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가인은 동생을 지키는 자의 삶을 버리고 오히려 죽였다. 그러나 자기의 생명은 애착을 가진다. 만나는 자가 죽일 것을 두려워하면서 살고 이에 대한 보장을 받았다. 가인은 죄와 원수 된 삶을 통해 얻어야 하는 생명을,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 동쪽에 성을 쌓으면서 얻으려 한다. 자신의 생명을 해치려는 자를 심하게 보복하면서 살아가는 가인과 그 후손들이다. 라멕의 칼의 노래가 이를 말해주었다. 가인의 후손이 추구하는 생명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더 살펴본다.

 

1. 라멕과 에녹의 비교

가인은 성을 쌓았고, 라멕은 성을 중심으로 목축과 음악과 연장을 다루는 공업을 일으키는 자녀들을 두어 인류 문명에 이바지하였다. 성을 통해 자기를 지켰다. 그리고 에덴 동쪽에서 생명나무로 향하는 길을 찾게 된다. 그의 자손들은 자기를 지키고 즐기는 수단으로 목축과 음악과 연장을 만드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기술은 힘이 되고 힘은 자기를 지키는 수단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삶을 지키는 수단은 아니다. 라멕의 노래가 이를 말해준다.

힘을 통해 두 아내를 두고, 자신에게 가한 상처에 대해 소년을 죽음으로 보복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가진 부와 권력을 통해 얻는 특별한 지위를 남용한 결과이다. 인간이 쌓은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지키고 보호하고 생명을 유지하도록 돕는 역할을 포기한 것이 라멕의 노래이다. 자신의 유익과 즐거움 그리고 안전을 위해 다른 것들은 무시되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이렇게 자신의 유익과 생명 그리고 안전을 최고로 여기는 세상을 만들어 가면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한다. 가인의 자손이 만드는 생명의 세계이다.

그러나 에덴 밖에서 찾아야 하는 진짜 생명은 어떤 것인가?

라멕과 비교되는 인물이 에녹이다. 아담의 자녀는 가인과 아벨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기에 아벨 대신에 주어진 자가 셋이었다. 가인의 6대손이 라멕이고(4:16-8), 셋의 6대손이 에녹이다(5:6-20). 두 사람의 삶은 대조적으로 보인다.

라멕은 세상에서 문명을 일구고 그것을 기초로 힘과 권력을 가진 인물로 등장한다. 두 아내를 두고, 자신에게 해를 끼친 자를 죽음으로 보복할 수 있는 권력자이다. 기술을 기초하여 힘과 권력을 가진 권력자가 추구한 삶의 실체가 생명이다. 다른 사람의 희생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지키는 자이다. 나아가 생명나무의 길도 찾는 자이었다.

반면에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아벨 대신에 아담에게 주신 아들 셋의 6대손인 에녹이 소개된다. 에녹도 므두셀라와 같은 자녀를 낳고 삼백 년을 지내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다(5:22).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녀를 낳았다. 자녀를 얻는 일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과 괴리되지 않았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중에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가셨다. 그래서 그가 (세상에) 있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이 데리고 갔다는 말이 무엇인가? 5:24절을 직역하면 이렇다.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걸었고(동행했고) 하나님이 그를 취하였기에 그는 (세상에) 없었다.

하나님과 동행한 삶을 살면서 그 결과 하나님이 그를 취하였다. 하나님이 데려간 것 즉 취한 것이 죽음인가? 5장은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에게 찾아온 죽음을 언급한다. 아담도 930세를 살고 죽었다. 그리고 이후 모든 아담의 자손들이 오래 살았지만 죽었다. 그런데 에녹만 죽었다는 말이 없다. 300세까지 살았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에녹 이후에 그 아들 므두셀라도 가장 오래 살았다는 969세의 나이를 언급하지만, 그도 죽었다(5:27). 하나님이 에녹의 죽음만을 표시할 때 별도로 "데려갔다"는 단어를 사용할 리가 없다.

에녹에 대한 기록을 히브리서 기자가 언급하였다. 11:5절이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으니라.

옮겨지지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진 사람이다. 죽음 없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하나님과 동행한 삶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증거를 가진 삶이라고 풀어쓴다.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인가? 히브리서 기자는 6절에서 계속 말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동행하는 삶은 하나님이 계시고, 그를 찾는 삶을 사는 것이다. 찾는다는 것은 기도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 기도하는 삶이 믿음으로 사는 삶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고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유다서는 그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찾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좀 더 밝히고 있다.

유다서는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무리를 말한다(1:4).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인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꾼 자들이다(1:4). 이런 자들을 구약의 다른 무리들과 비교해서 설명한다. 출애굽 했지만 믿지 않았던 출애굽 일 세대들과 비교한다(1:5).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도시들을 따라 같은 행동으로 음란과 육체를 따라 살다가 망한 자들이다. 가인의 길과 바람의 어그러진 길, 고라의 패역을 따라 산 사람들이다(11). 이런 류의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며, 그 정욕대로 행하며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해 아첨하는 자이다(16). 이런 종류의 무리들을 자기 시대에 정죄하기 위해 에녹이 예언을 하였다(14). 주께서 뭇사람을 심판하시는데,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행하는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불경건한 자들이 행한 모든 완악한 말을 정죄하신다는 예언이다.

유다서의 표현을 정리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세상의 경건하지 않은 삶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예언으로 선포한 사람이 에녹이다. 에녹은 비록 가인의 자손 라멕과 같은 이들이 기술을 바탕으로 힘과 권력을 축적하여 두 아내와 살인과 신성모독을 하는 칼의 노래를 부르는 시대를 정죄하는 믿음의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자기의 시대가 불경건하다고 판단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삶을 살고 기도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실체이다.

에녹은 죄와 원수 된 삶을 살면서 세속에 속한 삶을 즐기기보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 거기에 참된 생명과 기쁨과 위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에녹은 그 결과 죽음을 극복하였다. 죽음을 이기는 생명은 세상의 기술이나 힘과 권력으로 이루는 라멕의 삶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죄를 멀리하는 살,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돕는 삶을 사는 에녹과 같은 사람에게서 발견된다. 에덴 밖에서도 생명이 있음을 에녹은 말해준다.

유다는 정죄를 받는 무리들의 특징을 이렇게 덧붙였다. 몰래 들어온 그들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버린 자들인데, 그들이 함께 성찬 상에 앉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애찬의 암초이다. 그리고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이다. 이는 구약 시대에 거짓 목자들이 백성들을 학대하고 죽이고 포로가 되게 한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힘과 권력을 통해 자기 몸만 챙기는 목자들이 바로 에녹이 정죄한 불경건한 사람들의 특징이다.

자기의 생명만 소중하고 자기가 먹는 것만 챙기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무시하고 죽이고 폭력을 일삼는 라멕을 정죄하는 삶이 에녹이 걸어간 삶이고 그 결과가 바로 생명이었다. 죽음을 보지 않고 누리는 에덴 밖의 생명나무 열매를 먹은 것이다.

라멕의 칼의 노래는 생명을 힘과 폭력으로 얻으려고 했지만 반대로 아담의 다른 칠 대손은(1:14) 거룩한 구별된 경건한 삶, 약속과 기도를 통해 죄와 원수되는 삶을 살았고 나아가 서로 돕는 세상을 위해 경작하고 지키는 삶을 살았다. 거기에 생명나무의 열매인 생명이 주어졌다.

 

2. 라멕의 노래와 셋의 찬송

에녹은 셋의 후손이다. 가인이 성을 쌓고 자신의 후손이 힘과 권력을 기르고 있는 동안에 셋과 그의 자손은 무엇을 하였는가? 무엇을 하였기에 앞서 살펴본 에녹과 같은 경건한 자손을 얻을 수 있었는가?

셋도 자녀를 낳는 삶을 살았다. 에노스를 낳았다. 셋과 에노스의 시대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한다.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여호와의 이름도 불렀다.

가인의 자손을 설명하는 창4:16-24절에는 오직 자녀들의 이름만을 부르고 있다. 가인이 성을 쌓고 아들의 이름으로 에녹이라 하였다. 그리고 라멕의 두 아내의 이름 아다와 씰라가 있다. 그리고 그들이 낳은 세 아들의 이름이 언급된다. 야발, 유발, 두발가인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 오직 사람의 이름만이 불린다.

가인의 자손과 셋 자손의 차이점은 분명하다. 사람들의 이름만이 있는 곳이 가인의 자손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 그러나 셋의 자손에게는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도 불리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동시에 불린다. 자녀를 낳는 것이 생명이다. 이 생명에 뱀과 원수 된 삶이 가능하다. 여기에 뱀과 원수 된 삶을 위한 생명임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모든 신앙 행위의 총체이다. 실체로 구약 시대나 신약시대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 이름을 가지고 언약을 맺고 맹세를 하고 그 이름으로 제사를 드리고 축복을 받는다. 신약시대에도 그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직분을 임명하고 축복을 한다. 교회가 세워진다. 성경의 모든 신앙 행위는 오직 그 이름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그들이 셋의 자손들이다. 이들은 가인의 후손들이 걸어간 인간들만의 세상을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칼의 노래를 정죄하는 에녹과 같은 경건한 자들이 등장하여 생명나무의 열매인 참된 생명을 얻었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찬송이다. 자신의 삶은 자녀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연속된다. 어떤 종류의 삶을 살았는지는 모른다. 셋의 자손이라고 농사를 하지 않고 사는 방식이 가능하겠는가? 목축을 하지 않았을까? 음악을 할 줄 모르는가? 연장을 사용할 줄 모르는 바보들인가? 모든 가능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관심의 핵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삶이다. 하나님을 중심해서 힘과 권력을 통한 억압과 살인이 아니라 서로 돕고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고 위로가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에녹의 자손 중에 라멕(위로)이 있고 노아가 있다. 서로 돕는 세상, 서로를 지키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삶의 실체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삶의 실체이다. 힘과 권력을 가지고 섬기는 삶, 지키는 삶을 살아가는 무리들이 셋의 후손이며 에노스의 무리들이다.

 

3. 천지 역사의 결론으로서 에노스

2:4부터 시작된 천지의 역사(토레도트)가 에노스를 소개함으로 결론에 이른다. 생명나무의 열매인 생명을 잃어버린 타락한 세계가 어떻게 에덴 밖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에덴 밖에서 기술의 발전을 통한 힘과 권력 그리고 부의 축적에만 관심을 가지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면서 함께 사는 세상, 다른 사람의 먹거리를 지키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무리들에게 생명은 열매를 맺는다. 죄와 원수된 삶을 유지하는 길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용서를 누리고 다른 사람의 부족과 결핍을 함께 도우면서 채우는 삶을 살아가는 지키는 삶을 살 때 생명을 누리게 된다.

가인은 생명나무 가까이에 성을 세우면서 생명을 추구하지만 참된 생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진정한 생명을 위한 삶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경건하고 서로 돕는 삶을 사는 길에 있다. 샬롬

 

※창1-4장까지의 긴 여행을 먹거리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다음부터는 창36장 에서의 역사로부터 시작해서 야곱의 역사로 건너뛸 것이다. 요셉과 먹을 것의 관계를 중심으로 창세기의 핵심 과제인 악과 선의 문제를 살펴보려고 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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