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울 교수, 세계기독교회 속의 한국교회의 성장전략(1)

이글은 미주총신대학교 장바울 교수(Rev./Dr. Paul B. Jang)가 “세계기독교회 속의 한국교회의 성장전략”이라는 제목으로 코닷 목회방에 연재하고 있는 글이다. 미국에서 30년 이상 교수 생활을 하고 있는 장 교수는 고신대학교에서 1년 수학한 인연으로 고신교회와 코닷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장 교수는 “세계기독교회 속의 한국교회의 성장전략”이라는 제목으로 23회에 걸쳐 꾸준히 글을 올리고 있다. 장 교수가 말하는 교회 성장은 단순 외형 성장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으로 교회가 살아나고 자라가는 본질적인 성장을 의미한다. 한국교회를 섬기는 장바울 교수의 성실한 글쓰기에 감사하며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편집장 주

[들어가는 말]

장바울(Paul Jang) 목사 (미주총신대학교 교수)

지금부터 수십 회에 걸쳐서 [세계 기독교회 속의 한국교회 성장전략]을 주제로 교회성장학의 차원에서 집필하여 업로드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교회성장운동에 대한 무조건 적인 비판의식을 불식시키고 한국교회의 건전한 성장운동에로 유도하기 위하여 본 주제로 연속해서 업로드 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교회가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었을 때에는 그 성장운동 물결에 동조하던 사람들이 오늘날 세속화 물결에 휘말리고 있는 한국교회를 향해서 교회성장운동에 대한 비판들만 쏟아내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그에게 충실하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속적으로 성장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하나님 보시기에 충실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는 교회의 양적성장(quantitative growth)과 질적 성장(qualitative growth)을 의미한다. 교회성장의 동력은 두 가지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가 수직적인 차원(vertical dimension)이요, 둘째가 수평적 차원(horizontal dimension)이다. 수직적 차원이라 함은 교회성장에 있어서 신적 차원(divine dimension)을 말함이요, 수평적 차원은 인간적 차원(human dimension)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신적 차원이라 함은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있어서 그 성장요소의 원천(source)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이고, 인간적 차원이라 함은 교회의 성장요소를 인간에게서 찾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성장 요소의 양면성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성장에 있어서 주도적인(initiative) 역할을 하시기를 원하신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교회를 주관하시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신성한 기관이기 때문이다(마 16:18). 마이클 하밀톤(Michael Hamilton)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로스앤젤레스 북쪽에 있는 파사데나에서 열렸던 교회성장 세미나에서,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 박사가 언급한 말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녀들을 찾는 것이 교회성장을 위한 그의 뜻이다”라고 했다.

교회성장의 수직적 차원은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관계로, 구속사역에 관련되어 있는 중요한 신학적인 이슈(issue)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속사역을 완성하셨는데, 이점에 있어서 조직신학자인 헨리 티센(Henry C. Thiesse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계획을 예정하셨다. 이 계획 속에는 구원이 준비되는 방법들과, 실현되어야 할 목적들, 이 은혜에 참여할 사람들, 이용할 수 있는 조건들, 그리고 적용될 수 있는 중재와 수단들이 포함되어 있다.” 성부 하나님께서 구속을 계획하셨고, 성자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성취하셨으며, 성령께서 그 구속을 인간에게 적용시키시고 계신다.

물론, 구속의 계획이나 구속의 성취, 그리고 구속의 적용 등이 전혀 독립적인 사역에 속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구속사역도 역시 창조사역(works of Creation)과 마찬가지로 삼위께서 함께 의논하시고, 성취하시고, 적용하시는 것이다. 단지 신학적인 논리로 설명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본체론적(本體論的, ontological) 측면에서 볼 때 일체이시며, 경륜론적(經倫論的, economical) 측면에서 볼 때 삼위라는 원리에 적용하여 설명하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은 구속계획을, 성자 하나님은 구속의 성취를,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구속의 적용을 주도하신다는 뜻이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절대적으로 교회가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경륜론적(經倫論的) 삼위일체(economical Trinity)의 논리로 볼 때, 교회성장은 절대적으로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키시는 데는 언제나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신다. 이점에 있어서 시세모어(John T. Sisemore)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하나님께서 교회성장을 위하여 항상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견해는 인간이 홀로 자력에 의하여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순한 인간으로서는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능력이 없다. 교회성장은 하나의 독특한 공동 작업—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능력의 공동 사역으로 창출되는 결과이다.”(God seems to always use human instrumentality in producing church growth. This observation does not mean that man alone can produce authentic church growth. Mere man lacks both the potential and the power to grow a church. Church growth is the product of a unique synergy-a coalescence of human effort and divine empowerment).

물론, 이 공동 사역이라는 것은 주도적 역할과 종속적(subornative), 의존적(dependent) 역할로 구분해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주도하시고(initiative action)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신다는 것은 교회의 성장의지(the will toward church growth) 뿐만 아니라, 성장능력(energy of growth)까지도 하나님께서 부어주셔서 그의 원하시는 교회성장에로 주도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면 인간이 교회성장에 있어서 하나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의미는 과연 무슨 뜻인가? 기계나 동물과 같이 사용하신다는 뜻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기계적이나 동물적으로, 다시 말하면 맹종의 도구로 사용하시지 않는다. 이유는 분명하다. 첫째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을 기계와 같이 맹종으로 사용하신다면, 자신을 맹종의 기계와 같이 만드는 자가당착의 모순에 빠지게 된다.

둘째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와 결단력을 동시에 주셨고, 하나님의 축복 아래서 그 지혜와 용기로 결단할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기계적인 인간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유기적이며 영적인 인간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을 기계적으로 다루지 아니하시고 인격적으로 다루신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행사하시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다.

성경에 보면, 바울 사도도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으니”(고전 3:6)라고 말해서 인간은 교회성장에 보조적 역할, 즉 하나의 도구나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되, 성장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라고 역설했다. 이 구절에서 “나”(I) 라고 하는 이는 물론 바울 사도로서 인간이다. “아볼로”(Apollos) 역시 인간이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교회의 성장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요, 교회의 성장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의 성장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서, 인간은 이 사역에 참여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즐거움에도 참여하게 된다(마 25:21).

그러므로 이 사역을 위하여 불림을 받은 사람은 교회성장을 위하여 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 사명(commission)이란 종이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seeding)과, 물을 주는 것(watering)과 관리하는 것(management)등을 의미한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말하면 선교(mission)와 목회(ministry)라고 한다. 그러므로 전자는 교회개척(planting)을 위한 전도와 선교이요, 후자는 설교(preaching)와 돌봄(pastoral care)을 통한 목회사역을 의미한다.

기독교회는 역사적인 과정에서 찰린지(challenge)와 디펜스(defence)라는 액션(action)과 리액션(reaction)의 진자운동(pendulum)을 통하여 부단히 개혁하며 성장해 왔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성장운동 이후, 침체(沈滯)되어 갈 때마다, 주의 종들과 그들의 글들을 통하여 잠자는 교회들을 일깨워 개혁을 촉구하시곤 하셨다.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e, the Great)이후, 기독교의 왕국이 되었던 로마(Rome)가 코오트(Goths) 족에 의하여 붕괴됨에 따라 기독교가 정신적인 몰락의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을 때, 어거스틴(Augustine)은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이라는 걸작(傑作)을 써서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의 궁극적 승리(窮極的 勝利)를 선포함으로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확실한 소망을 재확인(再確認)해주었다.

암흑시대의 깊은 잠속에 빠져서 깨어날 줄을 모르고 있던 중세 교회(中世敎會)를 향해,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On the Christian Liberty)라는 논문을 써서 교회의 속박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선언하고, “95개조의 항의문”을 통하여 교회 개혁을 촉구하였으며, 칼빈(John Calvin)은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라는 불후(不朽)의 대작을 통하여 기독교회의 신학적(神學的), 사회적(社會的), 윤리적(倫理的) 개혁을 촉구하며 개혁주의 신앙을 변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계교회가 쇠퇴해가고 있는 상황에 있다. 서구라파교회는 이미 죽은 지 오래고 미국교회는 물론 한국교회까지도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 주의 종들은 아마도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급성장한 한국 교회도 침체되어 죽어가고 있다는 목소리가 드높아 가는 이때에, 서구교회(Western church)는 이미 죽었고(died church), 쇠퇴하고(declining) 죽어 가고 있는 미국 교회(dying church)의 전철(前轍)을 밟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이 간절하다.

한국교회가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교회성장학이 정립(定立)되지 못하고, 교회 성장의 이론과 방법이 무질서하게 사용됨으로, 교회성장 신학(church growth theology)의 부재(不在)로 인한 교역자들과 교인들의 신앙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못해 엄청난 기독교의 쇠퇴의 물결 앞에 속수무책인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필자는 수년 동안 교회성장에 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미국 서부(西部)의 교회성장운동(Church Growth Movement)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캘리포니아의 파사데나 교회성장학파(Pasadena-gang)의 요람인 훌러신학교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수집하며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미국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실제 목회 현장(ministry fields)을 연구하기 위하여 급성장하고 있는 미국교회들(stella growing churches)을 방문하며 담임목사들을 만나 리서치(research)한 적이 있다. 미국교회를 연구하게 된 동기는, 한국교회의 앞날을 알기 위해서였는데, 한국이 정치, 경제, 사회는 물론, 교회까지도 미국의 전철을 답습해 오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실제로, 정치에 있어서의 민주화, 경제에 있어서의 산업화, 과학에 있어서의 현대화 등 전반에 걸쳐서 한국은 미국을 뒤따라가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역시 교회까지도 미국 교회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사실, 교회는 좋은 면에서만은 미국교회를 배우고 따라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겠으나, 좋지 않은 면에서 까지 미국교회의 전철을 밟는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째든, 교회도 미국교회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한국교회를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 미국교회의 성장 역사와 현재까지의 과정과, 결과적으로 현재의 상황을 살펴봄으로써, 미국교회의 정확한 진단을 통하여 한국 교회의 미래의 이정표(里程標)를 설정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미국교회를 연구하다 보니, 몇 가지 문제점과 더불어, 좋은 점들도 발견하게 되었다. 문제점으로는 현재 미국교회들이 대체적으로 쇠퇴해 가고(declining) 있다는 사실과 미래에 대한 어두운 면인데, 그 원인을 분석하기에 앞서서, 현저한 것은 교회 안에 청소년들(youth people)이 거의 없고 대부분의 교회들이 노인들(seniors)로 차있을 뿐만 아니라, 예배 분위기를 비롯하여 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살아 움직이는 교회(vibrant church)가 아니라, 그 대부분이 생동감이 없이(not alive) 가라앉아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그렌데일(Glendale)에 위치한 바르나 리서치그룹(The Barna Research Group)의 통계에 따르면, 1980년대에서 부터 1990년대 사이에, 미국의 국내 교회들 중의 아홉 개의 대 교단들(nine largest denominations) 가운데 단지 두 교단만 약간 성장했을 뿐 대부분의 교단들은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고 한다. 반면에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 몰몬교(Mormon church), 불교(Buddhism), 이슬람교(Islam), 그리고 여러 종류의 뉴 에이지 교회들(New Age churches)이 오히려 성장했다는 통계이다. 이것이 미국 교회의 상황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미국 사회의 전반적인 이슈(issue)로 등장해오고 있는바, 현하 시대적 부머(boomer)인 “전후 세대들”(Baby Boomers)의 문제인데, 이보다도 특히 지금까지 내려온 기존의 “전통”(tradition)과 “유행” fashion), 혹은 “새로운 스타일들”(new style) 사이에서 갈등을 가지고 있는 청년층들(Busters: 1965-1977에 출생한 Young Adults)의 방향이 주목되는바, 이들은 신세대의 “유행”(fashion)에 회의를 가지게 되는 반면에, 다시 “전통”(tradition)에 관심을 가지게 되나, 이제까지 유전되어 온 “구형의 전통”(old tradition)이 아니라 “새로운 전통”(new tradition style)을 기대하고 창출하리라는 예상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 존재하고 있는 현대 교회들은 “차세대 교회”(future generation church)로서의 새로운 모습으로 재형성되어야(reshaped) 할 시점에 와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바르나(George Barna)에 의하면, 현대 교회는 “새로운 전통의 교회”(new traditional church)의 모습으로 재 단장해야 하는데, 만약에 현대 교회에서 아직도 구시대의 전통들—찬송들, 성의들, 예배의식이나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면, 그것들의 참된 의미를 설명해줌과 동시에,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들(young adults)로 하여금 교회의 살아 있는 중요한 지체(an important part of the life of the church)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필자가 여러 미국교회들을 방문, 리서치(research) 한 결과, 아직도 “구전통”(old tradition)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교회들은 여전히 침체상태(stagnative state)에 있거나 쇠퇴해가는(declining) 상태에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 미국교회는 오래전부터 현대화와, 산업화의 영향과 서구식의 생활방식(Western life style)으로 인하여 인간 중심의 신앙생활, 즉 세속화 신앙생활에 젖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교인들의 신앙의 수평관계 있어서 신앙의 도덕적 생활화가 과소평가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수직관계(vertical relationship)에 있어서 그들은 영적인 경건성(靈的 敬虔性)이 미약하다는 결론이다.

이와 반면에, 이러한 전통적인 미국교회들의 “구시대의 전통”을 과감히 탈피하고 살아 움직이고, 약동하며, 급성장하는 교회들(vibrant stella growing churches)이 있는데, 이 교회들에서, 세속화 물결(the wave of secularization) 속에서도 줄기차게 성장하고 있는 미국 교회의 모습들을 보게 된다. 이러한 교회들을 살펴보면, 의식과 형식을 과감하게 탈피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마음껏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모습들이다. 뿐만 아니라 메시지(설교)의 내용이 복음적이며, 대부분 강해설교에 의존하고 있다.

필자가 캘리포니아의 남부 오렌지카운티의 뉴포트 비치(New Port Beach)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사우스 코스트 공동체교회(South Coast Community Church)를 방문하여 담임목사인 밥 쌩크(Bob Shank)에게 “당신의 교회가 성장하는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이냐?”고 질문했을 때에, 그는 거침없이 첫째가 “복음적인 설교”에 있다고 대답했다. 교회성장의 가장 큰 요소 중에 하나가 복음주의적인 강력한 메시지라는 것을 실감케 한 대답이었다. 이 문제는 오늘날 상황적 설교로 교인들을 현혹케 하여 순수한 교회성장을 저해하는 교역자들이 각성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보다도 더욱 특기할 만한 것이 바로 소그룹 프로그램들(small group programs)이 잘 개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교회성장에 있어서 약간의 문제점은 있지만 미국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급성장을 하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엘토로 지역, 워렌(Rick Warren) 목사의 새들백 밸리 공동체교회(Saddleback Valley Community Church)는 무려 79개의 교회활동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목사의 설교와 함께, 이 소그룹 프로그램이 교회성장의 주요한 요소가 된다는 결론이다.

사실,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근본적인 문제(問題)는 첫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목사”(do-nothing pastor), 둘째가, “교회의 일에 무관심한 평신도”(uninvolved laity), 셋째가, “프로그램의 결여”(no program)등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성장을 위하여, 목사는 시대에 걸 맞는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개발하여 평신도들을 열심히 훈련시키고,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하여, 교회의 평신도들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재원과 잠재능력(potentiality)을 개발시켜 활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도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요소가 바로 성령의 역사이다. 민주화와 경제성장의 물결을 타고 줄기차게 일어났던 70년대의 교회성장 물결을 생각해보라. 이는 한 마디로 엄청난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들이 침체하여 쇠퇴하고 있는 상황을 마치 “교회성장운동”이 주범이라고 무조건 폄하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생각이다. 교회성장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성서적이다. 교회가 침체하게 된 원인은 교회성장운동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물론 잘못된 교회성장운동의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교회들이 성령운동이 사라지고 산업화, 현대화로 인한 세속화 물결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한국교회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한국교회도 역시 서구의 현대화(modernization)와 산업화(industrialization) 물결의 영향으로 인한 세속화(secularization) 물결에 의해 서구 교회 특히 미국교회의 전철을 밟아 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근래의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가 1960년대에 연평균 41% 성장률에서 1990년대에 와서는 연평균 0.3%로 급락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는 교회성장이 침체되었다(stagnated)는 평가이다. 좀 더 심각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한국교회가 이제 사양길로 들어섰다고 걱정스러워 한다.

필자가 미국의 어느 저명한 교회성장학자를 만났을 때, 그는 필자를 보자마자 첫 마디가 “한국교회 성장은 멈췄다”(Korean church growth has stopped)고 경고하였다. 이에 대해 필자가 물었다. 침체를 의미하는 것이냐 아니면 멈추었다는 의미이냐?(Do you mean stagnated or stopped?) 그는 단마디고 교회성장이 멈췄다고 대답했다. 침체했다는 말과 멈췄다는 말은 전혀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침체했다는 말은 다시 성장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고, 멈췄다는 말은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뉘앙스를 가진 말이다. 그동안 세계 교회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급성장해 왔던 한국교회가 이제 성장을 멈췄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필자가 그 분에게 물었다. 그러면 한국교회가 침체된 원인이 무엇이냐? 그의 단도직입적인 대답이 바로 한국교회가 비만증에 걸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엄청나게 성장한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비만증 환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육 간에 많은 축복을 받은 것에 비하여, 복음을 위한 에너지 발산이 미미했다는 뜻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그는 한국 교회가 큰 성장에 비하여 선교운동과 사회봉사 활동이 미약했음을 지적하였다. 이제 복음사업을 위한 운동을 최대한도로 극대화시켜야 비만증도 치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성장에로 유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 만약에 이러한 현상이 지속된다면, 한국교회 역시 미국교회의 전철(前轍)을 밟게 되어 얼마 가지 아니해서 쇠퇴해 가는 교회(declining church)로 전락하게 될 것이 아닌가?

그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의 능력 있는 복음적 메시지를 통한 영성회복과 더불어 성경적인 프로그램 개발의 전략을 구사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한국사회가 말기 암환자와 같이 전반적으로 병들어 있는 차제에 한국의 전반적인 치료를 위한 한국교회의 사명과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세계역사상 기독교의 흥망성쇠에 따라 나라들의 운명이 결정된 사례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과거의 로마가 그랬고, 서구사회와 미국이 그러하고, 아직도 공산국가(자본주의로 수정된)이기는 하지만 중국이 흥하게 된 원인이 바로 1억 3천여만 명이나 되는 크리스천들을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사료된다. 반면에 비기독교 국가나 반기독교 국가들은 엄청난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계속-

Rev./Dr. Paul B. 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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