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화(전국입양가족연대 수석대표)
오창화(전국입양가족연대 수석대표)

최근에 베이비박스 앞에서 1,802번째 아기가 죽음을 맞이했다. 1,801명의 아기가 베이비박스 안에서 생명을 지켰지만, 1,802번째 아기는 생모가 베이비박스 바로 맞은편 드럼통에 놓고 가면서 초겨울 추운 밤을 견디지 못하고 안타깝게 사망한 것이다. 이와 관련된 뉴스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수많은 댓글이 같이 쏟아졌다. 대부분은 읽기조차 고통스러운, 생모를 비난하는 원색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필자가 보았던 현장은 조금 달랐다. 생모는 집의 화장실에서 아기를 홀로 분만하고 먼 길을 걸어왔으며 가파른 언덕을 올라서 탯줄이 달린 아기를 베이비박스 앞에 두었다. 초겨울이었지만, 추웠던 날씨 가운데 자신의 옷을 벗어서 아기를 덮어주고 돌아서는 영상 속의 모습이 애처롭기만 했다. 왜 아기를 베이비박스 안이 아닌 바깥에 두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엄마가 아기의 생명을 살리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오늘도 대한민국에서 하루에 3,000명의 아기를 낙태로 죽이는 것에 비하면, 이 엄마는 태중의 아기를 지켜냈다. 다만, 경제적인 어려움과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부담감으로 스스로 양육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뒤 난곡동 가파른 언덕길까지 올라와 베이비박스 앞에 내려놓은 것이다. 누군가가 대신 아기를 안아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베이비박스
베이비박스

사람들은 쉽게 영아원 또는 보육시설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에게 생모가 버린 아이라는 표현을 한다. 우리 사회 보편적 문화를 반영한 말이다. 최근에 만났던 목사님도 계속해서 그와 같이 말씀하셔서 필자의 마음이 매우 어려웠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생모로부터 태중에서 양육되고 고통 가운데 출산을 하였기 때문에 지금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버려진 아기들은 보육원에서 자라는 아기들이 아니라 태중에서 죽임을 당한 아기들이다.

필자는 5명의 자녀 중에 2명을 입양한 입양 부모다. 많은 입양 부모들의 생각과 같이 필자의 자녀들은 생모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다. 생모는 그 작은 생명을 지켜냈지만 스스로 양육하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필자의 가정에 양육을 맡겼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누구든 입양 자녀와 시설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에게 버려진 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정중하게 지켜진 아이라는 단어로 정정을 부탁드린다.

우리 입양 가족들은 여성의 몸으로 출산을 감당한 생모들에게 수고했다고 칭찬하며 응원을 전한다. 오히려 여성과 함께 사랑을 나누었지만,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고 도망간 남자들이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남성은 마지막까지 여성의 곁에서 책임져야 한다. 만일 함께 양육하지 못한다면, 두 사람이 함께 자녀를 위탁 또는 입양을 결정하기까지 함께하며 생명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

공개 입양 자녀들은 6세 또는 7세 즈음에 입양이라는 단어를 인식하게 된다. 자신의 생모와 생부가 따로 존재함을 비로소 느끼게 된다. 필자의 가정도 그랬다. 오빠들과 언니가 있는 쌍둥이 입양 자녀들이 처음 입양이라는 단어를 인식했을 때, 엄마의 옷자락을 붙잡고 부엌 옆으로 조용히 끌고 갔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에게 엄마, 나를 낳아준 엄마가 따로 있어요?” 라로 물었다고 한다.

그 순간을 오랫동안 준비한 아내였기에 밝게 웃으며 쌍둥이의 생명을 지켜준 예쁜 엄마의 존재를 열심히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쌍둥이 딸들은 엄마의 설명을 듣기보다는 엄마의 표정과 엄마의 반응에만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엄마가 그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아닌 듯 대하는 것을 느낀 쌍둥이는 엄마의 설명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이미 친구들과 놀기 위해서 뛰어나갔다.

대신 쌍둥이 엄마인 아내는 또 다른 엄마의 존재를 알리는 첫 순간이 지나자 다리가 풀리면서 눈물이 났다고 한다. 슬퍼서 흘린 눈물이 아니다. 가슴으로 낳은 딸들이 혹시나 슬퍼할까 봐 걱정을 참았던 눈물이며, 어려움 없이 첫 순간을 잘 넘긴 감사의 눈물이고, 아이들이 문제없이 받아들인 것에 대한 기쁨의 눈물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자녀들이 생모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첫 번째 생일이 다가올 즈음, 밤에 책을 읽어주는 아내에게 쌍둥이 두 딸이 갑자기 생모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물었다. 침대에 누워 질문하는 쌍둥이를 내려다보던 엄마는 쌍둥이의 눈을 깊이 바라보면서 말했다. “우리 딸의 눈을 보니까 예쁜 엄마의 눈이 보이네. 우리 딸의 아름다운 코를 보니까 엄마 눈에는 예쁜 엄마의 코가 보이네. 우리 쌍둥이를 낳아준 예쁜 엄마는 정말 예쁘다.”라고.

생모가 보고 싶다는 쌍둥이들의 말에 엄마는 그럴 때마다 거울을 보라고 일러준다. 거울을 보면서 생모에게 건강한 몸 주심을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말해 주라고 전한다. 그렇게 우리 쌍둥이는 자신들을 건강하게 낳아준 생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자라고 있다. 제가 알고 있는 대부분 입양아는 그렇게 양부모와 사랑을 나누며 그들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다.

필자가 아는 청년의 이야기다. 어려서 경찰서 앞에서 발견됐지만, 양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청년이다. 자신은 양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았고, 여러 동생이 입양되는 것을 보면서 건강하게 자랐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자신의 생모가 왜 자신을 키우지 못하고 경찰서 앞에 두어야 했는지 의문이 가득했다.

오랫동안 뿌리가 깊었던 의문은 미혼모시설을 방문하고서야 해결이 되었다고 한다. 보호 시설의 미혼모들이 비록 스스로 아기를 키우지 못할지라도 자신보다 좋은 환경에서 아기가 자랄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아기를 애틋하게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혼모의 사랑과 미혼모의 안타까움을 본 입양인은 자신의 생모도 분명히 자신을 그런 간절함으로 생명이 안전한 경찰서 앞에 내려놓았음을 깨닫고, 생모를 용서하며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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