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의 충돌-3

정성호 목사(대구서교회 부목사)

필자는 앞선 두 개의 기사를 통해 현재 한국 사회에 나타나는 사회적 문제를 세계관의 충돌로 규정한 바 있다. 그리고 성경적 관점에서 본 인권이 무엇인지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마지막 과제로 현재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동성애, 여성, 난민, 사회적 약자 등과 같은 문제를 우리가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어떤 관점이 성경적인지에 대하여 논의하려고 한다.

구약에 나타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점

어느 시대에나 사회적 약자는 존재해왔다. 구약성경 시대에도 예외는 없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고 난 이후(가족 단위를 넘어 민족 단위가 되면서)부터 끊임없이 사회적 약자는 발생하였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함께 나온 여러 민족들도 있었다. 성경에서 묘사되는 당대의 사회적 약자는 이방인, 고아, 과부로 정리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들에 대한 보호를 말씀하셨다(출22:21-22).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함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는 그 시대에 가장 연약한 자들이었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압제를 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보호자의 부재로 인하여 사회적 재판이나 여러 상황에서 불이익을 받기 쉬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당시의 가장 사회적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이방인, 고아, 과부를 보호할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재판장이 되신다고 선언하셨다(시68:5).

그 외에도 같은 형제끼리 지켜야 할 사회적 윤리가 있다. 한 형제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자신의 가진 기업을 다른 형제에게 팔게 되었을 경우 희년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을 원래의 소유자에게 돌려주는 제도도 마련하셨다. 이를 통해 사람들의 기업은 곧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임을 알게 하셨고, 사람들이 자신의 기업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회적 약자들에 관심을 가지셨고, 언약의 백성들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보고 계셨다.

신약에 나타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점

신약에 나타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추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물으셨을 때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으로 대답하셨다(마22:34-40).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네 이웃’의 범주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웃의 범주는 동족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을 추적해보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네 이웃’은 더 넓은 범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당시의 바리새인이요 산헤드린 공회 의원인 니고데모와도 대화를 하셨고, 사마리아 여인과도 대화를 나누셨다. 질병과 귀신들린 자들과도 대화하심으로 그들을 고쳐주셨고, 음행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과도 대화하셨다. 또한, 예수님의 ‘이웃’개념은 유대인과 사마리아를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향한다. 예수님은 로마의 백부장과도 대화하심으로 그의 하인을 고쳐주셨고, 당시 이방인의 땅으로 불렸고 유대인들이 배척했던 데가볼리 지역으로 넘어가셔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기도 하셨다. 이 모든 사건들을 종합해 볼 때,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네 이웃’의 개념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었던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복음이 필요한 자, 복음 없이는 소망이 없는 자,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포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이런 정신을 이어받은 교부들은 구제사역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어거스틴은 구제사역의 근거로 인간과 함께 고통받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했다.

형제들이여 우리 머리의 사랑을 생각하라. 그는 하늘에 계시다. 그러나 그는 교회가 여기에서 고통받는 한 여기에서 고통받으신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배고프며, 목마르며, 벌거벗었으며, 나그네이며, 병자이며, 감옥에 갇힌 자이다. 그의 몸이 여기에서 고통을 받을 때 그는 고통받고 있다고 말한다(이은혜, “[신학과 목회/초대교부이야기(5)]구제,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 통로 -어거스틴-”, 「기독교사상」 49(6) (2005) : 250.).

배고프며, 목마르며, 벌거벗었으며, 나그네이며, 병자이며, 감옥에 갇힌 자가 곧 그리스도라는 어거스틴의 고백은 우리 주변에 소외된 이웃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그들을 섬기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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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대에 다리 놓기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가지고 현시대를 이해해보자. 현시대에는 기독교 신앙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주장들을 하는 사람들이 소위 사회적 약자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권리를 말하고 있다. 자신들은 그동안 거대담론과 주류적 가르침으로 인하여 억압받고 피해를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스스로 목소리를 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의 목소리를 내는 일들이 날로 커져만 가고 있고, 인권을 말하는 정부는 공적인 영역에서 제도적으로 이들에게 활동의 근거를 제공하고자 하고 있다. 경기도에서는 성 평등 기본조례 개정을 통과시킴으로 이것이 재의를 거쳐 확정될 경우 본격적으로 종교의 영역에도 공공의 제도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사회적 약자들을 대할 수 있을까?

먼저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그 사람의 인격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쉽게 범하는 오류는 그 사람의 주장과 그 사람의 인격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어떠한 사람이 ‘성 평등을 원한다.’라고 주장을 한다면, ‘성 평등’이라는 것은 당연히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물론 그런 주장을 한 사람까지도 배척한다. 우리는 성경적 가르침에 위배되는 주장은 당연히 배격해야 한다. 동성애 문제, 전략적으로 이슬람 종교를 가지고 들어오는 난민문제, 성 평등의 문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문제들 중에서 성경적 가르침에 직접적으로 위배되는 내용은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직접적으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 않더라도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으로 비추어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마땅히 배격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그 사람, 그 인격은 우리가 품고 기도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 구원을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칼빈은 제한적 구원을 말하면서도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부르시고 회개하라고 권고하시면서 우리 모두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며, 우리 속에는 죄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이러한 권고를 통해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략). 그러므로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일을 행하셔야 합니다. 우리를 성실하게 가르치기 위해 사람들을 세우셔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서 골수까지 사무치게 하셔야만 합니다. 또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일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어서 우리 마음에 뿌리가 내리도록 하셔야 합니다.(칼빈, 『경건의 비밀』, 22-25)

칼빈은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 ‘모든 사람’의 범주에는 동성애자들, 소수자들, 난민들 어느 대상에도 예외는 없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들의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품고 기도하며 성경적 가르침으로 바르게 인도할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우리 또한 그들의 주장을 배격해야 하지만 그 사람 자체는 구원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김이 마땅하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살펴보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신약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이 시대에 공허한 영혼의 상태를 세상의 것으로 채워나가고자 하는 그들을 품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마저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칼빈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라고 하는 이 구절처럼 잘못된 주장을 하는 그들이 어떤 잘못을 하고 있는지, 어떤 깊은 함정에서 몸부림치고 있는지 진리의 말씀을 통해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가 그들을 단순히 배격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주장은 배격하되 영혼은 품고, 함께 견뎌주며, 세상의 것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세계관의 충돌 속에서 우리가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하는지 잘 분별하여 선택함으로 한 영혼이라도 죄악 된 길에서 돌이켜, 돌아온 탕자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날을 기대하며 시대를 바라보고 영혼을 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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