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질문하면서, 경작하며 지키는 자의 역할을 포기하였다. 다른 사람의 먹거리와 삶을 지키는 자로서 역할을 하지 않았다. 지키는 역할을 잃어버린 자의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았다. 동생 아벨을 지키는 대신에 죽인 일에 대한 죄와 저주가 주어진다.

 

1.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가인이 죽인 아벨의 피가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호소를 한다. 피의 보복을 요청함이다. 비록 의인이라 하더라도 그의 피가 자신을 죽인 형을 품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보복을 요청한다. 그 결과 하나님이 가인의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땅이 피를 받았기에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11). 구체적으로 밭이 효력을 내지 않고 땅에서 피하여 유리방황하는 자가 될 것이다(12).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다. 그런데 땀을 흘려야 할 곳에 남의 피를 흘렸다. 그 결과 땅에서 저주를 받는다. 자신의 생업과 삶의 자리를 상실한 것이다. 더 이상 농사를 지어도 땅이 열매를 내지 않는다. 당연히 농사짓는 땅에서 떠나야 하고, 먹을 것을 찾아서 방황하게 될 것이다.

땅에서 농사짓던 가인이 자기의 것만을 챙기면서 사는 삶을 살다가 결국 땅이 자신을 쫓아내는 상황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사는 방식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서로 돕는 이로 살아가야 한다. 서로의 소산을 가지고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삶을 살아 내어야 한다. 그것이 서로의 삶을 살리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돕는 자의 삶을 파괴하는 것은 서로의 삶을 해치는 것이다. 살인, 도둑질, 간음, 거짓 증거와 같은 것들은 상대방의 삶을 해치는 삶의 형태이다. 타인의 삶을 지킬 때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길이 열린다.

 

2. 내 죄벌이 너무 무겁습니다.

가인이 땅에서 저주받으므로 땅이 효력을 내지 않는 사실을 이렇게 이해한다.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 하리니. 주의 낯을 대한다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땅이 소산을 내지 않으니 제사드릴 것도 없다. 제사와 하나님의 얼굴빛이 비추는 은혜와 같이 간다.

실제로 제사장의 축복에서(6:23-5) 여호와께서 얼굴을 드시고 비추시면서 은혜와 평강을 주신다. 이것을 형상화한 것이 성막의 가구 배치이다. 성소에 등잔이 떡상을 비추는 형상이다. 여호와의 얼굴빛이 떡상을 비추는 것은 일용할 양식에 비추는 것이다. 떡상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새롭게 들여놓는 진설병이 놓여있다. 진설병은 2/10에바 즉 2오멜의 가루로 만든 떡이다. 이것은 만나로 하면 제 6일의 떡이다. 안식일 전에 안식일의 몫을 포함한 이틀 치의 만나와 같다.

진설병은 안식일을 중심으로 한 삶의 일용할 양식이다. 하나님의 얼굴빛인 은혜가 비춤으로 안식이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고백이며 선언이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축복이다. 샬롬의 평화는 하나님의 얼굴빛이 비추는 가운데 먹을 것이 주어지며 삶의 안식을 누리고, 동시에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먹을 것을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삶의 보장이다.

가인은 이런 삶이 단절된 현실을 말한다. 여호와의 얼굴빛을 대면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일용할 양식이 끊어지고, 하나님께도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가혹한 현실이 됨이다. 그래서 양식을 구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방황해야 하는 현실이 가혹하다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나아가 먹을 것을 찾고 구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을 만나는 자가 자신에게 보복하여 죽일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먹을 것이 나지 않는 것에다가 동생을 죽인 일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는 가인이다. 남의 먹을 것을 잘 나누고 다른 사람의 삶을 지키는 것을 포기한 자의 두려움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지면서 왜 다른 사람을 죽이는가? 어떤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남을 죽이기까지 하는가? 미움이 얼마나 컸으면 동생을 죽이기까지 하는가? 지키기를 포기하는 삶이 만들어내는 비참이다.

에덴에서 주어진 삶의 과제 경작하고 지키는 돕는 이로서 사는 삶이 자신의 삶에 먹을 것을 공급하고 삶을 지키는 길이 된다. 가인의 두려움은 에덴에서 주신 말씀을 거절한 결과로 온 것이다.

 

3. 다시 주어지는 기회

가인이 호소하는 죄벌이 너무 중하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다시 한번 가인에게 기회를 주신다. 기회는 만나는 자가 가인을 죽이는 것을 막아주신다. 가인을 죽이는 자가 있으면 벌이 칠배가 더하겠다고 하면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가인을 죽지 않도록 하신다.

어떤 종류의 표인지 알지 못한다. 가인을 보면 알 수 있는 어떤 종류의 표일 것이다. 먼저 가인이 호소한 죄벌이 중하다는 주장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부분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부분적으로는 인정한 셈이다. 땅이 저주를 받아서 효력을 내지 않고 가인이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선언에 대해서는 유보가 없다. 그러나 가인이 스스로 생각한 보복에 대해서 하나님은 아니라고 답변하신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땅이 저주를 받아 소산을 내지 않고 먹을 것을 찾아 방황하는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아벨이나 가족들)의 필요를 채우는 삶을 살지 않은 것을 깨닫고 살아가야 함을 말씀한 것이다. 결코 가인의 생명을 해치려는 뜻으로 하신 것은 아니다. 저주라는 것은 저주를 깨닫고 왜 자신이 저주를 받았는지를 잘 살피면 다시 저주의 상황을 돌이켜 복의 상황으로 반전이 가능하다.

앞서 아담과 그 아내 여자에게 주신 저주의 내용이 그러하다. 땀을 흘리는 수고를 통해 먹을 것을 얻고 아내와 가족을 먹여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또한 아이를 낳는 해산의 수고를 통해서 생명의 기쁨을 얻는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일에 대해서는 서로 갈등을 하면서 선하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먹을 것에 욕심을 내지 않고, 자녀에 대한 탐욕을 거두어서 서로를 돕는 이로 사는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한다. 그렇게 살면 새로운 소망의 씨가 뱀의 머리를 밟고 생명을 누리게 하는 때를 누리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는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을 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의도한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아벨은 죽임으로 끝을 내었던 방식으로 하나님과 세상과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주를 통해서 가인이 원래 주어진 과제 경작하고 지키는 돕는 이로 사는 삶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얼굴빛을 누리고 사는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 다시 제사가 열납되는 삶을 살도록 권고하시는 인자하심을 보이시는 것이 저주의 실체이다. 저주는 다시 주어지는 기회이며 은혜이다.

하나님은 가인이 염려하는 것은 지나친 것임을 확인하신다. 그렇지 않다. 땅이 저주 받음을 통해 방황하면서 타인을 생각하고 남의 먹거리를 지키는 삶을 살아라. 그러면 다시 하나님에게 열납되는 삶을 살수 있다. 그래서 살인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한 강한 부정과 근거로서 표를 주신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가인의 후손은 이 기회를 악용하여 더 큰 살인을 저지르고 이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만든다(4:24)

가인에게 주어진 땅이 저주를 받음으로 먹을 것을 찾기 힘든 상태는 아담에게 주어진 수고의 땀을 흘리는 것과 가시와 엉겅퀴를 헤치며 먹을 것을 경작해야 하는 삶과 다르지 않다. 사실 3-4장의 내용은 대칭이 된다. 수고의 땀과 노력을 통해 얻어진 것에 타인의 몫을 기억하면서 사는 삶을 사는 것이 지키는 삶의 실체이고 하나님의 얼굴 빛을 구하는 자의 모습이다.

다음은 가인과 가인의 후손에 대한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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