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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성장과 역사의식, 제4물결을 대비하라!세계기독교회 속의 한국교회의 성장전략 (04) (05)
  • 장바울(Paul Jang) 교수
  • 승인 2018.08.14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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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울 교수는 ‘한국교회 침체원인=교회성장운동’이라는 도식에 신학적으로 접근한다. ‘과연 한국교회 침체의 근본원인이 교회성장운동에 있는가?’ ‘아니면 목욕물 버리면서 아기까지 버리는 큰 실수를 하고 있는가?’ 장 교수는 교회성장이라는 개념을 개교회주의와 다르게 역사의식 속에서 찾는다. '아무런 신학적 노력 없이 그저 세속적 비판에 휩싸여 건강하게 자라 가야하는 예수님의 교회에 대한 비전마저 포기한 것은 아닌지?' 조직신학자인 장 교수는 진정한 프락시스(praxis) 신학함의 자세를 가지고 이 시대의 목회자들을 향해 욕먹을 각오하고 글을 쓰고 있다. - 편집장 주

 

장바울 Paul Jang 목사(미주총신대학교 교수)

21세기 교회성장 전략

우리는 이제 21세기에 살고 있으며,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교회사적으로 볼 때,「제3물결」시대에 처해 있으며, 벌써 정치적으로도 초이데올로기적이며, 경제적으로도 초산업화의 「제3물결」이 출렁거리고, 정경종(政經宗)의 통합된「큰 바벨론」(계 17, 18장)이 태동하고 있는,「제4물결」 초입의 급박한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세계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국가적인 장벽들을 뛰어 넘어서 세계를 「한 지구촌」으로 생각하고, 분주하게 넘나들면서 초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오대양 육대주를 숨 가쁘게 오가는 상고들의 무역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매우 근접한 종말적인 상황에 존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에,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로 보았던 「큰 바벨론」이 태동하고 있는 것이라면, 마지막 종말이 가까운 징조가 아닐까?

요사이 전에 없는 천재지변이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과연 종말이 가까이 문 앞에 닥친 것이 아닌가도 생각하면서, 필자는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천재지변은 끝이 아니라 재난의 시작이기 때문에(마 24:6) 자신도 종말을 준비하는 자세로 더욱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며, 둘째로 만국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끝이 오리라고 했으니(마 24:14), 세계복음전파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성서적으로 볼 때,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제4물결」의 세력은 정경종이 통합된 하나의 거대한 지상의 세력의 집합체인 「큰 바벨론」으로서, 용에게 큰 권세를 받아서 행세하다가 주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계 17,18장).

성경으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요한계시록 13장에서부터, 용의 권세를 받은 두 짐승이 각각 바다와 땅에서 나오는데, 이것은 용의 권세를 받은 세상권세(政權)와 종교권세(敎權)을 가리킨다. 첫째 짐승은 머리가 일곱이고, 열 뿔이 있는데,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으며,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세상 왕권의 대표로 성도들을 칼로(政權) 박해할 것이다. 그러나 둘째 짐승의 횡포는 첫째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는 첫째 짐승의 정권까지 동원하여 짐승우상을 만들고, 그에게 절하지 않는 자들은 다 죽이고, 경제권까지 위임받아 손에나 이마에 짐승의 표(666 수)를 받지 않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거짓 선지자의 세력으로서 이 둘은 적그리스도(anti-Christ)의 세력을 의미한다.

이 적그리스도의 세력은 다니엘서 7장과 8장에 예언된 세력으로, 이 적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이미 역사적으로 성취되었던, 당시 바벨론, 메데․ 바사, 헬라 등의 강대국들을 거쳐, 넷째 나라로 등장한 로마제국을 지칭한 것이나, 이것은 사도요한을 통하여 종말론적인 적그리스도의 세력으로 예언하게 된 것이다(계 13장, 17장). 이 적그리스도의 세력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등장해서 세계를 지배하며, 성도들을 괴롭히고 박해하게 될 「제4물결」을 타고 나타나는 정치, 경제, 종교의 통합된 세력이다(계 13:1-18). 그러므로 현재 정경종의 「제3물결」이 넘치고 있으므로, 앞으로 정경종의 통합된 「제4물결」이 몰아칠 때에는 넷째 짐승이 출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이때가 지나면, 반드시 다니엘이 예언한대로 「제5물결」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성도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다(단 7:17-18; 17:22; 17:27; 2:34-35)

이 시대가 오기 전, 21세기 「제3물결」시대와 「제4물결」시대를 대비한 교회성장 전략은 무엇인가? 먼저 하나님의 교회들이 영적으로 무장하여 종말을 준비해야 할 것이며, 「제4물결」의 한파가 닥쳐오기 전에 일어날 세계복음화를 위한 「마지막 선교의 물결」(The Last Mission Wave)에 합류하여 만국 복음전파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역사의 조명 (Historical Survey)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천지만물과 인간이 운동하는 율동(律動)을 보시며 즐거워하신다. 사실 알고 보면, 생물은 물론, 무생물에서까지도 천지만물의 우주만상이 운동을 통하여 율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숨을 쉬고 생각하며 말을 한다. 더 나가서 활동하며 운동한다. 다른 동물이나 식물도 숨을 쉬며 움직인다. 무생물인 천체와 지구도 어떠한 신비의 법칙에 의하여 숨을 쉬며 활동하고 있다. 또 천체들 간에 중력(重力)과 인력(引力)을 통하여 그들의 포지션(position)을 유지하면서 각기의 궤도(軌道)를 따라 운동하고 있다.

사실, 유성(流星)들과 같이 어떤 물체는 정지 상태에 있는 것 같으나 초고속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운동(運動)과 정지(停止)는 활동(活動)과 비 활동(非活動)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가지고 있지만, 영원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이 둘은 에너지 운동의 양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각이나 초 감도의 기계로도 포착할 수 없는 극치의 초고속 상태로 가면 정지 상태와 같이 되고, 그 초고속 상태의 긴장이 풀리면 풀릴수록 운동감각을 더욱 심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의 엔진이 초고속으로 돌면 돌수록 더욱더 안정 상태에 이르고, 엔진의 긴장이 풀려서 저속으로 돌면 돌수록 엔진의 운동이 불안정하게 되어 심하게 흔들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지와 운동은 하나님의 창조의 상극현상(相克現狀)인 동시에 상생현상(相生現狀)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어트(T. S. Eliot)는 그의 희곡 “성당안의 살해”(Murder in the Cathedral)에서 진행하는 역사의 수레바퀴의 회전축을 “정적의 지점”(still point)으로서, 신(神)과 통하는 시간(time)과 영원(永遠: eternity)의 접촉점으로 묘사했다.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궤도를 이탈한 인류의 역사는 불안하기 만 하다. 인간의 실수로 순간순간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발생하여, 역사의 수레바퀴(the vehicles of history)는 종말을 향하여 덜커덩거리며 굴러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조정하고 계시기 때문에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굴러가고 있다. 인간의 장난(?)으로 역사가 왜곡되는 것 같지만, 그 순간순간 하나님의 심판(審判)과 구제(救濟)에 의해서 결국은 하나님의 창조와 재창조의 목적대로 그 목표를 향하여 힘차게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이 역사의 수레바퀴 중의 하나는 지상의 왕국(earthly kingdom)의 자취를 엮어나가는 일반사(一般史)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왕국(heavenly kingdom)을 엮어나가는 기독교사(基督敎史)이다.

이 두 수레바퀴 개념은 어거스틴(St. Augustine)이 말한 대로 함께 굴러가다가, 종말에 가서는 세상나라(the earthly world)가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에 귀결된다는 역사의식(歷史意識)이다. 그의 저서인 「하나님의 도성」(The Kingdom of God/Civitate Dei)은 우리에게 역설적인(paradoxical) 역사의식을 제시한 것으로,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역사를 전개해나가고 있으며, 그는 유세비우스(Eusebius) 보다도 더욱 영적으로 심오하게 “하나님의 도성”에 접근해 있는 듯하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나라의 기원을 성서의 아담의 타락 후, 아벨과 가인의 후예에 두고 있으며, 이 두 족속의 관계는 세상 끝날 까지 상극관계를 유지하게 되나, 종말에 가서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의 승리를 선포하게 되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서「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그리스도와 그의 사자들이, 세상나라(the earthly kingdom)는 일시적으로 마귀와 그의 사자들이 지배하게 되는데, 궁극에 가서는 그리스도의 승리로 세상나라가 심판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는 것이다(계 21:1~4).

기독교의 역사의식

인류의 역사에 관해서는 비단 역사가들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하고 있다. 우선 종교계와 비종교계가 그 유형을 달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계에서도 역사관에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와 같이 확실한 역사관을 가진 종교는 없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앞에서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내세(來世)에 대한 유일신론적(唯一神論的)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는 확고부동한 하나님 나라를 내다보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타락한 후,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에 따라 한 치도 오차 없이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도 하나님의 예정된 코스를 따라 정확히 진행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를 엮어나가실 때에, 이미 계획된 하나님의 경륜(經綸)에 따라 정확하게 섭리(攝理)하시고 계신다. 세상에 일어나는 어떠한 역사적 사건(historical facts)도 하나님의 간섭이 없이 우연히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은 하나도 없다. 역사에서 하나님의 간섭을 제외시키는 것이 바로 이신론(deism)이다. 머리털까지도 헤아리시는 하나님의 정교하신 손길에 의해서 천상천하의 모든 사건들이 핸들(handle)되고 있다.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참새 두 마리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법이다(마 10:29). 천상천하(天上天下)의 대소사건(大小事件)들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 전지창조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섭리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이 기독교(基督敎)의 역사의식(歷史意識)이다.

비기독교의 역사의식

그러나 이와 반대로 비기독교의 역사의식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간섭을 제외시킨다. 모든 역사적 사건을 인간의 주도하에 진행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또한 자연발생적이거나 우연한 사건으로 본다. 자연현상의 진화가 자연적인데 반하여 인간사회의 역사적 진보는 인위적이라고 한다. 레이몬드 아론은 역사속의 모든 정치구조는 인위적이고 가변적(可變的)이라고 말하였다. 유물론자인 마르크스(Karl Marx)는 역사를 물질운동의 결과로 보았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신의 간섭을 철저히 거부하였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나 실존주의 신학자들까지도 두 개의 차원의 역사, 즉 카렌다적(calendar)인 일반역사(Historie)와 초역사(Geschichte), 또는 참역사(Ulgeschichte)를 말한다.

그들은 카렌다적인 역사적 사건(historical facts)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실존적인 신앙의 사건(existential events of Geschichte)에다 역사의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또, 하이덱거(Heidegger)나 콜링우드(R. C. Collingwood)는 “그 자체의 역사성”(the historicity of the self)에 의하여 역사를 해석한다. 로빈슨(Robinson, J. M.)에 의하면, “역사란 외적 발생사건 배후에 있는 참여자들(participants)에 대한 의지의 행동과 관여와 그 의미”라고 정의하고, 특히 신약성경 연구에 있어서 역사와 인간존재에 대한 제일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신분(self-hood)에 관한 역사적 진술로서 케리그마(κήρυγμ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역사가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가 자연의 진보로 대치되었고, 성서가 말하는 영원과 천년왕국이, 단지 세속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한 인간의 활동으로 이룩되는 하나의 지상낙원(an earthly Utopia)으로 대치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히11:3)와 역사의 최후 완성을 제외하고는, 경험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구원의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전적으로 운영된다는 역사관이 없이는 본질적인 의존관념이란 근거가 없으며, 만일 역사가 하나님에 의하여 전적으로 컨트롤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념과 인간역사의 관념은 전적으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성경말씀에 의하여, 그리고 성경말씀 안에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랑케(Leopold Von Ranke)와 같은 역사가는 오히려 역사를 연속선상(continuous line)에서 생각하지 않고 역사적인 사건마다 신(神)과 직결시켜서 다루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는 르네상스(Renaissance) 시대를 보면서, 그들의 시대의 연대를 쓰거나 그들의 신뢰를 평가절하한 추리작품(detective work)의 제형(諸型)들에 의하여 기록한 그 당시의 여러 저술가(authors)들을 섭렵하였다. 그러나 성서는 절대자 하나님의 섭리 하에 진행되는 구원사(救援史)를 역사의 연속선상(連續線上)에서 다루고 있으며, 종국에 가서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연결시킨다(계 21:1-8).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하나님의 도성」 제19권에서 악인의 역사도 선인의 역사와 더불어 계속되다가 최후심판이 마칠 때까지 지속되다가 최후심판 시에 선인의 승리의 선포와 한께 영원히 사라진다고 내다보았다.

 

역사의 변화 물결

역사는 흐른다. 창조이후 역사는 시간과 함께 흘러왔고 또 흘러갈 것이다. 세상 끝날 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장애를 받지 않고 역사는 흐를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창조의 원리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특별섭리에 의하여 이 자연의 창조의 법칙을 무시하고 기상천외한 일을 행하실 때도 있다. 그러기에 그는 절대자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때를 말하기를 “기적의 때”(time of miracles) 혹은 “기적의 순간” (momentum of miracles)이라고 한다. 기적은 통상적인 질서를 파괴한다. 시간을 무시한다. 역사적인 코스도 뛰어 넘는다. 시간을 조작하여 역사의 코스를 변경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역사 밖에서 역사를 컨트롤하시면서, 때로는 역사 속에 돌입해서 역사의 코스를 자기 뜻과 계획에 따라 수정하시기도 하신다. 역사가 왜곡될 때에 역사를 바로 잡으신다.

사실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하나님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흘러간 과거가 되어버렸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인간은 역사의 흐름, 대세의 흐름을 막을 수가 없다. 다만 대세의 흐름 역사의 흐름을 어떻게 잘 탈수 있느냐? 가 인간의 과제이다. 그러나 믿음의 영웅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에 따라 시간을 조작해서 역사를 창조하는 기적을 나타낸 사건들을 볼 수 있다. 기적의 사람들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특별섭리로 시간을 무시하고 역사의 진행을 중단시킨 사건들이 있었다. 이 사건들은 전무후무한 사건들이었다. 이 역사를 창조한 믿음의 영웅들의 사건은 오늘날에는 달라진 하나님의 역사의 배경 속에서 신앙으로 이해해야 할 문제들이다.

신령한 결혼식 예표

여호수아서 10장 12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기브온 중천에 해를, 아얄론 골짜기에 달을 하루 종일 멈추게 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모리 사람들을 완전히 섬멸하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모리 족속을 격파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 승리를 위하여 정상적인 역사의 시간을 무시하고 새로 시간을 만듦으로 새 역사를 창조한 것이다. 역사를 창조하는 자는 위대한 영웅이 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전무후무한 역사를 창조함으로 믿음의 영웅이 된 것이다.

여기에는 구원론적인 하나님의 신령한 뜻이 담겨져 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시고, 그리스도의 신부를 삼으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의도가 담겨진 약속으로서의 예표가 되는 것이다. 비유적인 의미로, 태양은 신랑을, 달은 신부를 의미한다(합 3:12). 태양은 낮을 주관하고(창 1:16), 달은 밤을 주관함으로(창 1:16) 이 두 광명은 서로 상반된 위치에 있기 때문에 한 자리에서 만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인간은 의인과 죄인이라는 상반된 신분으로 만날 수 없는 운명이었지만, 하나님의 택하신 중매자인 여호수아에 의하여(바울사도가 자신을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중매하는 중매자라고 비유해서 설명한 것 같이) 한 자리에서 만나서 새 역사를 창조하는 순간, 바로 이 순간이 신부와 신랑, 즉 그리스도와 우리가 서로 만나서 영원한 해로를 약속하는 성스러운 결혼식(holy wedding)의 장면이라 하겠다.

이 결혼식은 인간의 결혼식과는 다르다. 인간의 결혼식은 역사 속에서 어느 시간을 정하고 그 시간에 맞추어서 결행하지만, 이 성스러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죄인인 인간의 결혼식은 역사적 시간을 구속(救贖)해서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행사되는 신비스러운 결혼식의 순간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임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순결한 신부가 될 자격이 없기 때문에 구속적인 결혼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 순간은 우리 인간이 구속을 통하여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機會)이므로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성경은 경고한다.

“기회”(opportunity)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이로스”(καιρός)로서 “시간”(time)으로도 번역 된다. 이 말은 본래 희랍의 “작은 남신”(minor god)의 이름으로, 이 남신의 모습은 양 발에 날개가 달려서 아차 하는 순간에 신속히 달아나며, 앞머리에만 한 줌의 머리채가 있고 그 외의 머리 전체가 대머리임으로 달려올 때에, 앞에서 앞 머리채를 잡지 않으면, 지난 뒤에, 뒤에서 잡으려면 뒷머리는 반들반들 대머리라 잡을 수가 없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기회란 하나의 찬스(chance)로서 적기에 포착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때는 신부인 인간이 신랑인 예수와 결혼할 기회로서 은혜 받을 만 한 때요 구원의 날이다(고후 6:2). 그래서 바울은 세월(때, 시대, 혹은 시간)을 아끼라고 했는데(엡 5:16; 골 4:5), 에베소와 골로새 교인들에게 권면할 때에 말한 “세월을 아끼라”(ἐξαγοραζόμενοι τόν καιρόν)는 말은 “시간을 구속하라”(redeeming the time)라는 뜻으로, 사실상 양적인 시간의 개념보다는 구속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NIV).

기적의 치유사건

그리고 열왕기하 20:1절 이하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께 범죄 함으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불치의 병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 때에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로 통회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회생을 약속하시게 되었다. 그 약속의 징조로 일영표(日影表)를 10도 물러가게 하신 일이 있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역사를 10도, 즉 20분을 후진시킨 것이다. 이 사건 역시 역사적인 순서를 무시하고 인간을 치유하심으로 육적인 구원을 보여주신 구원의 사건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조작하시기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속에 들어오셔서 시간의 리듬도 타시지만 때로는 시간을 마음대로 조정하시면서 그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해나가신다.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서 치유함을 받으려면, 통상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특별히 조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암(癌)과 같은 불치의 병은 정상적인 시간에 따라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운명의 여신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시간을 조작해서 그 여신의 죽음의 행진을 멈추게 하지 못하면 결국 인간은 죽게 된다.

성경에서, 나인성에 독자를 잃은 한 과부가 죽은 청년 독자의 상여(喪輿)에 매달려 질질 끌려가는 광경을 볼 수 있다(눅 7:11-17). 이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없어서 사람들과 나인성 과부는 죽음의 행렬을 따라 공동묘지로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 죽음의 순간, 죽음의 시간을 바꿔놓을 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맞은편에서 예수님을 선두로 “생명의 행렬”(life parade)이 오고 있는 것이다. 이 두 행렬이 마주치는 순간, 예수께서 관에 그의 손을 대에 그 죽음의 행진을 멈추게 하시고 “청년아 일어나라” 명령하실 때에, 그 즉시 죽음의 행렬은 멈추고 청년은 일어나게 되었다. 시간을 따라 죽음의 행진을 하고 있던 행렬이 멈추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나타난 것이다.

불치의 병이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사건은 하나의 기적으로 정상적인 시간을 뛰어 넘어서만 일어나는 사건이다. 의학이란 시간의 순리에 따라, 환자를 점차적으로 치료하여 회복시키지만, 기적(奇蹟)이란 시간의 순리를 무시하며 시간을 조작해서 인간을 치유하여 회복시킨다. 예를 들면, 앉은뱅이가 일어났다고 하자. 의학적으로 보면, 진단과 수술이라는 과정을 거치고 치료하는 과정을 거쳐서 오랜 시간이 걸린 후에 회복할 수 있게 되지만, 기적이란 그 모든 과정과 시간을 무시하고 단번에 펴버리고 만다. 이것이 시간을 뛰어넘어 시간을 창조함으로 역사하는 기적적인 치유의 사건이다. 이 창조적인 기적은 자연적인 기적을 뛰어 넘어 어느 순간 자연적 시간의 지점에서 교체되어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승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흐름을 무시하시지 않으시지만 반대로 피조물과 같이 역사의 흐름에 매이지도 아니하신다. 역사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그 역사의 흐름을 타시면서도, 때로는 그 역사의 장벽을 뛰어 넘기도 하셨다. 역사를 초월하기도 하시면서 그 오묘한 솜씨로 또한 역사의 흐름에 맞추어 섭리하시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만사가 때와 기한이 있어서 그 때를 따라 하나님의 섭리를 이뤄 나가신다고 한다(전 3:1). 「제1물결」(the first wave), 「제2물결」(the second wave), 「제3물결」(the third wave), 「제4물결」(the fourth wave), 「제5물결」(the fifth wave) 등의 역사의 흐름을 몇 가지 차원에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문예부흥이나 계몽사상을 중심으로 한 인류문화학적인 차원에서 볼 때에, 역사의 작가와 프로듀서는(演出家) 역시 인간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인류문화적인 역사의 물결을 인간이 만들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역사관은 인류역사의 프로듀서는 하나님이시요 인간은 역사의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배역에 따른 선역과 악역의 배우들이라고 할 수 있다.

- 계속 -

Rev.Dr./ Paul B. Jang

장바울(Paul Jang) 교수  revpaulja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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