.”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성의 개념은 코이노니아는 물론 쉐릴의 계시와 신앙의 개념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서의 만남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대면이 인간의 응답과 만남에 대해 일종의 “논리적 선재성”, “한계적 조율성”, “개념적 우선성”(conceptual priority)을 갖는다.(Polanyi, 89; Torrance, 135-136; Loder, 1992: 253) 코이노니아의 주체는 하나님이기에 특정 개인이나 그룹이 신앙공동체의 절대적 주도권을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없고 소유해서도 안 된다.(Sherrill, 1945: 196f.)

 

b. 코이노니아의 특성

쉐릴에 의하면 코이노니아 구성원의 특성은 곧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코이노니아의] 참된 교제는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함께 함으로써 나이와 계층을 불문하고 단지 믿음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행위에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으로 대하고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Sherrill, 1932: 25-26)

 

쉐릴은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교리에 의해 지탱되기 보다는 그러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의 말, 행동, 습관, 태도를 통해 그 신앙의 특성과 가치가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신앙은 인지적, 정서적, 행동적 차원을 함께 포함한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공동체는 일종의 ‘행동하는 신앙’, ‘실천하는 사랑’의 특성을 그 속에 지니게 된다.(Sherrill, 1944: 31; 1939: 117) 이러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모습을 본받게 되는데 이러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 창조의 목적과 섭리가 회복되고 실현되어 간다. 이것은 곧 인간 개인 및 공동체 속에 창조적 변화를 일으킨다.

“기독교 신앙은 초월하신 하나님이 인간과 단지 함께 거하신다는 것을 넘어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을 통해 인간에게 찾아오신다. 그러한 하나님의 영에 자신을 열어놓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그의 삶 깊은 곳에 들어가 그 사람의 깊은 내면을 청소하고 새롭게 변화시키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한 변화는 피상적 변화가 아닌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다.”(Sherrill, 1945: 213)

하나님의 영이 개인과 공동체에 임하게 될 때, 그 개인과 공동체는 변화를 향해 열리게 된다: “하나님의 영은 자유로서 임한다. 인간 종교제도가 가진 부정성을 극복하고 해방시켜 그리스도에 의해 자유케 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Sherrill, 1949: 99)

기독교신앙은 역동적이며 변화를 수반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사랑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가페적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모여 신앙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또한 사랑할 수 있도록 역동화된다.”(Sherrill, 1945: 199)

이러한 사랑은 “자기중심적 사랑”에서 벗어나 “자기희생적 사랑”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역동화 시켜준다. 자기중심적 사랑은 다른 사람의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자기 확장, 자기 성취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자기중심적 사랑은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 조종하려 한다.(Sherrill, 1945: 98) 반면, 자기희생적 사랑은 다른 사람이 희생되지 않도록 배려하며 돌봄을 제공한다. 희생적 사랑은 다른 사람의 성숙과 성장을 위해 자신을 개방한다. 이러한 자기희생적 사랑은 “악의적 관계의 족쇄를 깨뜨리고 새로운 변화를 가능케 한다. 이러한 변화는 외적, 강제적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한, 사랑을 통한 내적인 혁명을 통해 일어난다.”(Sherrill, 1945: 228)

 

c. 코이노니아의 의사소통

인간은 근본적으로 관계적 존재이다. 인간은 출생, 양육, 성장, 교육, 공헌, 은퇴, 죽음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관계 속에서 관계를 통해 그 모든 삶, 행동, 내면, 인격, 태도가 형성, 재형성된다. 이처럼 관계는 인간의 삶과 떼어 놓을 수 없을 만큼 유기적이고, 본래적인 것이기에 “인간은 곧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Sherrill, 1955: 45)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관계가 다 건강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건강하지 않은 관계, 병적인 관계, 파괴적인 관계가 만연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 기독교 기관 속에도 이러한 역기능적 관계가 허다함을 쉐릴은 지적하고 있다.(Sherrill, 1955: 22-24)

쉐릴은 순기능적 관계와 역기능적 관계를 결정짓는 것은 곧 그 관계 속에서의 의사소통 방식과 의사소통의 질이라고 명시한다:

“코이노니아가 명사라면 의사소통은 동사라 할 수 있다. 신앙공동체가 움직이고 일하려면 반드시 의사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신앙공동체 속의 의사소통은 대단히 중요한 주제일 수밖에 없다.”(Sherrill, 1954: 2-3)

쉐릴은 다양한 의사소통 방식들을 일방적 의사소통과 양방향적 의사소통의 두 범주로 분류한다. 공동체 내의 의사소통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질 때, 그러한 의사소통은 억압적, 강압적, 파괴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한편, 의사소통이 양방향적으로 원활하게 이루어질 때, 그것은 생산적, 해방적, 창조적인 것이 된다.(Sherrill, 1954: 1-3)

여기에서 일방적 의사소통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상대방의 자유와 특성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 의도, 계획을 주입, 관철시키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상대방 인격의 통전성과 자유가 위협되고 통제되고 억압된다. 결국,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기에 진정한 변화와 치유를 기대하기 어렵다.(Sherrill, 1955: 120)

한편, 양방향적 의사소통은 어떤 것일까? 양방향적 의사소통은 모든 참가자들을 의사소통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주체”로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다.(Sherrill, 1955: 120) 상호존중과 상호수용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열린 대화를 통해 자신의 불안, 두려움, 소외, 단절, 아픔, 상처들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다. 이러한 대화와 소통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적 삶과 실천을 통해 자기 정체성, 자기 이해, 자기 수용이 가능해지고 또한 공동체 구성원 상호 간의 성장, 치유, 성숙이 이루어진다. 양방향적 의사소통을 통해 하나님과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표출할 뿐 아니라 또한 불신과 회의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신앙공동체 속에서 이러한 것들이 억압되거나 금지될 때, 오히려 더 깊은 회의와 불신이 자리 잡게 된다.(Sherrill, 1955: 122) 신앙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내면과 마음을 다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도록 장려될 때, 진정한 자아를 찾게 되고 만나게 된다. 이러한 진실성 위에 새로운 변화가 하나의 가능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신앙공동체의 양방향적 의사소통을 통해 인간의 상호작용은 하나의 영적 매개(spiritual medium)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이러한 의사소통, 이러한 영적 매개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게 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게 된다.”(Sherrill, 1954: 1)

쉐릴은 참된 신앙공동체, 코이노니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은 바로 이러한 양방향적인 특성을 지닌 것임을 역설한다.

 

2. 코이노니아와 기독교교육의 상관성

지금까지 코이노니아의 특성을 살펴본 것을 토대로 코이노니아와 기독교교육의 상관성에 관해 고찰해보기로 하자. 코이노니아는 무엇보다 우선 구속공동체이다. 쉐릴은 “기독교공동체는 무엇보다 하나의 구속 사역을 위한 장을 형성한다”고 주장한다.(Sherrill, 1955: xi) 그렇다면 쉐릴에게 있어 구속사역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관계적 관점에서 볼 때, 구속사역은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의미한다. 신-인, 인간의 자기 내적 관계, 대인관계, 피조세계와의 관계가 회복되고 치유되는 것을 의미한다.(Sherrill, 1945: 228)

쉐릴은 성경, 교리, 공과, 도덕, 규범 등 교육내용을 단순한 지식, 정보로만 전달하는 것은 교육목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기독교교육의 목적은 “사랑과 심판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과 대면을 통해 관계의 회복과 긍정적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역설한다.(Fairchild, 405) 쉐릴은 단순한 지식 전달교육과 도덕주의적 훈화를 비판한다. 또한 교리주입이나 암기위주의 교육의 폐해 역시 잘 지적하고 있다.(Sherrill, 1955: 181-184)

쉐릴에게 있어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개인과 공동체로 하여금 기독교적 가치에로의 심오한 질적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교육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신앙공동체, 코이노니아는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장인 동시에 변화를 촉발시키는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Sherrill, 1955: 91) 전술한대로 관계성에는 생산적 관계성도 있지만 파괴적 관계성도 있다. 파괴적 관계는 일방적 의사소통과 억압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권위주의적, 폐쇄적, 배타적 집단 속에서 이루어진다. 한편, 모든 관계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의 영에 기초해서 이루어지는 관계, 즉 코이노니아 속에서의 관계는 자유와 사랑에 기초한 양방향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관계이다. 이처럼 코이노니아는 생산적, 창조적, 치유적 변화가 이루어지는 장이요 매개체인 것이다.(Sherrill, 1955: 80)

 

IV. 쉐릴의 코이노니아 개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

쉐릴의 코이노니아 개념은 그 속에 4차원의 관계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곧 신-인, 인간의 내적 관계성, 대인관계성 그리고 인간과 피조세계의 관계성이다.(1945: chap. 1-3) 쉐릴은 코이노니아 개념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는 상호성과 양극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 쉐릴은 신앙공동체, 즉 코이노니아에 기초한 기독교교육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러한 교육은 하나님 중심의 교육도 아니고 인간 중심의 교육도 아니다. 이러한 교육은 양극을 포괄하는 교육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 속에 들어 있는 양극적 긴장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응답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응답을 함께 포함하는 교육인 것이다.”(Sherrill, 1955: 90)

쉐릴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 있어서 하나님의 신성과 인간의 인성의 통전성을 상실하지 않고 있다. 쉐릴의 양극적 긴장의 통합은 그의 교육의 원리 중 하나인 “상응의 원리”(principle of correspondence)를 통해 잘 나타난다. 쉐릴의 “상응의 원리”는 틸리히의 “상관관계의 원리”(principle of correlation)보다 더 확장되었을 뿐 아니라 의사소통에 있어서도 양방향성을 향해 자유롭게 개방되어 있다:

“그러한 기초 위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응의 원리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이 생겨난다. 이것은 쉬운 말로 “부름”(call)과 “응답”(answer)이라고 할 수 있는 상호성을 의미한다. 부름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고 인간에게서 시작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응답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올 수도 있고 인간으로부터 올 수도 있는 것이다.”(Sherrill, 1955: 105)

틸리히(Paul Tillich)는 인간의 실존에서 제기된 물음이 기독교 전통 속에서 답을 발견하는 다소 일방적이고 단선적인 신학방법론을 채용한 반면, 쉐릴은 훨씬 더 역동적이고 양방향을 향해 열려있는 개방적인 교육방법론을 활용하고 있다.(Sherrill, 1955: 112f.) 실제, 쉐릴 자신이 이것을 스스로 증언하고 있다: “상응의 원리는 틸리히 교수가 인정할 수 없을 만큼 인격적 상호성을 열어놓고 있다”(1955: 198)

쉐릴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호성, 양방향성, 개방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를 잊지 않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개별성과 상호성, 독자성과 연관성을 함께 유지하는 것이 쉐릴의 교육이론의 기초를 형성한다.(Sherrill, 1955: 21f.) 쉐릴의 이러한 하나님 이해, 인간 이해에 기초한 교육이론은 개인주의, 권위주의, 교단주의의 경직성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코이노니아의 대인관계적 차원을 설명하면서 쉐릴은 인간은 대인관계에 있어 개별성과 상호성, 독자성과 연관성을 함께 유지할 수 있을 때 가장 성숙한 자아와 성숙한 관계성을 지닐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아의 개별성을 위해 상호성을 희생하든지, 상호성을 위해 개별성을 희생할 때, 인간은 깊은 불안 속에 빠져들게 된다.”(Sherrill, 1955: 17) 이러한 개별성과 상호성, 독자성과 연관성의 창조적 긴장을 최선의 상태에서 유지하는 것이 곧 코이노니아를 이룬 상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심오한 차원의 의사소통 속에서 [즉, 코이노니아 속에서] 상호 간의 관계성은 곧 상호의 자아를 관통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Sherrill, 1955: 86)

쉐릴은 후에 로버트 키건(Robert Kegan)이 자아의 성숙의 가장 높은 단계로 규정한 “상호주관성 단계”(interindividual or intersubjective stage)를 코이노니아의 정점의 단계로 이미 서술해놓고 있다.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공동체 구성원들은 상호의 개성과 특성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상호의존과 상호관통이 가능한 보다 큰 차원의 틀을 창출하게 된다.(Kegan, 1982: 103-106)

키건의 상호주관성의 단계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생겨난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심리학적 용어로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내적 삶은 삼위, 곧 성부, 성자, 성령의 특성을 상실하거나 용해됨 없이 관계적 유기체, 통일체로 본질적으로 하나로 연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순환적 관계(perichoretic relationship), 상호참여적 관계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생겨난 영적 공동체의 관계성의 종말론적 완성(eschatological consummation)에 대한 예표가 된다.

키건의 『성숙하는 자아』(The Evolving Self)를 보면 4단계인 “제도적 자아”(institutioanl self)까지는 설명과 예를 명확히 하고 있지만 마지막 완성의 단계인 상호주관적 자아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명과 구체적 예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1982: 103-106) 그것은 상호주관적 단계는 이미 하나님의 내적 삶, 즉 신적 공동체 차원과 연결된다는 일종의 반증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심리학적 용어만으로는 관계의 최정점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한편, 키건에 비해 기독교교육학자 쉐릴은 그의 상호주관적 단계를 설명하면서 “하나님 형상”이라는 신학용어를 사용하는 유리한 위치에 있음을 볼 수 있다.

“기독교적 용어 중에 인간의 자아를 설명해주는 개념이 있다. 인간의 자아는 개별성과 상호성을 함께 필요로 하며 이러한 개별성과 상호성의 모든 가능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맥락 위에 가능하다. 이것은 곧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았다는 개념을 말한다.”(Sherrill, 1955: 23)

인간 자아의 상호주관성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언급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그의 방향과 통찰은 적합한 것이라 여겨진다. 쉐릴이 인간 자아 및 공동체의 원형을 하나님 안에서 찾고자 하는 것, 하나님이 인간 관계성의 원형이 된다고 하는 것은 축소되고 왜곡된 관계들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준다. 하지만 쉐릴은 인간 자아 및 공동체의 원형으로서의 하나님의 내적 관계성을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쉐릴이 그의 하나님 이해, 하나님의 내적 삶을 성부, 성자, 성령의 상호순환, 즉 페리코레시스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었다면, 그의 신앙공동체, 코이노니아 개념을 신학적, 성경적 원형의 토대 위에 정립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쉐릴은 조직신학자가 아닌 기독교교육학자였고, 자신이 처한 신학적, 시대적 환경의 한계 속에 있었음을 생각할 때 이러한 한계는 이해할 만한 것이라 여겨진다.

 

V. QTM의 “THINK” 목회철학의 이해

A. QTM의 연혁적 고찰

큐티선교회(QTM, Quiet Time Movement)는 우리들교회의 핵심 컨텐츠라 할 수 있는 큐티나눔(말씀묵상)을 위한 모든 이론과 자료에 대한 연구, 개발, 보급, 홍보를 맡고 있는 사역의 심장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QTM은 우리들교회가 생기기 이전부터 우리들교회 탄생의 모체요 뿌리라 할 수 있다. 1986년 남서울교회 구역큐티모임으로 시작되어 1988년에 구역큐티모임이 목요큐티모임을 발전하게 되었다. 재수생, 대학부, 엘더, 신입반 큐티모임 등으로 큐티모임의 대상이 다양해지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동일한 말씀이 남녀, 연령, 신급, 대상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치유와 변화와 회복을 가져오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이에 힘 어 1998년에 남서울은혜교회에서 열린 제1회 “큐티전도대회”를 시작으로 이후 2001년 동안교회에서 제4회 큐티전도대회를 개최하기까지 참석자가 600명에서 2500명으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2000년 7월 사랑의교회에서 열린 제3회 큐티전도대회 때 “QTM 창립예배”를 드림으로써 오늘날의 QTM 사역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2001년에는 “QTM 소식지” 1호를 발간하고 예배장소를 휘문고교로 옮겨서 교회개척을 위한 기도모임이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2003년 6월에는 비로소 “우리들교회” 창립감사예배와 담임목사 취임예배를 드림으로써 조직교회로서의 위상과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이승민, 2013).

또한 QTM 역시 질적, 양적으로 깊어지고 확장되어서, 2003년에 「(날마다 촉촉이 적셔주는) 이슬비」 9호를 발간하고 2004년에는 「이슬비」의 무료 정기구독 신청을 받게 된다. 이후 「이슬비」에 “묵상가이드 코너”와 “주일예배 간증”이 실리게 되었고, 2012년에는 전문적 QT자료인 「큐티인」이 발간되었다. 이후, 2013년에 「청소년 큐티인」, 2014년에 「어린이 큐티인」, 2015년에 「새싹 큐티인」을 발간하게 되었다. 이로써 영유아, 어린이, 청소년에서부터 전 교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전 백성”(the whole household of God)과 전 세대가 매일 같은 성경본문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다양한 “분리와 단절”로 인해, 신앙의 연속성과 통전성, 가족의 유대성과 친밀성을 유지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QTM이 전 세대를 아우를 뿐 아니라 동일한 본문을 가진 말씀묵상 자료집을 출간한 것은, 신앙의 통전성과 함께 가족의 유대성을 세울 수 있는 큰 공헌을 한 것임에 틀림없다.

 

B. QTM의 목회철학: 5가지 핵심

히브리서는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음을 강조한다(히 11:1-3). 오늘의 피조세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보이는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과 영성으로 말미암는 것처럼, 우리들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순종 그리고 QTM의 목회철학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들교회의 목회 비전, 구조,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QTM의 목회철학에 대한 이해와 깊은 성찰을 필요로 한다.

QTM의 목회철학 기본적으로 5가지 단어로 제시된다. 이 5개 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THINK”로 표시한다. Telling(고백), Holifying(거룩), Interpreting(큐티), Nursing(돌봄), Keeping(적용)이 QTM 목회철학의 5가지 핵심인 것이다(김양재, 2-7). 본 연구자는 “THINK’의 5가지 핵심을 ‘5개의 기둥’(Five Pillars)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5가지 핵심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둘째, 5가지 핵심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서로의 도움 없이는 어느 하나도 바로 설 수 없다. 셋째, 5가지 핵심은 하나의 궁극적 목적, 근원적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그 근원적 목적은 하나님 나라 확장과 하나님 영광의 실현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5가지 핵심은 종교개혁 신앙의 5가지 중심축 ‘5 Sola’와 일치하기에 이것은 기독교신앙의 핵심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 구현을 위한 5가지 기둥이 되는 것이다(이규민, 2017).

QTM 목회철학(기본정신)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 본 연구자는 그 정신을 뒷받침하는 구약말씀과 신약말씀을 제시하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목회철학을 쉐릴의 코이노니아론의 관점, 하나님 나라 구현을 위한 관점, 종교개혁 신앙의 관점에서 분석적으로 고찰해보게 될 것이다.

 

VI. QTM의 “THINK” 목회철학에 분석적 고찰

A. Telling: 공동체 앞에서의 ‘죄고백 –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

이것은 ‘내 죄를 고백’하고 말씀으로 살아난 이야기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간증하는 것이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시 32:3-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한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1-2)

창세기 3장과 4장은 인류 최초의 인간과 가정의 불행이 무엇 때문에 생겨나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것은 곧 죄악 때문이고 그 죄악을 하나님 앞에 그리고 사람 앞에 고하여 회개하지 않을 때 문제가 시작됨을 보여준다. 고백되지 않은 죄가 부부간의 분열, 형제간의 살인을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다. 하나님-자신-이웃-피조세계의 관계회복을 위한 ‘죄고백’(Telling one’s own sin before God and God’s people)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만, 그러한 죄고백의 내용과 방법상에 통전성(integrity)이 있어야 하고, 고백에 따른 파장과 열매가 본인 및 관련된 이들에게 합력하여 선한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안내되어야 한다.

우리들교회 구성원들이 죄 고백을 공동체사역의 중심에 놓는 것은 곧 우리를 만드신 분, 부르신 분, 치유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믿음과 고백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교회 목회철학의 중심이 자기 죄 고백과 회개에 기초하는 것은 쉐릴의 코이노니아 교육론이 하나님의 전적 권위와 주도성의 토대 위에서 기초하는 것과 그 원리가 일맥상통한다. 자유주의와 진보주의 신학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초월성과 계시를 강조하며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Let God be God)고 외쳤던 바르트처럼, 교육신학자 쉐릴 역시 일반 공동체와는 구별된 기독교공동체(koinonia)의 특성을 이렇게 묘사한다:

“기독교공동체는 모든 구성원들의 만남 속에 하나님이 현존이 나타난다. 모든 관계는 하나님의 현존과 참여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공동체가 코이노니아이다.”(GP, 50).

하나님의 현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공동체는 무엇보다 사죄와 용서가 우선되어야 한다. 빛, 진리, 거룩이신 하나님은 죄와 함께 할 수 없는 분이기에 죄고백-회개-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대속의 은총을 덧입어야만 한다. 요한복음 4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것을 말씀하신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 고백과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져야 함을 우리들교회는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교회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그리고 공동체 모임 속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는 것(Telling), 이것은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머릿돌’ 또는 ‘중심 기둥’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종교개혁 신앙의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에 해당한다. “은혜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라는 찬양처럼, 오직 하나님 은혜에 힘입어서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B. Holifying: 삶의 목적으로서의 ‘거룩’ -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이것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을 목적으로 하는 성도의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3)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6)

현대 종교심리학의 거장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체험의 여러 모습들』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s)을 통해,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 ‘행복’은 추구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궁극적 대의(ultimate cause)에 헌신할 때 그 결과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행복의 파랑새와 무지개는 추구할수록 점점 더 달아난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 헌신할 때 어느 새 행복이 옆에 그리고 앞에 다가와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첫째 질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에 대해 응답자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로 대답한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즐거움과 행복이 따라 오는 것이다. 거룩이신 하나님과의 연합과 일치야말로 인생 최고의 목적(meta purpose)인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 그 자체이시다.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하나님은 빛의 근원이시며 창조되지 않은 빛 그 자체이시다. 그분에게는 어둠이 없고 그림자도 없다. 인간에게 두려움, 불안, 고통이 끊이지 않는 것은 의심의 먹구름과 악의 그림자가 끝없이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빛 되신 하나님께 한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 그분의 거룩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그때 감사와 기쁨이 심령과 가정 속에 찾아오게 된다.

우리들교회가 삶의 목적을 행복이 아닌 거룩이라고 선포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주장은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혁명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종교유무, 남녀노소를 떠나서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소수의 경건한 사람을 제외하고 보통의 크리스천들은 감히 ‘거룩’을 인생의 목표로 삼으려 하지도 않는다. 거룩은 외롭고 힘들고 금욕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거룩은 크리스천은 물론이고 모든 인간의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 인간은 피조물이고 창조주는 하나님이며 그 창조주 하나님은 곧 거룩한 분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묘사한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사 1:3)

소와 나귀도 임자와 주인을 아는데 인간은 그 주인과 창조주가 누군지 모른 채 살아감을 한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사야의 외침에 귀 기울일 때, 인생의 근본 목적은 ‘거룩’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들교회가 ‘거룩’을 인생의 근본목적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동편 기둥’과도 같다. 동편에서 비쳐오는 태양이 하나님의 거룩한 빛을 반사하고 하나님의 빛은 모든 불결하고 더러운 것들을 소멸하고 정화시켜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에 해당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는 말씀처럼,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연합과 일치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C. Interpreting: ‘말씀묵상’(QT) - 오직 말씀으로만(Sola Scriptura)

이것은 ‘구속사적 말씀묵상’으로 자기 삶을 해석하며 자기 죄를 보는 과정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과거 기독교의 오랜 전통 중에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가 있다. ‘거룩한 독서’는 성경말씀을 온 몸과 마음으로 읽을 뿐 아니라 그것을 읽고, 느끼고, 체감함으로써 전 존재가 말씀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이규민, 2011, 129-130) ’거룩한 독서‘가 중요한 영적 유산이긴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활용하는 교회들이 별로 없다. 대신에 실제성, 적용성, 효과성이 탁월한 성경읽기로서 “Quiet Time” 또는 “Quality Time”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들교회 담임목사는 설립 이전부터 평신도 사역자로서 오랜 기간 말씀묵상을 통해 하나님 말씀의 능력과 생명력을 사역의 원동력으로 삼음으로써 말씀중심 목회의 훌륭한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김양재 목사는 오래 전부터 큐티사역을 통해 재수생, 평교인, 제직자와 목회자들에 이르기까지 성경말씀 속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고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능력 있는 말씀사역을 감당함으로써 오늘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성경말씀은 성경책 속에 갇혀 있는 한 결코 생명력을 발휘할 수 없다. 성경말씀은 반드시 믿음의 눈으로 읽어야 하고 “나를 위한 말씀”으로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오늘의 본문이 나를 위해 예비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올 때, 그 말씀은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시작한다. 이 때 비로소 모든 실패, 아픔, 고통, 죄악마저도 하나님 나라를 위한 약재료로 쓰임받기 시작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실패와 아픔의 통로가 은총과 구원의 통로로 변환(transformation)되는 것이다.

우리들교회가 모든 사역의 원동력을 말씀묵상(QT)으로 삼은 것은 철저히 성경적인 동시에 기독교의 영적 원리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창세기 2장 7절은 하나님의 ‘생기’가 그 코에 들어갈 때에 비로소 흙의 형상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고 증언한다. 에스겔 37장은 하나님의 ‘생기’가 사방에서 불어올 때에 하나님의 군대가 살아남을 기록한다. ‘생기’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루아흐 (ruach)로서 이는 하나님의 ‘숨결’ 또는 성령의 ‘바람’을 의미한다. 성경책 속에 갇혀있던 말씀이 하나님의 숨결과 성령의 바람을 통해 발화(發話)되고 생명력을 입을 때, 그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the living Word of God)의 활력을 발휘하게 된다. 말씀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캘빈, 쉐릴, 거트리, 홀, 바르트 같은 개혁전통 신학자들의 “성령의 조명과 인도”(illumination and guidance of the Holy Spirit)를 강조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우리들교회 사역의 원동력인 ‘말씀묵상’(QT)은 하나님 나라의 ‘서편 기둥’과도 같다. 지구의 끝없는 자전운동 때문에 모든 천체들(해, 달, 별)은 예외 없이 서쪽하늘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의 끊임없는 성화운동(sanctifying movement)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향해 순종하며 나아가도록 개인 및 집단을 회개와 양육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향해 인도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오직 말씀으로만”(Sola Scriptura)에 해당한다.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자기 죄를 볼 수 있고 생명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D. Nursing: 지체 ‘돌봄’ - 오직 그리스도로만(Solus Christus)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지체들을 ‘돌보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3-4)

성경에 나타난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 무엇인가를 묻는 율법사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 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하나님께 대한 성경의 증언을 핵심적으로 요약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이고, 인간의 삶에 대한 성경의 증언은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를 가리켜 “사랑의 종교”라고 부른다.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신을 향한 말씀을 분변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이 된 지체들을 ‘돌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 하셨고 사도 바울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볼 것”을 당부한 것이다.

쉐릴은 코이노니아의 대표적 특성은 곧 참된 ‘사랑’이 실천되는 공간임을 강조한다. 물론 사랑의 근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하나님의 영령의 임재는 참된 사랑을 가능케 한다:

“[코이노니아의] 참된 교제는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함께 함으로써 나아와 계층을 불문하고 단지 믿음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행위에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으로 대하고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1932: 25-26).

말씀묵상을 통해 자기 죄를 보게 되고 죄고백을 통해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고 사랑받았기 때문에 사랑받을 수 있도록 역동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자기가 속한 가정, 구역, 교회, 공동체를 향한 돌봄과 봉사로 나타나야만 한다.

우리들교회의 ‘지체 돌봄’은 하나님 나라의 ‘남쪽 기둥’에 해당한다. 따뜻한 남향집을 선호하는 것처럼 형제사랑, 자매사랑, 지체사랑은 서로를 돌봐주고 세워주는 따뜻한 열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오직 그리스도로만”(Solus Christus)에 해당한다.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쳐 주시고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사랑으로 강권해주시기 때문이다.

 

E. Keeping: ‘적용’(가정과 이웃 살리기) -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

이것은 말씀에 기초하여 십자가를 지는 ‘적용’을 통해 가정과 이웃을 살리는 것이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시 128:3)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롬 15:1-2)

앞의 1~4까지의 단계가 성실하게 이루어졌다면, 이제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위에서 가족, 공동체, 지역사회, 국내, 국외와 땅끝을 향해 생명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해나갈 수 있게 된다. 생명은 생명을, 구원은 구원을 낳기 때문이다. 식물, 동물, 사람 할 것 없이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생명의 계속적 창조과정에 참여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하나님의 문화명령은 단순한 물질적 충만이나 정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과 진리의 충만, 공의와 긍휼의 충만, 참된 생명력의 충만을 의미한다. 또한 피조세계의 돌봄과 살림의 ‘청지기직’(stewardship)을 감당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최초의 타락 이후 아담, 하와, 가인, 아벨은 분리, 비난, 시기, 폭력, 살인 속에 빠져든다. 이후 펼쳐지는 역사는 끝없는 비교, 경쟁, 분열, 지배,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보게 된다. 우리들교회의 ‘Keeping’은 자신, 가정, 교회, 이웃을 이러한 분열과 폭력으로부터 지켜내고 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천국백성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이요 다짐인 것이다. 이러한 ‘Keeping’을 통해 가인 이후 지속되는 죽임살이를 멈추고 그리스도를 통한 살림살이(salvific life)로의 변환(transformation)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들교회의 ‘적용’(가정과 이웃 살리기)은 하나님 나라의 ‘북쪽 기둥’에 해당한다. 아직 복음의 능력과 생명력이 전달되지 않은 곳, 추위와 굶주림과 아픔이 있는 곳을 향해 사랑의 손길을 펼쳐나갈 곳이 우리의 영적 북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에 해당한다. 자신, 가정, 이웃, 세계의 구원과 변화는 오직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VII. “THINK”의 목회철학과 쉐릴의 코이노니아론의 상응 가능성

코이노니아는 신앙공동체이자 구속공동체임을 쉐릴은 강조한다. 쉐릴이 말하는 구속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으로서 깨어진 관계들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신-인(God-human), 대내(intra-personal), 대인(inter-personal), 대자연(inter-natural)과의 관계성이 개인의 죄와 집단의 죄로 인해 깨어지고 왜곡된 것들이 그리스도의 대속과 아가페의 실천을 통해 치유되고 회복됨으로써 가정, 교회, 학교, 사회, 피조세계 속에 코이노니아의 생명력이 전파되어 하나님 나라 확장과 실현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교회는 목회철학을 담은 슬로건인 “THINK”, 즉 죄고백(Telling), 거룩지향(Holifying), 말씀묵상(Interpreting), 지체돌봄(Nursing)을 통해 자신, 가정, 교회, 이웃, 사회를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생명력을 불어넣음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실현하는 일을 쉼 없이 지속해나가는 일(Keeping)을 성실히 수행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교회의 목회철학을 담은 슬로건 “THINK”는 볼 때마다 히브리서 3장 1절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THINK”는 성경적, 영적 함축성을 지니고 있다. 정적 명사가 아닌 동사로 표현한 것도 그렇고, 현재나 미래가 아닌 현재진행형으로 제시한 것도 그렇다. 바울사도처럼 그리스도를 향해 쉼 없이 전진하는 모습을 느끼게 한다: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2)

이러한 모든 것들을 종합해볼 때, 우리들교회 목회철학은 성경에 기초한 동시에 건강한 개혁전통 신학(Reformed Tradition)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교회들이 ‘보이지 않는 교회’(the invisible church)로서의 본질을 희생하며 ‘보이는 교회’(the visible church)의 제도화와 기구화에 몰두한 나머지 사회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잃어가는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우리들교회가 비교적 짧은 역사 속에 많은 양적 성장을 이루면서도 ‘보이지 않는 교회’로서의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은 여러 면에서 귀감이 되고 모델이 된다.

이미 잘 달리고 있는 경주마에 또 한 번의 자극을 더하는 것을 ‘주마가편’(走馬加鞭)이라 한다. 우리들교회는 말씀, 신앙, 치유, 가정 및 공동체 사역에 있어서는 이미 훌륭한 모범을 보이고 있다. 신앙공동체로서의 본질에 충실한 생명력이 이러한 훌륭한 성장과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생명력을 토대로 하여 지역사회와 한국사회, 세계사회를 향해 더 넓고 크게 생명운동을 펼쳐나갔으면 하는 기대와 바램을 가져본다. 전인적 회복과 전인적 구원 차원에서 소외된 자들과 약자들을 향한 구제와 봉사, 사회문제와 환경문제 개선을 위한 기여와 참여 등으로 생명운동을 확장해나간다면, 신자뿐 아니라 불신자, 국내뿐 아니라 국외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교회의 비전과 사역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교회가 일반목회가 아닌 특수목회, 특수사역의 정체성을 강조한다면, 일반적으로 교회가 지향하는 통전성보다는 특화된 전문성을 지속해나갈 수도 있다. 지금까지 우리들교회가 걸어온 방향은 ‘죄고백’과 ‘큐티나눔’이라는 양대 축을 중심으로 특화된 목회를 지속해왔다. 의료계에도 환자의 전반적인 건강을 체크 업하는 일반의가 있는 반면, 특화된 부분에만 집중하는 전문의가 있다. 따라서 우리들교회에게 대부분의 교회들에게 기대되는 전반적 사역을 모두 수행할 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자칫 우리들교회의 특수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삼위일체 하나님 사역의 전체적 조망 속에서 “simple & deep”이라는 우리들 정신을 놓치지 않는 “제 3의 길”을 모색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심오한 진리는 큰 그림과 함께 정밀한 디테일이 강조되지만, 여전히 그 모든 것을 하나로 관통해내는 ‘심오한 단순성’(profound simplicity)을 그 속에 함께 지니고 있다.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성경 66권의 엄청난 기록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명제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E=MC2”라는 공식으로 압축할 수 있다면, 우리들교회의 목회 비전, 구조, 철학을 하나로 압축하는 표제어를 주조해낼 수 있다(이규민, 2016).

물론 “THINK”가 이미 어느 정도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THINK 세미나”를 경험하지 않으면 그 의미를 충분히 소화하기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THINK,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생각하라!”(히 3:1),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입니다!”, “말씀 담은 생명으로 하나님 나라 세우는 우리들교회!”처럼 한 줄로 압축된 캐치 프레이즈가 필요하다. ‘심오한 단순성’은 큰 그림의 스케일과 함께, 집중되고 선택된 초점으로 모든 것들을 수렴해내는 힘을 지니고 있다. 우리들교회 사역을 수렴해내는 두 기둥은 ‘죄고백’과 ‘큐티 나눔’이고, 이 두 기둥은 나머지 세 기둥을 떠받치며 힘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우리들교회의 목회철학 “THINK” 그 중에서도 ‘죄고백’과 ‘큐티나눔’은 우리들 공동체로 하여금 회개, 용서, 치유, 회복, 성장을 향해 나아가도록 역동화 시켜주는 원동력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목회철학은 쉐릴이 제시한 코이노니아와 일맥상통한다. 코이노니아를 가능케 하는 절대 주권이 하나님께 있고, 코이노니아의 근본정신이 아가페적 사랑을 통한 치유와 회복이며, 코이노니아를 지탱케 하는 의사소통이 양방향적, 상호적 돌봄에 의한 것임을 생각할 때 그 기본 정신과 철학이 놀랍게 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통해서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와 뜻이 실천되어야 함을 쉐릴이 강조하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우리들교회가 다양한 공동체와 목장(부부, 여자, 직장, 은빛, 골드) 모임을 통해 큐티나눔을 통한 하나님의 뜻 발견과 적용을 위해 진력하는 것과 상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쉐릴이 기독교교육 신학 및 심리학자로서 이러한 공동체 사역을 위한 신학, 교육학, 심리학적 이론의 토대를 든든히 하는 공헌을 한다면, 우리들교회는 이러한 이론적 접근이 목회현장과 실제 삶에서 어떻게 실천되고 구현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이다. 향후 쉐릴의 공동체 이론과 우리들교회의 공동체 사역의 상호보완성과 상호비옥화에 대한 집중적 성찰이 후속연구를 지속해나갈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를 통해, 우리들교회의 신학적, 교육적, 실천 이론적 토대와 체계를 확고히 함으로써 더 많은 심령, 가정, 교회들이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 회복됨으로써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에 더 많은 공헌을 할 수 있으리라 사료된다.

 

나가는 말

한국교회가 당면한 위기 중에 다음세대의 위기는 현재 심각한 상황이다. 입시위주 교육에 내몰리다보니, 다음세대 학생들 스스로 “학원 다니기 위해 교회를 끊었다”고 공공연히 말하기도 하고, 또 교회 중직 및 제직자들 마저도 자기 자녀가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수년간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묵인, 방관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의 권사님으로부터 들었던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다. 딸이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대학시험 칠 때까지 당분간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하였고 그 딸은 다음 해에 모 명문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제 대학에 들어갔으니 교회에 나올 것을 아무리 권면해도, 자기는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교회에 나갈 필요가 없다며 교회 출석을 완강히 거부하는 것이었다. 딸아이가 이제는 신앙생활을 전혀 하지 않는다며 뒤늦게 후회하는 것이었다.

한국사회가 점점 더 입시와 성공의 노예가 되는 것은 신앙유무와 상관없이 편만해가는 상황이다. 명문대 진학과 성공을 위해 자녀를 입시준비로 몰아가는 것이 과연 자녀의 앞날과 가정에 성공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일까? 기대와는 달리 이런 지나친 추구가 오히려 실패와 불행을 초래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첫째, 자녀가 일시적으로 성공한다 해도 끝없는 과잉경쟁으로 인해 또 다른 열패감에 휩싸이든지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다. 둘째, 부모와 자녀 사이에 지나친 억압과 반발로 인해 사이가 나빠지고 심한 경우 여러 형태의 언어폭력 또는 신체폭력에 시달리기도 한다. 심지어 존속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나타나는 형편이다. 셋째, 성취중독과 성공중독에 빠진 나머지 많은 것을 이루고도 그것에 만족하거나 누리지 못하고 더 많은 것 더 높은 것을 향해 끝없이 자신을 몰아간다. 그 결과 신체적, 정신적 질병으로 고통 받게 된다. 넷째, 혹시 많은 것을 이루고 누린다 해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명감이 없이 사는 인생은 결국은 허망과 좌절로 끝나고 만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17년 7월까지 발생한 존속살해는 252건에 달했다. 한 달에 무려 4.5건의 존속 살인 범죄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여러 형태의 존속폭행 범죄는 총 7,582건으로 과거에 비해 두 배 이상 급속한 증가추세에 있다고 한다. 평균 한 주일에 37건 이상 부모들이 자기 자녀에게 폭행을 당해 경찰이 수사에 나선다는 것이다.

원 창조 이후 생명의 계속적 창조를 위해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두 기관이 있다면 그것은 창세기에 나타나는 가정과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교회이다. 이 두 기관은 육적 생명과 영적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관일 뿐 아니라 두 눈, 두 팔, 두 다리처럼 상호 긴밀한 협력과 보완을 필요로 한다. 건강한 가정 없이 건강한 교회도 없고, 건강한 교회 없이 건강한 가정도 없다. “건강한 가정을 위한 교회, 건강한 교회를 위한 가정” 사역을 가장 모범적으로 수행하는 교회로서 우리들교회는 훌륭한 귀감이 된다. 담임목회자의 최근 설교를 통해 우리들교회 사역의 단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2018년 8월19일 주일예배 김양재 목사 설교 녹취록(해당부분)>

 

“지난 주 태국 아웃리치를 갔다 왔는데, 거기서 우리교회의 한 모녀지간에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엄마와 딸은 중학교 1학년인데 엄마는 철저히 일중심의 사람으로서 엄마의 역할보다는 직장에서 사장의 역할이 더 익숙한 분인데결혼을 할 때도 순종해야 될 남자를 만나서 신결혼 한 게 아니라 자신이 사업할 때 반대하지 않을 유순한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했고결혼 초에는 남편의 반대 없이 사업을 했던 분이랍니다그런데 그 사업이 잘 될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욕심 부리다 부도가 나니 빚이 남편에게 전가될 위험이 생기자 불신결혼의 특징이 마음씨 좋은 남편이 이혼을 요구해서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성취가 목적인 엄마가 사업에서 성취가 좌절되자이번에는 딸을 서울대에 보내보겠다는 목적을 가지게 되었고그 목적을 따라 딸에게 학대에 버금가는 교육을 시켰답니다.

그 예로이 아이가 중학교 1학년인데 학원에서 고등하교 1학년 2학년 과정을 다 마쳤고지금은 고과정을 선행 학습하는 중이었답니다.

이게 말이 안 되는데이 서울대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는 딸의 요청은 묵살하고이 선행학습을 밀어붙인 것입니다그런데 딸이 더는 못 하겠다고 두 손 들고 학원을 다 끊어버렸고이제 엄마는 또 한 번의 목표가 좌절되자심한 갈등을 빚고 그 갈등이 해결되지 않자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이번에 아웃리치를 신청한 것입니다.

딸이 배 째라 그러고 있으니까이 딸 하나 때문에 사는데... 그래서 아웃리치 일정의 둘째 날 저녁에 딸이 울면서 어머니의 야망과 학대를 고발했습니다고발과 더불어 엄마의 가슴에 아주 못을 박는 말을 했는데, “엄마가 아빠에게 왜 이혼 당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아나는 엄마보다 아빠가 좋아.”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을 계속 한 거예요.

이 때 함께 한 공동체가 힘을 합쳐서, 에덴동산을 지켰던 그들처럼 이 가정에 침투한 바벨론, 음녀의 출입을 막기 위해 처방을 했는데, 먼저 엄마에게는 딸의 이 말은 버릇없는 말이 아니라 집사님이 철저히 인본적인 가치관 아래서 아이를 길렀기 때문에, 마땅히 들어야 하는 말이고 집사님 삶의 결론이라고, 정말 그렇게 서울대가 좋다면 아이를 보낼 게 아니라 어머니가 직접 가시라고, 어머니가 서울대에 갈 자신이 없으면, 아이가 못 간다고 해서 아이를 탓할 자격이 없는 거라고 처방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한 말이이제 어머니는 자신의 가치관을 회개하고 아이를 서울대에 보내려고 했던 그 절박함과 정성으로아이를 천국에 보내려고 애를 써야 한다고 했고서울대라는 영광보다 천국이라는 영광의 가치를 더욱 귀하게 여기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지 못하면설사 아이가 서울대를 간다고 해도그 학벌로 이 땅의 썩어가는 것에 집착하는 지옥을 살다가살아서 경험했던 지옥을 죽어서도 영원히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이기고 또 이기려는 그 가치관을 버려야 아이가 산다고모두가 달려들어서 처방을 했습니다그러자 이 집사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자신의 잘못된 가치관 때문에 딸이 죽어가고 있었던 것을 인정했고자신이 천국보다 서울대의 가치를 더 영광스럽게 여기는 인본적인 사람인 것을 변명하지 않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적용하기를이제는 딸이 공부할 때 최선을 다해 지원은 하되다시는 서울대에 대해 강요하지 않기로 했고내 자녀를 하나님이 길러주시기를 바라며남의 자식 기르는 교육부에 교사로 지원하겠다고 적용을 하였습니다.

엄마의 회개의 모습 앞에서이제는 공동체가 이 딸에게 달려들어서 처방하기를네가 엄마의 모습에서 위대하게 봐야 할 것은너를 애써 길렀던 노력에 대해 생색내지 않고자신의 죄를 온전하게 인정하는 이 회개를 가장 위대한 모습으로 알고 기억해야 한다면서엄마가 모든 사람 앞에서 수치를 당하며 회개하는 이유는바로 너를 살리기 위함이고이것이 네가 기억해야 될 엄마의 가장 큰 사랑이라고 처방했답니다.

그리고 모두 보는 앞에서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며 안아주라고 하자엄마가 딸에게 사랑한다고 했고아이가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했고그날 밤에 두 사람이 꼭 끌어안고 잠을 잤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경험을 하고 이 집사님이 고백하기를, 우리들 교회는 내 자녀를 공동체가 같이 길러준다고 하는 말을 듣고 왔는데,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되었다고 고백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분이 목원입니다. 딸 때문에 왔습니다. 그런데 오자마자 이런 은혜를 받잖아요. 그런데 예수가 없으면 어떻게 영생을 누리겠습니까? 지옥을 사는데, 나중에도 지옥 가는데...

여러분들 이렇게 영생에 이르는 것이고, 이렇게 여러분들이 생명나무 열매를 맺고 다른 사람들에게 먹게 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볼 때, 우리들교회가 한국교회의 대표적 대안모델 중 하나로 평가될 수 있는 힘과 원동력은 다음과 같은 특징에 기초해 있다.

첫째, 큐티묵상을 통해서 자기 죄를 들여다보며 자기 삶에 적용하는 훈련.

둘째,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된 죄를, 하나님과 공동체 앞에서 진실 되게 오픈하는 죄고백.

셋째, 형제자매의 죄를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온전한 회복을 위해 사랑으로 감싸는 공동체의 지원.

넷째, 목회자의 설교를 구성원들이 한 주 동안 묵상하며 나누고, 예배시간에 간증과 기도를 통해 적용하며 삶으로 연결하는 실천.

다섯째, 유치, 유년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교회 전 구성원이 같은 본문을 가지고 예배, 설교, 큐티, 공동체 모임을 함께 하는 공동체로서의 공동적 삶.

여섯째, 담임목회자를 위시로 교회의 리더들이 하나님과 말씀 앞에 순종하며 하나님과 거룩을 향해 나아가는 솔선수범하는 모습.

일곱째, 문제와 고통 앞에서 환경이나 남 탓을 하기 보다는 그 문제들이 자신의 신앙성숙을 위한 '약재료'로 변환(transformation)될 수 있도록 말씀으로 해석하고 수용하는 깊은 영성.

 

이러한 영적 노력의 토대 위에서, 소아시아의 초대교회, 종교개혁기의 유럽교회, 선교초기의 장대현교회처럼 하나님은 우리들교회를 사용하고 계신다.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전환기적 위기 속에서 가정, 교회, 공동체의 본질 회복을 위한 모델로서, 우리들교회가 “보이지 않는 교회”(the invisible church)의 정신을 지속적으로 구현해나갈 것을 기원하며 논의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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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진  wisestar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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