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서대연 기자 = 20일 오후 한 어린이가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현장에 마련된 추모공간을 방문하고 있다. 2022.11.20/ 코닷-연합 제휴 재사용 금지
(서울=연합뉴스) 서대연 기자 = 20일 오후 한 어린이가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현장에 마련된 추모공간을 방문하고 있다. 2022.11.20/ 코닷-연합 제휴 재사용 금지

하나님의 느슨한 연대, 기다림

    사사기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각기 그들의 소견의 옳은대로 행하니라는 한 문장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사기 전체를 요약할 뿐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베냐민 지파의 역사 전체를 요약하기도 합니다. 이 한 구절을 통해서 사사기 전체와 베냐민 지파 역사를 통째로 묵상할 수 있다는거죠. 그리고 사사기의 이스라엘과 베냐민 지파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묵상할 수 있다는거죠. 저희는 이 한 구절을 깊이 묵상함으로서 사사기와 베냐민 지파 역사에 흐르는 하나님의 태도, 특히 방황하는 언약 백성들을 향한 태도가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각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다”는 말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제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이스라엘을 통제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가르치려고도 하지 않으시는거죠. 철저하게 내버려 두시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적으로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고통이 극한에 이르러서 부르짖을 때, 개입하셔서 사사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거든요. 그들이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는 계시는거죠. 다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자기 소견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돌아올 적정한 때가 이를 때까지 강력하게 잡아당기지 않고 계시는 겁니다. 그들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신 채, 적당한 거리에서 지켜보고 계시는 겁니다. 

    완전히 버리신 것은 아니나 적극적으로도 개입하지는 않으시는 상태, 즉 이스라엘과 느슨한 연대를 구축하고 그들이 바른 길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강한 손으로 억지로 돌이키는 대신에,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고만 계신 것이죠. 또는 방황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어떤 말도 하지 않으시고,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이 보이는 정도의 거리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방황하는 이스라엘과 동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각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니라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특정한 모드를 표현하는 구절인 겁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방황할 시간을 충분하게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셨던 겁니다. 방황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어떤 말과 교훈도 먹히지 않을 것임을. 지금은 내버려 두는 것이 최선임을 말입니다. 방황하는 이들에게는 자신의 분노와 억울함, 세상을 향한 불만과 배신감 이외에는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거든요. 아무도 자신에게 공감할 수 없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죠.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오만함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거든요. 또는 지금 자신이 좇고 있는 욕망과 쾌락이 너무 좋기 때문에 그 이외에 다른 것들은 전혀 원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욕망을 멈출 수 없습니다. 돌이킬 수 없습니다. 설득하려 들수록, 훈계할수록, 억지로 돌이키려 할 수록 반감만 커질 뿐이죠. 더 엇나가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방황에도 기한이 있습니다. 방황할만큼 하고나면, 차오르는 분노와 억울함, 배신감 등이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하죠. 분노를 표출하고, 억울함을 가지고 소리 지르고, 배신감에 떨면서 이리저리 충돌하면서 방황하다 보면 힘이 빠지고 난 후에야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담담하게 타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방황의 기한이 다 찬 후에야, 끓어오르는 욕망이 가라앉고 차분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연유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애타게 부르고 찾으면 닿을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서 변하지 않는 그 모습 그대로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방황이 끝나고 담담하고 차분하게 이스라엘 자신들의 과오를 돌아볼 수 있을 때까지 말이죠. 

    그제서야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테니까요.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각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니라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해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내버려 두고 지켜보는 수 밖에는,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는 수 밖에 없는, 그것이 최선인 상황에서 느끼는 하나님의 극도의 답답함을 표현한 구절이라고 말이죠. 

 

베냐민 지파의 부활

     하나님께서는 그 답답함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셨는지 알기 위해서는 사사기 종반부에서 시작되어서 사도 바울에게서 결론이 난 베냐민 지파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사기 19-21장은 베냐민 지파가 악행을 저지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레위인이 집을 나간 첩을 다시 데리고 오는 길에 베냐민 지파의 땅인 기브아에서 만난 노인의 집에서 유숙하게 됩니다. 이를 알게된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노인의 집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다가, 결국 레위인의 첩을 밤새 능욕하고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레위인은 자신의 첩의 시체를 열 두 조각 내어서 이스라엘 온 지파에 보내면서,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 사람들의 만행을 알립니다. 이를 알게된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를 응징하기로 결정하고 군사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결국 베냐민 지파 패잔병 600명을 제외하고 모조리 도륙해버리게 됩니다. 베냐민 지파는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역사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하고 말죠. 

     이후에 사울에 의해서 베냐민 지파는 부활합니다. 가장 미약한 베냐민 지파에서 온 이스라엘의 왕이 나왔으니까요. 하지만 사울의 죽음으로 인하여 베냐민 지파는 다시 퇴보하고 맙니다. 타락으로 인하여 몰락한 왕, 적에게 패배해서 죽은 왕의 일족이 되어버린거죠. 그리고 왕권은 다윗에게 넘어가 버립니다. 베냐민 지파는 다시 몰락한 겁니다. 모르드개에게 이르러 베냐민 지파는 회복의 서막을 보게 됩니다. 베냐민 지파인 모르드개는 아각사람 하만을 대적합니다. 아각사람이란 표현은 아말렉의 후손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왕으로서 사울이 대적했던 그 아말렉 말입니다. 모르드개는 사울의 역할을 대신한 겁니다. 의로운 모르드개가 아각사람 하만을 대적함으로서, 아말렉을 대적했던 의로운 왕 사울이 부활한 겁니다. 베냐민 지파는 다시 이스라엘에서 의미있는 존재로 부각되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에 이르러 베냐민 지파는 다시 방황합니다. 아시다시피 바울은 베냐민 지파 사람입니다. 의미심장한 것은 바울은 몰락한 베냐민 지파의 왕 사울과 동명이인이라는거죠. 사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실패한 사울 왕의 전철을 다시 밟는겁니다. 그랬던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된 것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악을 행하던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바울로 거듭난 겁니다. 베냐민 지파의 방황, 사울의 방황이 드디어 끝난 것이죠. 하나님에게로 돌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사사기 후반부에 시작되어서 바울에게서 절정에 달한 베냐민 지파의 역사를 봅니다. 아주 오랜시간 방황하던 베냐민 지파를 말없이 기다려 주셨던 하나님을 보는 겁니다. 

    베냐민 지파의 그릇된 욕망과 폭력성이 모두 가라앉을 때까지, 다윗을 향한 사울의 질투, 왕위를 빼앗길까 하는 두려움이 모두 가실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바울의 그릇된 열심이 식어갈 때까지, 베냐민 지파를 채우고 있던 그 모든 그릇되고 부정적인 것들이 옅어질 때까지, 그래서 바울이 과거 자신의 악행을 돌아보며 회개할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베냐민 지파를 향하여 아무 것도 행하지 않으신 채 그저 때가 이르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구축해야 할 연대

    하나님의 모습에서 방황하는 이들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발견합니다. 그들을 방황하게 만들었던 내면에 들끓는 부정적인 모든 것들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 시간이 얼마나 오래걸리든지 간에 도움의 손길이 닿을 수 있는 멀지 않은 곳에서 묵묵히 지켜봐주는 겁니다. 기다려주면 되는 겁니다. 

    방황과 슬픔의 시간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모든 것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므로. 그제서야 모든 것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대하기 시작할테니까. 자신만의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할 것이므로. 그제서야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조금씩 납득되기 시작할 시점이니까. 그제서야 우리가 의미있는 대화와 소통이 가능해질테니까요. 그제서야 자신의 그릇된 행위와 삶에 대해서 반성할 수 있게 될테니까요. 그 시간이 이르기 전에 어떤 말과 행동도 소용없을테니까, 내버려두고 지켜봐주는 것이 최선인 겁니다. 오래 걸릴지 모르지만, 그 때는 반드시 옵니다. 그 때가 올거라고 신뢰하고 기약없는 기다림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입니다. 방황할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완전히 떠나지는 말고서. 그들이 희미하게 감각할 수 있는 지점에서 어떤 말과 끌어당김 없이 그냥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한이 다 찰 때까지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방황하는 이들과 구축해야 할 느슨한 연대의 모습입니다. 적극적인 협력과 소통만이 연대가 아닙니다. 위로와 공감의 눈물을 흘려주는 것만이 연대가 아닙니다. 기나긴 침묵 속에서 기다리는 것 또한 연대입니다. 어쩌면 가장 거룩한 연대일지도 모르죠. 하나님께서 가장 오랜 시간 동안 하신 연대의 모양이니까요. 그리고 가장 어려운 형태의 연대이기도 합니다. 같이 우는 것은 쉽습니다. 위로의 말을 던지는 것도 쉽습니다. 기도할게라는 의미 없는 말을 던지는 것도 쉽습니다. 같이 분노하는 것은 더더욱 쉽습니다.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기약없이 기다리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겁니다. 말 없이 똑같은 자리에서 기다리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연대를 요구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의 눈물이 그들의 눈물을 가리지 못하게 하라

     이태원 참사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그들과 맺어야 할 연대는 옆에서 큰 소리로 우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우리가 잘못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이러한 시끄러운 방식의 연대는 극한의 고통에 있는 희생자들의 분노만 유발할지도 모른다고. 당사자가 감당하고 있는 고통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자가 제공하는 위로와 공감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내뱉는 소음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도리어 자신의 아픔을 이슈로 삼는다는 분노만 유발할지도 모른다고. 뿐만 아니라 지금은 그들의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진정어린 위로와 공감을 건넨다고 하더라도, 느껴지지 않는다는거죠. 

    그러므로 지금은 우리가 어떤 위로와 공감을 제공할까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위로와 공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우리의 내면의 동기와 욕구를 들여다 보아야 할 시간입니다. 어쩌면 자신의 죄책감을 달래고자 하는 퍼포먼스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으로 내가 할 도리를 다했다는 충족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사실은 우리는 그들에게 공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나는 사회적 이슈에 민감해." "공감능력 뛰어나." "우리의 잘못을 인지하고 있는 의식있는 사람이야." 라며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한 용도로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위로와 공감의 말들은 사실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함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설사 의식하고 한 행동이 아닐지라도 내면의 동기와 본질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는 겁니다.  

    적절한 반응은 우리의 감정은 최대한 억제한 채로, 모든 종류의 표현을 극도로 자제한 채로, 그들이 마음껏 슬퍼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기한이 이를 때까지 그들이 마음껏 아파할 시간과 공간을 허락해주는 것입니다. 이 시간과 이 자리에서 그들의 비명과 울음소리만이 들리도록. 온전히 그들만의 슬픔의 시간과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우리가 우는 소리에 그들의 아우성과 비명이 묻히게 하지 마십시오. 이 사태가 누구의 책임이냐는 우리의 책임공방에 그들의 슬픔이 묻히게 하지 마십시오. 누구 잘못인지 원인을 따지는 질문을 중단하십시오. 이 시간과 이 자리가 우리의 책임공방의 토론의 장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반성하는 목소리도 극도로 낮추십시오. 남의 초상집에서 내 잘못입니다 라며 상주보다 목소리 높여 우는 이상한 모습이 되지 않도록.  

    온전히 그들의 슬픔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우리의 슬픔은 제쳐두는 성숙함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도 교회에서도 그들의 울음소리가 아닌 목소리들이 너무 큽니다. 타인의 슬픔이 과도하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 안타까우셨던 분입니다. 누구보다 많이 우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목소리가 그들의 울음과 비명을 덮지 않도록 침묵을 지키셨던 분입니다. 먼발치에 서서 지켜보기만 하셨던 분입니다. 이번에도 슬픔과 고통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리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마음껏 슬퍼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할 때 입니다. 

 

(서울=연합뉴스) 서대연 기자 = 2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 거리가 한산하다. 2022.11.20/ 코닷-연합 제휴 재사용 금지
(서울=연합뉴스) 서대연 기자 = 2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 거리가 한산하다. 2022.11.20/ 코닷-연합 제휴 재사용 금지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을거야

    장례식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유족들에게 마음껏 슬퍼할 시간과 공간을 공식적으로 마련해주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나서 일상으로 돌아오라는거죠. 그렇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건네야 할 위로는 조금 다른 종류의 것입니다. “네가 보내야 할 고통과 슬픔의 시간을 다 보내고 와라. 우린 여전히 이 자리에 있다. 끝까지 너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을테니까.” 각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게 내버려두신 하나님의 마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묵상해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소개하려 합니다. 불과 17세에 불과한 소년은 세상을 잃은 것만 같습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사랑을 잃었거든요. 슬픈 음악이 흘러 나오면서, 카메라는 소년에게 집중합니다. 그런데 슬픈 음악과 눈물을 흘리는 소년 사이로 식사를 준비하는 달그락 거리는 소리, 그리고 소년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 들어옵니다. 소년의 일생일대의 아픔과 무관하게 이 세상은 원래대로 흘러가고 있다는거죠. 다른 이들은 자신의 일상을 살고 있다는거죠. 그리고 소년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는 의미하는 바가 있죠. “네 마음은 부서지고 있지만 네가 돌아올 일상은 부서지지 않았단다. 언제든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렴. 우린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같은 자리에 있을테니까” 언제까지나 슬픔과 고통에 빠져 있을 수만 없는 인생, 언젠가는 반드시 원래 살아가던 일상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인간이란 존재를 향한 최고의 배려인거죠. 

     그냥 살던대로 우리의 일상을 지키고 있으면 됩니다. 그들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이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와야 할 평범한 삶이 부서지지 않도록 각자에게 주어진 평범한 일상을 충실하게 살고 있으면 됩니다. 그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은 가진채로 말이죠. 교회는 교회로서의 본질과 사명을 묵묵하게 행하고 있으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명을 조용하게 하고 있으면 됩니다. 변하지 않고 늘 동일한 모습으로. 그들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서 그렇게 살고 있으라는 겁니다. 그들이 슬퍼하고 있는 동안, 울고 있는 그들이 언젠가 돌아올 자리를 준비하고 있으라는 겁니다. 말없이, 조용하게 말입니다. 감정의 동요를 극도로 자제하고 말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그들의 슬픔의 시간이 그치고 나면, 그 자리에서 동일한 모습으로 단 한 번도 자신의 손을 놓지 않았던 교회를 보게 될테니까요. 그제서야 자신이 돌아올 일상을 지켜주고 있음에 감사하게 될 겁니다. 누가 진정으로 공감하는 자인지는 때가 이르면 밝히 드러나게 될 겁니다. 

 

더 많이 참아야 하는 이를 위한 배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더 아파하셨고, 더 많이 참고, 더 오래 견디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극도로 자제하신 채, 자신의 고통은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신 채, 말없이 우리 곁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참고 있는 이들을 향한 배려인 겁니다. 좋으신 하나님이고 싶은 욕망, 구원의 하나님이고자 하는 욕망은 꼭꼭 눌러둔 채, 그저 하염없이 기다리셨던거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차오르는 감정에 충실하면 그만이거든요. 그리고 돌아서서 눈물 닦고 나면, 아무 일 없단듯이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도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만족하면서,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 수 있겠죠. 그러나 저와 당신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지금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더 많이 참아야 하는 이들, 더 오랜 시간 견뎌야 하는 이들을 위한 배려는 무엇일까 생각해볼 때 입니다. 그런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어찌 하셨는가 묵상할 때인거죠. 이 시간에 자신의 감정보다 더 많이 참아야 하는 이들이 당신의 내면과 영혼의 중심에 있기를 바랍니다. 

 

※ 나의 주장은 순수한 기고자의 견해로 본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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