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가인은 에덴 밖에서 경작하는 삶을 살았지만 지키는 삶을 살지는 못했다. 지키는 삶의 실패는 자신이 동생을 지키는 자냐는 반문에서 드러난다. 하나님은 에덴에 사람을 두면서 경작하고 지키도록 하셨다(2:15). 이것은 에덴 밖에서도 유효하다. 동생을 지키지 못한 삶은 자신의 경작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인 제물이 열남 되지 않음을 통해서도 확인되었다. 경작한 것 중에는 내 것이 아닌 타인의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선한 삶의 실체이다. 남의 먹거리가 나의 수고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경작을 넘어 지키는 삶의 실체이다. 선악과를 따 먹지 않음으로 남의 먹거리를 지켜야 했듯이 가인은 바르게 나누어 주는 삶을 살지 못함으로 지키는 삶에 실패했고, 이것이 제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서 확인되었다.

 

1. 지키는 삶의 가치

가인이 지키는 삶을 거부하였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인가? 경작하는 것 중에 남의 먹거리를 지키는 삶, 바르게 나누는 선한 삶을 거절한 것이다. 성경은 자신이 경작하고 수고한 것 중에 남의 먹거리, 혹은 남의 몫이 있다는 것을 거절할 때 이를 도둑질한 것으로 본다. 지키는 삶을 거절하는 것이 도둑질이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본다.

1) 이웃의 포도밭에 배고픈 자가 들어가서 포도를 따 먹으면 서리를 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마음대로 배불리 먹어도 된다고 가르친다(23:24). 그러나 그릇에 담아서 나오면 안 된다. 이것은 한계적 상황인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을 위해 이웃을 위한 배려의 규정으로 보인다. 농경사회에서 가능한 규정으로 보이지만, 나의 경작한 수고에는 다른 사람의 먹거리가 포함되었음을 알리기에 충분하다.

2) 계속되는 구절에는(23:25)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가서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지만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않아야 한다. 이런 경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사건이 예수님 당시에 생긴다. 2:23절 이하이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는데,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잘랐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길을 여는 장면은 예수님의 위치에 대한 고백적 성격을 지닌다. 그런데 지금 관심은 그와 동시에 제자들이 이삭을 자른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앞서 언급한 신23:25절이다. 손으로 이삭을 잘라서 무엇을 하는가? 비벼 먹기 위함이다(6:1비교).

안식일에 먹을 수 있느냐의 문제가 핵심이지만, 중요한 것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이웃이 수고한 것을 먹을 수 있도록 규정한 율법의 의도이다. 이러한 율법의 의도는 안식일에도 적용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해석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사람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먹거리의 제공은 안식의 기본 요소라는 선언이다. 나의 수고한 것에는 다른 사람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몫이 있다. 실제로 안식일은 나의 일을 쉬면서 다른 사람이 배고프지 않은지 병들지 않았는지를 살피고 먹이고 돌보는 날이 되어야 함을 선언함이다. 하나님의 형상답게 돕는 자로 살도록 하는 날이다.

3) 오경에는 추수할 것의 일부를 남겨 놓거나 땅에 떨어진 벼 이삭을 줍지 않도록 규정한다(24:21, 23:1). 그리고 제 7년 안식년에는 땅을 놀리면서 거기서 자란 것은 추수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의 몫으로 남겨놓는다(19:10, 25:3-4). 내가 수고하고 노력한 소득에는 남의 몫이 있다. 돕는 이로 살아가야 하는 당연한 몫이 있기에 남겨 놓아야 하고, 굳이 줍지 않아야 한다. 룻기서에 나오는 룻과 나오미의 양식은 보아스의 밭에 흘린 낟가리였다. 여기서 하나님의 주신 인자함을 서로 베풀고 나누는 인자함으로 확대된다(2:10, 13, 20, 3:10). 인애로 나타나는 삶은 손해를 감수하는 삶이다(4:6). 내가 수고한 것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살리고 세우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기업 무르는 제도의 본질이다.

4) 바울 사도는 제8계명인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계명을 해석 적용한다. 교회에 도둑질하던 자가 들어오면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먼저 도둑질하지 말라고 한다. 이것은 교도소나 법정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다. 둘째는 자기 손으로 일해서 먹고살아야 한다. 이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수준이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고 자기 손으로 일해서 살도록 해라. 그래야 사회가 건강해진다. 그런데 교회는 어떻게 가르치는가?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해서 일하라고 가르쳐야 함을 말한다(4:28).

이런 해석은 예수님의 계명 해석과 연속성이 있다. 5장에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보여주었다. 원수를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궁극적인 답이다. 이혼증서를 쓰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면 이혼증서 쓰는 네 오른손을 잘라라.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예수님은 어떻게 해석하셨을까? 부자와 나사로 사건과 어리석은 부자의 창고를 헐고 짓는 것을 통해 해석이 분명하다.

그러나 바울은 도둑질하던 자를 교훈하는 교회의 방식을 제시함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돕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수고의 목표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내가 수고한 것에는 다른 사람의 몫이 있고, 이것을 거절하면 도둑질 한 것임을 말한다.

이상의 몇 가지 예를 통해서 내가 수고하고 경작한 것에는 남의 삶을 살리고 도울 것이 담겨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것을 지키는 것이 율법이다. 가인은 경작하는 수고에는 성실하였지만 동생을 지키는 삶에는 실패했다. 정당하게 나누는 삶에 실패한 것이다.

 

2. 아벨의 피의 호소는 무엇인가?

가인이 아벨을 들로 불러서 죽였다(lxx). 그렇게 함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눈엣가시와 같은 동생을 제거하였기에 이제 자기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사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기에 더 이상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압살롬의 반란이나 세바의 반란도 압살롬이 죽고, 세바가 죽음으로 끝이다. 가말리엘은 예수를 따르는 운동도 예수의 죽음으로 끝이 날 것이라는 판단하에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그렇게 죽음은 모든 것을 끝낸다. 가인도 동생을 죽임으로 자신의 분을 다 쏟아내고 해결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예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죽은 후에 피가 말을 하기 시작한다.

피가 말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억울함을 죽은 자가 호소한다는 것이다. 구약 율법에 미제의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가장 가까운 마을이 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제사를 드리도록 요청한다. 그만큼 억울한 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죽임을 당한 아벨은 형에게 맞아 죽으면서 그 분노를 어떠한 방식으로 수용했는지 본문은 말하고 있지 않다. 의인으로 평가를 받은 아벨은 형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불쌍히 여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흘려진 피는 전혀 다른 역할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 호소한다. 그래서 피를 흘리게 한 땅에서 저주받도록 하였다. 이는 가인의 행위를 정죄하는 역할을 아벨의 피가 하고 있음이다.

아벨이 원하는 바이었을까? 우리는 모른다. 의로운 사람이 억울하게 죽어가면서 자신의 원수를 갚아 주기를 의도적으로 바라는가?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많은 경우 오히려 용서를 빌면서 죽기도 한다. 스테반은 자기를 죽이는 자를 향해서 저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호소한다. 이것이 의인의 죽음이 주는 실체감이다. 아벨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스테반이나 아벨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의 죽음으로 흘려진 피는 자기를 죽인 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정죄한다. 이것이 인간의 피 흘림의 한계이다. 의인의 피라 할지라도 자기 형제의 죄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가리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정죄한다.

구약학자인 폰라드는 한 사순절이 시작되는 설교에서 아벨의 피 사건을 언급한다. 그리고 인간의 피가 가진 한계를 아벨이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멀리 인간의 삶에 필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언급한다. 우리의 죄와 허물 연약을 대신 짊어질 수 있는 참된 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음을 알리면서 복음을 전파한다.

의인인 아벨의 피도 해결하지 못하는 죄와 결핍을 해결하는 참된 도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서 온다. 인생들의 탐욕으로 빗어진 삶의 질곡을 해결하여 우리를 어둠과 죄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수고하신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게 만든다. 아벨의 피는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한 세상임을 보여준다.

다음 글은 가인에게 임한 저주와 표시에 대해서 살펴본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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