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정군효 목사/ (사)기독교이단.사이비연구대책협의회 대표, 월간 교회와이단 발행인.
글쓴이: 정군효 목사/ (사)기독교이단.사이비연구대책협의회 대표, 월간 교회와이단 발행인.

 

1. 전능신교 조유산은 누구인가?

조유산

19511212일생, 중국 흑룡강성 아성 출신

1970-1985년 철도부에서 근무

1977년 아성 빵공장에 근무하는 푸윈쯔와 결혼

1979년 목수 일하는 제자의 전도 받고 기독교 믿기 시작

1986년 흑룡강성 아성 인쇄공장 근무하면서 <영원참신교회> 창립

1987년 아성 전분공장 근무

1988년 자칭 후함파의 동북사도로 임명되었다고 함

1991년 허난성으로 도피해, 중국 화학프로젝트공장 근무

1997년 불법 종교집회 죄목으로 3년 동안 투옥

2000년 허문산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도주

2001년 미국으로 망명 신청

2002년부터 뉴욕에 선교본부를 두고 전 세계를 향해 포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조유산
조유산

조유산의 출생과 어린 시절

조유산(본명: 조쿤)19511212일 흑룡강성 하얼빈시 아성구 야구진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조유산의 아버지는 조광발이며 공산당원이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이계영 이다. 조유산의 부모님들도 하얼빈시 아성 서리촌 쑤즈린투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조광발이 야구진 철도에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어 야구진으로 이사하여 살게 된 것 같다. 조유산의 부모님은 열명의 아이를 낳아 키웠는데 조유산 위로 누나가 두명이며 아래로 남동생 한명에 여동생이 여섯명이었다. 유산이 어릴 적부터 살았던 야구진은 유일하게 눈에 띄는 큰 건물은 아구 기차역인 만큼 가난하고 작은 마을이었고, 조유산의 온 가족은 철도직원 생활단지에서 살았으며 약 10평정도 되는 아주 작은집에서 몹시 가난하게 살았다. 조유산의 가족은 늘 양식이 부족하여 배고픔과 가난에 시달리며 살았다고 한다.

 

조유산의 학업   

조유산은 아구역 초등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66, 15살 된 조유산은 아구 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는데 그 무렵에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고 조유산은 홍위병이 되어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 선생인 마원엔을 잡아놓고 죄목이 쓰여진 모자를 씌우고 심히 괴롭혔다고 한다. 결국 조유산은 겨우 중학교 졸업으로 학업을 마치게 된다.

조유산의 직장생활

1971, 산시성 철도부가 동북 청년일군을 모집할 때 20살의 조유산도 뽑혀 산시성에 가서 철도 수리공이 되었다. 하지만 2년도 버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백수생활을 하고 있던 중 조유산의 아버지인 조광발이 장자인 조유산을 위하여 다니던 직장을 퇴직하고 자신의 일자리를 아들에게 넘겨주게 된다. 조유산은 야구 기차역의 철도 수리공으로 일하면서 목수 기술을 배워서 여유 있는 시간에 목수 일을 해서 돈을 벌기도 했는데, 바로 그 시절에 조유산은 본인의 이름을 조쿤에서 조유산으로 개명을 하였다.

조유산의 혼인

1976년 조유산은 이웃 지인의 소개로 아성 화학시제공장에서 일하는 푸윈쯔를 만나 일년후 1977년에 결혼을 하였다. 1979, 조유산 부부는 딸(이름: 조둬쟈)을 낳았다. 푸윈쯔는 조유산과 10년을 같이 살다가 이혼을 하게 된다. 조유산의 전처인 푸윈쯔의 말에 의하면 1986년경 조유산은 교회에서 말씀 교제한다는 명분아래 자기보다 스무 살 어린 두염추라는 여성과 불륜관계였던 적이 있다고 실토하였다.

조유산이 전능신교의 여그리스도로 만든 양상빈은 19731118일생으로서, 산시성 다퉁현의 양모영(부친)과 쉬쩐린(모친)의 딸이다(한때는 허난성 정씨 또는 등씨 여성으로 소문났었지만 사실은 산시성 출신이다). 그녀는 1990년도 대학고시에서 떨어져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고 정신분열증 현상까지 나타났었다. 조유산이 산시성 다퉁현의 가정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녀를 만나 그를 신앙적으로 위로해 줌으로서 둘이 애인 관계로 발전되었다. 1993년에 조유산과 양상빈은 비밀결혼을 하고 1995년 둘 사이에 아들 한명이 태어났다. 하지만 이 아이에 대해서 아는 교인들은 아주 극소수이다.

 

조유산의 신앙

조유산이 1977년 결혼한 후 그에게 목수 일을 배우려는 청년들이 있었는데 조유산의 성질이 급하고 혈기를 자주 부리는 모습에 견디지 못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떠났다. 하지만 나중에 유수신 이라는 기독교 청년이 목수 일을 배우러 왔는데 유수신은 잘 견뎌내고 가지 않았다. 바로 유수신이 조유산을 전도하여 1979년경에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다고 한다. 19823월부터 중국의 삼자교회 정책이 시작됐지만 조유산은 여전히 후한파가정교회에서 신앙을 하였으며 1983년부터는 가끔 타 지역에 가서 전도를 하였다고 한다.

1985년 겨울, 조유산의 부모와 여섯 살이었던 딸 조둬쟈가 석탄 가스 중독으로 사망하게 된다. 그 후 조유산은 더욱더 전도에 매진하였다. 아성현 영원진이라는 곳에 <참 하나님>이라는 가정교회를 세워 1986년에서 1989년 사이 신도들을 많이 확보해 작은 가정교회에서 100명 정도 모였다고 한다. 2년 후 1991년 교인수가 거의 천명 가까이 되었을 때 중국정부에 의해 패쇄 당하고 조유산은 허난성으로 도주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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