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고는 정치 평론가 유재일의 저서 및 유튜브 영상들을 중심으로, 이부영, 김정남 선생의 인터뷰들을 참고한 내용이다. 필요에 따라 약간의 내용을 첨가하였다. 오늘의 콘텍스트를 이해하고 세상을 위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라며.

 

필자는 본고를 통해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민주당과 현 정권이 어떤 역사 속에서 주사파에 의해서 잠식 당했다는 의심을 사는지 묘사하려는 목적." 친노 친문으로 불리는 세력은 처음에는 주사파 운동권과 무관한 정치 그룹이었기 때문이다. 주사파가 민주당과 현 정권을 장악했다는 의심을 산 것은 오래 전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친노 그룹은 시민 거버넌스를 주장하는 시민 중심의 정치 세력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의 처절한 실패를 겪으면서, 진보 진영 내부 권력 투쟁에서 승리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진보 진영 내부 권력 투쟁에 뛰어드는데, 그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주사파와 손을 잡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주사파 운동권에게 완전히 잠식 당하게 된다. 앞으로 3번에 걸쳐서 친노 세력이 주사파에게 잠식 되었다고 의심을 받게 된 과정을 묘사할 것인데, 이 과정의 묘사는 현 정권 뿐만 아니라 진보 진영 전체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사진=시사오늘. 김영삼과 김대중이 민추협 공동의장이던 시절)
(사진=시사오늘. 김영삼과 김대중이 민추협 공동의장이던 시절)

 

민주화 3대 세력: 상도동, 동교동, 재야 세력

친노의 역사를 되짚어 가다 보면, 결국 민추협(민주화 추진 협의회)과 민통련에 이르게 된다. 군사 독재 정권에 맞서서 제도화 된 민주화 세력은 민추협을 결성하는데, 김영삼 중심의 상도동계, 김대중 중심의 동교동계의 연합이었다. 한편 재야 민주화 세력들은 문익환, 백기완 등을 중심으로 민통련(민주통일민중연합)을 결성하고, 군사 독재의 종식을 위하여 투쟁하게 된다. 이처럼 민주화 세력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김영삼의 상도동계, 김대중의 동교동계 그리고 재야 세력.

당시 노무현은 부산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영남을 기반으로 한 김영삼의 상도동계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김영삼이 3당 합당을 강행하면서, 노무현은 군사독재 세력과 야합이라고 비판하며 상도동계를 박차고 떠나게 된다. 상도동계를 떠난 후 처음에는 독자 세력으로 활동하다가 결국 김대중을 따라서 동교동계 민주당 계열에서 정치 활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김영삼이 3당 합당으로 다시 태어난 민정당을 장악하고 대통령이 되는 과정 가운데, 제도권의 민주화 세력은 김대중의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3당이 합당한 민정당의 막강한 재력과 조직에 비해서,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세력은 볼품 없었다. 그러한 연유로 전국 단위의 선거를 이기기 위해서 김대중은 인재 영입이 필수적인 상황이었다. 당시 김대중의 동교동계는 호남권에 국한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김대중은 김한길을 중심으로 한 명사들을 영입한다. 이들의 인지도를 이용하여 수도권에서 승리를 가져갈 속셈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김근태를 중심으로 한 학생 운동권 출신들을 영입한다. 이는 훗날 민주당 내 정치 세력인 민평련으로 거듭난다(당시 손학규, 김근태, 조영래가 학생 운동권 트로이카로 불리고 있었는데, 손학규는 영국 유학 후 교수 생활을 하다가 신한국당으로, 조영래는 변호사로서 재야 세력으로 남는다).

따라서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제도권 민주화 세력은 크게 3가지 세력으로 재편된다. 김대중의 동교동계, 김근태의 민평련 그리고 김한길 중심의 수도권 명사 세력. 이러한 세력 구도 가운데 상도동계에서 이탈한 노무현은 민주당의 핵심 세력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노무현은 상도동계 출신이기에 민주당 주류인 동교동계와 정서적 거리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고졸이기에 대학 학번 문화를 따지는 학생 운동권 민평련과도 융화될 수 없었다. 게다가 부산이라는 지역 기반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명사 그룹에도 속할 수 없었다. 이처럼 노무현은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은 철저한 비주류였다.

게다가 김영삼의 인기와 영향력이 절대적인 부산을 기반으로 한 노무현은 거듭 고배를 마신다. 연거푸 패배하면서도 노무현이 계속해서 부산에서 도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부산에서 민주당 계열이 승리할 가능성은 전무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차피 이길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핵심 세력들 중에 나서는 이가 없었다. 따라서 민주당의 부산 지역은 누구라도 신청만 하면 공천은 따놓은 당상인 수준이었다. 따라서 노무현과 부산 친노는 부산 지역의 국회의원 공천을 쉽게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에서 쉽게 공천 받는다고 해서 노무현이 김영삼의 아성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노무현은 번번이 고배를 마시고, 원내에서 멀어진다. 자연스러운 결과로 노무현은 민주당의 중심에서 멀어진다. 

그러나 노무현은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지속적인 도전을 인정 받고,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된다. 그리고 결국 민주당의 대선후보가 되고 극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비주류 중의 비주류가 한 순간에 진보진영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이다. 자연스러운 결과로 노무현을 중심으로 한 부산 친노는 민주당의 주요 세력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사진: 위키트리..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노무현 대통령)
(사진: 위키트리..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노무현 대통령)

 

친노의 약점: 정치력 부재

하지만 친노는 대통령의 계파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을 장악하지 못한다. 먼저 영남을 기반으로 한 친노는 당시 민주당 계열의 불모지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기에, 의원 숫자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원내 장악력이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민주당의 지역적 뿌리인 호남과 정신적 지주인 김대중을 기반으로 한 동교동계가 가진 풀뿌리 지역 조직도 없었다. 왜냐하면 풀뿌리 지역 조직은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조직되는 것인데, 부산 지역에서 당선된 국회의원이 없었던 친노 세력은 그런 종류의 조직을 가질 수 없었다. 풀뿌리 조직은 아직 온라인 선거활동 및 조직이 활성화 되지 않았던 당시에 당내 선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한 이유로 친노는 대중적 인기로 민주당을 대표하는 계파로 급부상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내 세력 구도에서 항상 뒤쳐질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친노 그룹의 목표는 시민이 주도하는 정치, 시민 거버넌스였기 때문에 진보 진영 내부 또는 정당 내부 세력 다툼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시민과 호흡하고 대중의 정서를 읽어내는 능력은 있었으나, 세력 간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고 필요 시에 해야 할 정치적 투쟁을 하는 능력은 부족했다. 한 마디로 세력과 정치력이 턱 없이 부족한 정치 그룹이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친노는 대중적 인기로 민주당을 대표하지만, 진보 진영 세력 내에서 주도권 다툼에서 계속 밀려나게 된다.

동시에 노무현의 친미 실용주의 노선은 전통적인 진보 진영의 정서와 거리가 멀었다. 그는 이라크 파병 및 해군기지 문제에서 친미적 성향을 보였고, 반 기업 정서를 드러내지 않았다(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대체로 진보 진영 내부에서 노무현을 평가하기를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 했다”고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노무현의 핵심 측근인 이광재를 중심으로 한 여시재는 친 삼성 세력이다. 친노는 삼성과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않았다. 게다가 노무현 정부의 전반적인 정책 기조는 보수 세력보다 조금 더 규제를 강화하는 정도일 뿐, 전반적으로 기업에 대하여 적대적이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노무현 정부를 친미 실용주의로 정의하는 것은 결코 과하지 않다). 노무현 정부의 이러한 노선은 진보 세력의 집중 포화를 받는 계기가 된다. 왜냐하면 반미, 재벌개혁이라는 전통적인 진보 진영의 정서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노무현과 친노의 친미 실용주의 노선은 진보 진영 세력을 장악하려는 세력에게 공격할 좋은 명분을 제공한 것이다. 진보 제 세력의 목표는 분명했다. 정치 투쟁에 서투르고 세력 기반이 약한 노무현과 친노를 무너트려서, 진보 세력의 패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 민노당의 전략을 요약하면, ‘주타방은 노무현이다”였다. 주타방은 주요 타겟 방향의 줄임말로서, 노무현 정부와 친노가 주요 공격 대상이라는 뜻이다. 민노당은 노무현 정부와 친노를 친미와 친 재벌로 라벨링한 후에 기득권 세력으로 몰아 세우는 전략을 세웠다. 그렇게 노무현과 친노 세력을 무너트린 후에, 자신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그리고 시민사회 세력은 이라크 파병 및 해군기지 이슈를 가지고 노무현 정부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노무현과 친노 그룹은 진보 진영 내부에 탄탄한 세력 기반도, 투쟁하는 정치력도 없었기 때문에 진보 진영 내부의 이러한 공격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그 결과, 노무현과 친노 그룹은 진보 지지층을 잃어 버리게 된다. 자연스럽게 노무현과 친노 그룹은 몰락을 맞이한다. 물론 보수 언론의 공격도 노무현과 친노의 몰락에 일조 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수 언론의 공격은 상수였고, 애초에 노무현과 친노 그룹을 받쳐주는 지지대가 아니었다. 노무현과 친노가 몰락하게 된 것은 진보 진영의 내부 공격으로 인하여, 기본 토대가 되는 진보 지지층이 와해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후에 친노 친문에게 한 가지 교훈을 제공했다. 진보 진영 내부 패권을 장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진보 진영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 투쟁 역시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교훈은 이후에 문재인과 친문이 먼저 민주당 내부를 장악하고, 운동권과 시민사회를 아우르는데 집중하게 만든다. 그 과정 중에 민주당 내부에 있는 독초인 주사파가 진보 진영 주류에 침투하게 된다(2편에서 계속).

 

김삼열 목사(고신대 신학과 B.A. 고려신학대학원 M.Div, 영국 아버딘 대학교M.Th, 벨기에 루뱅카톨릭 대학교Pre-Doctoral Program, 한울교회 부목사)
김삼열 목사(고신대 신학과 B.A. 고려신학대학원 M.Div, 영국 아버딘 대학교M.Th, 벨기에 루뱅카톨릭 대학교Pre-Doctoral Program, 한울교회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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