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가인은 동생 아벨을 지키는 자의 삶을 포기하였다. 경작하고 지키는 삶을 버린 가인에게 하나님은 계속해서 기회를 주신다. 비록 땅에서 저주를 받고 유리방황하지만, 고난을 통해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삶을 살아야 함을 요청한다. 그러나 가인과 그 후손은 이를 지속적으로 거절한다.

 

1. 가인은 왜 에덴의 동쪽에 성을 쌓고 거주하였는가?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가인이 에녹을 낳는다. 그리고 성을 쌓고 아들의 이름으로 그 성을 에녹이라 부른다(16-7). 여호와 앞에 떠난 것과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는 것은 평행이다. 왜 에덴 동쪽인가?

가인이 정착한 에덴 동쪽은(קדמת־עדן)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그룹들과 화염검이 있는 곳과 비교된다. 에덴동산 동쪽이다(מקדם לגן־עדן). 에덴 동쪽은 생명나무의 길이 있는 곳이다. 가인은 자신의 죄벌이 너무 무겁다고 했다(13). 주의 얼굴로부터 가인이 숨겨진다고 주장하면서 그 결과 만나는 자들이 자기를 죽일 것이라고 했다(4:14).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숨겨진 자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안식이 변했다는 말과 같다(4:5).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될 경우 자신이 살인을 당할 것을 염려했다. 이런 가인이 에덴 동쪽에 성을 쌓고 정착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먼저 성을 쌓음으로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한 것이다. 소극적인 행동으로 자기방어이다. 가인은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떠났다(16). 즉 스스로 자기 삶을 지키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을 의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자기의 생명을 성을 쌓아서 방어한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길은 에덴 동쪽이 말을 한다. 생명나무의 길을 노린다. 에덴의 생명나무를 따먹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선악과를 따 먹은 결과 생명나무를 먹는 것이 단절되었다. 그러나 가인은 죽음을 성으로 보호하고 나아가 생명을 얻는 일을 위해 생명나무에 접근하는 시도를 한다. 에덴 안으로 가려고 한다.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가능한지는 알지 못한다. 그룹들과 화염검이 있기에 성공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에덴 밖에서도 생명을 찾는 길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수고하고 지키는 삶을 에덴 밖에서도 살아내면 거기에 생명이 있다. 그런데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방식을 통해서 생명을 찾는 것은 잘못된 방식이다.

선악과를 따 먹지 않음으로 남의 먹거리를 지키는 삶을 사는 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이다. 함께 서로 돕는 삶을 사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에덴에서 실패한 인생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에덴 밖에서 주셨다. 뱀과 원수되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 갈등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면 거기서 생명이 다시 주어진다.

가인은 자신의 생명을 해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성을 쌓아 강력하게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참된 생명을 누리는 삶은 살지 못했다. 그와 그의 후손들의 삶이 증거한다. 생명은 생명을 주신 자의 뜻을 반영하는 것에서 발견된다. 서로를 돕고 세우는 삶을 사는 것이 생명이다. 수고하면서 지키는 삶을 사는 것이 생명이다. 이것을 행하기 위해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바로 은혜이다. 은혜가 생명을 얻는 지름길이다. 그런데 가인은 이것을 버리고 스스로가 자기를 지키는 삶을 선택했다.

 

2. 가인의 후손들과 문명의 발전

가인의 후손들 가운데 라멕에게 주의를 집중한다. 라멕은 두 아내를 맞이했다. 아다와 씰라이다. 그리고 각기 자녀들을 낳았다. 아다는 야발과 유발을 낳았다. 씰라는 두발가인과 그의 누이 나아마를 낳았다. 자녀들은 유명한 자들이 되었다. 야발은 가축 치는 자의 조상이고, 유발은 악기를 다루는 자의 조상이고,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기구를 만드는 자가 되었다. 목축과 음악과 기구를 만드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다. 소위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다.

성에 거주하면서 안전을 도모하고, 그리고 땅에서 나는 곡식이 아닌 삶의 방식을 추구한 결과이다. 가인은 원래 농사를 지었던 자이지만 이제는 목축과 음악과 기구를 만들어서 필요를 해결하였다. 이런 삶은 두 아내를 가질만큼 윤택한 삶을 가져다주었다. 여러 아내를 둘 수 있는 것은 모두 경제적인 능력과 관련된다. 소위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킨 가인의 후손들이 이런 힘을 가지고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았는가를 보아야 한다. 라멕이 부른 노래를 통해서 알 수 있다.

 

3. 라멕의 노래

라멕의 노래는 먼저 두 아내를 자랑하는 병행하는 두 행이 나온다. 자신의 경제력과 힘을 과시하는 선언이다.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그리고 이어서 라멕이 살인을 정당하게 된 사건을 말한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소년으로 인해서 죽음으로 응징했다고 말한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살인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자신에게 상처와 상함을 준 것이다. 그래서 소년을 죽여서 응징했다. 소년은 라멕의 집에서 일하는 종과 같은 존재이다. 상처와 상함은 찰과상과 같은 상처를 말한다. 중한 상처일 수도 있지만, 타격에 의한 멍과 같은 상처이다. 이것을 가지고 죽음으로 되갚아 주었다. 소년이 일을 하다가 실수로 라멕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보인다. 그런데 이것을 죽음으로 보복하는 것은 보복법과도 다른 결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것은 손실을 입은 만큼만 보복하도록 하는 법이다. 물론 함무라비 법전과 같은 곳에서는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는 해당되지 않는다. 같은 등급의 류에서 통용되는 것이 보복법이다. 종이 해를 입히면 죽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라멕은 자신에게 해를 끼친 소년을 죽음으로 응징하며 다스린다.

가인의 집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짓누르고 있다. 생명을 육체 생명의 번성과 문명의 발전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것들을 통해 함께 사는 세상, 서로 돕는 세상을 만든 것 같지 않다. 두 명의 아내를 두었다는 것은 힘이 지배하는 세상을 말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자는 받은 것 이상 죽음으로 최대치로 돌려준다. 아벨이 가인의 삶을 불편하게 했다는 이유로 죽인 것과 다르지 않다. 서로를 지키는 자로 사는 것을 포기한 것처럼, 라멕은 소년의 삶을 지키고 돕는 자가 아니라 죽이는 자가 되었다. 자기의 안전을 위한 희생양으로 삼았다.

이렇게 해를 끼친 것보다 훨씬 더 크게 응징하는 근거가 무엇일까? 바로 세 번째 행에 나온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가인을 헤치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표를 주어 보증했다. 그런데 이것을 이용해서 라멕은 더 위대한 자이기 때문에 자신을 해치는 자는 벌이 칠십칠 배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해를 가한 소년을 죽일 수 있었다고 노래한다. 가인을 해치는 자에게 주는 칠 배의 벌에 대한 경고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표시, 다시금 삶을 유지하고 생명을 보존하는 기회를 통해서 죄와 원수가 되는 삶을 살고, 나아가 다른 사람을 돕는 이가 되라는 수고하고 지키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라는 권면이다. 그런데 라멕은 이것을 통해서 죄를 더욱 저지르고 있다. 가인의 중요성보다 더 큰 성과를 이룬 자신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자신을 해치는 자는 더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죽음이다.

성과와 업적에 의해서 사람의 가치가 정해지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우리는 모두 서로를 향해서 서로 돕는 이가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에덴 밖이지만 서로의 수고와 지킴의 목적이다. 그런데 성취와 힘의 독점, 계층의 분화와 권력의 양극화를 통해서 힘이 강한 자가 수고하는 약한 자를 지배하고 윽박질하고 억압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짓밟는 행위를 한다.

무엇보다 라멕의 노래는 노래되었다는 것이 더 문제이다. 공개적이기 때문이다. 두 아내를 가졌다는 사실과 자신을 해치는 자에게 죽음으로 응징하는 일에 대한 당당함 그리고 이것에 대한 신적인 명분인 이데올로기까지 주장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당당하기 위해서는 이념적 배경이 있어야 한다. 이념이 지배하는 세상은 형제자매도 없고 부모도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간다.

가인의 노래는 경제력과 정치력 등 힘을 기반으로 한 성(도시)의 문화가 만들어내는 비참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 추구하는 문명과 삶의 결과들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없고 그의 은혜를 구하고 찬송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아벨 대신에 주신 셋의 자손들은 다른 삶을 산다.

다음은 아담으로부터 가인의 7대손 라멕과 셋의 7대손 에녹의 대조를 통해 생명이 무엇인지를 살핀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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