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가인과 아벨 기사는 창세기 2:4절로 시작되는 천지의 역사 단락에 속한다. 5:1절부터 아담의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1-3장은 덩어리로 다루어 지지만 창4장이 고립되어 다루어지는 면이 있다. 하나님이 창조한 천지에 일어난 일이 에덴의 창설과 선악과 사건 그리고 이어서 에덴 축출만이 다가 아니다. 바로 에덴 밖에서 삶을 살아가는 아담 가족의 이야기가 있다. 에덴 밖에서도 경작하고 지키면서 살면서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는 길이 있음을 보여준다.

 

1. 수고(경작)하는 삶

아담은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여 아들들을 차례로 낳는다. 가인과 아벨이다. 가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낳았다라고 고백할 만큼 인상적인 자녀이다. 에덴 밖이지만 고통 중에 아이를 낳게 됨으로 생명이란 이름이 헛되지 않음을 말한다. 부부는 아벨을 이어서 낳는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고,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다. 농사는 경작하는 삶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리고 양을 치는 것도 사실은 경작하는 수고하는 삶과 다르지 않다. 양을 치는 것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는 과정을 통해 양을 제물로 허락한 것이고, 또한 먹거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덴 밖에서도 아담의 가족은 에덴처럼 경작하는 수고의 일을 한다. 수고의 일은 단순하게 농사하고 목축하는 일로 그치지 않는다. 때가 되면 추수를 하고, 추수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까지 수고하는 일의 범주에 들어간다.

일반적으로 수고한다는 단어(עבד)는 종들이 일하는 것에도 사용되지만,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자기의 역할을 하는 제사의 일도 관련된다. 족장 시절이나 제사장들이 존재하여 제사를 드리는 일의 주체가 되기도 하여 여전히 섬기는 수고의 일을 한다(8:25-26). 따라서 곡식을 경작하고 추수하거나 양을 길러서 털을 깎는 추수의 때가 되면 아벨과 가인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수고를 한다.

3절에 "때가 지난 후에"라는 표현은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를 의미한다. "날들의 끝이 되었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끝은 문맥에서 양을 치거나 경작을 하는 시점의 끝 즉 추수기를 말한다. 그래서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제사를 드린다. 각기 자기가 수고하는 삶의 열매를 가지고 마지막 수고인 제사를 드린다. 이것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반영하는 삶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수고에는 차이가 있었다. 아벨과 그 제물은 하나님이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왜 이런 차이가 일어났는가?

 

2. 왜 가인은 아닌가?

가인의 제사가 피의 제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피의 제사가 그렇게 중요했다면 반대로 아벨의 제사에 피라는 언급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벨의 제물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이다. 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면 양의 첫 새끼와 그 피라고 해야 한다. 피가 생명이란 관점은(9:5, 17:14) 아직 그렇게 강조되고 있지 않은 현실이다.

다음 해결책은 가인과 그 제물 그리고 아벨과 그 제물이란 표현에 관심을 둔다. 사람과 그 제물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런 입장을 잘 반영하는 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두 사람의 제사를 평가하는 방식이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11:4).

믿음을 가진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그 믿음의 제사를 제물을 열납함으로 확인해 주었다. 히브리서 기자의 평가는 중요하다. 구약을 해석하는 하나의 지침이 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드린 제사이다. 아벨과 그 제물의 연결은 믿음이다. 그리고 그 결과 의로운 자(의인)이란 증거를 얻었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믿음은 11장에 언급된 인물들 모두의 경우마다 다른 함의를 가지고 있다. 통칭해서 믿음이라고 할수 있지만 각각의 시대가 가진 자신의 믿음의 내용은 다르다. 더 나은 제사가 되기 위한 믿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11:1). 아벨을 비롯한 선진들이 이로써(믿음) 증거를 얻는다. 의인이란 증거를 아벨은 얻었다.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의인이란 증거를 얻었다. 그러면 더 나은 제사는 어떤 제사인가? 믿음으로 드린 제사이다. 이렇게 챗바퀴를 돌면 안된다. 아벨의 시대에 믿음은 어떤 내용을 가졌기에 그 믿음으로 제사를 드리면 의인이 되는가라고 질문해야 한다. 11:4절은 창4장의 내용을 압축하여 한마디로 정리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역사속에서 모든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았음을 증거하면 충분하기에 여기까지 논증을 한 것이다.

그러면 창4장에서 믿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왜 그 결과가 의인이 되었을까? 가인의 편에서 말하면 왜 가인의 제사는 열납되지 못했는가? 왜 가인의 제사는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리지 못했고 의인의 반열에 이르지 못했는가를 물어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사도요한이 유사한 평가를 가인에 대해 한다. 의로움에 대한 증거이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삼1:12)

가인과 그 제물이 연결되고, 아벨과 그 제물이 연결됨을 히11:4절을 통해 확인하였다. 이제 창4장의 본문을 통해 제물에 증거를 확인해 준 그 믿음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3. 가인의 불의함의 실체

하나님이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자,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 이 사실은 저자의 설명적 표현을 넘어서 하나님의 직접 화법에 의해 확인된다(4:6).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됨이냐?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 내려진다. 이는 창3장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질문하시면서 이후 단정하시는 것과 같은 형태이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으려 있다.

이 말씀은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았음을 두번이나 강조해서 선언하신다. 왜 가인과 그 제물이 열납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열납되지 않음으로 인해 분하고 안색이 변하는 이유는 바로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하나님의 선언이다. 안색이 변했다는 말은 얼굴을 떨어뜨린다는 말이다. 얼굴을 드는 행위가 상호 신뢰와 은혜를 끼치는 행위이다. 제사장의 축복에는 여호와가 그 얼굴을 든다는 표현이 두번이나 나온다. 얼굴을 드는 것은 상호 신뢰와 환대 그리고 축복의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가인은 얼굴을 땅에 떨어뜨림으로써 여호와와의 관계를 깨뜨려 버린다.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주된 원인은 바로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인에게 요청되는 선이란 무엇인가? 선은 선악과에 나오는 선과 악의 대조점에 있는 것이다. 이미 창 1-3장을 통해 밝혀진 선이 있다.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1:31), 그리고 선악과의 선이 있다. 선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경작한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몫의 것을 지키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먹거리를 지켜내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창1:29-31절에서 확인했다. 선악과는 바로 다른 사람의 먹거리임을 확인했다(2:16-7). 이런 문맥에서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았다는 하나님의 판단은 분명한 의미를 가진다.

가인이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아벨이나 다른 가족들의 필요에 충분하게 응답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이런 해석은 문맥을 따른 선의 의미를 통해 충분히 확보된다. 그리고 나아가서 수고 즉 경작하는 삶과 지키는 삶의 균형을 이루지 못했음을 말한다. 단순히 일만 하는 수고의 삶만으로 모든 것이 완성되지 않는다. 지키는 삶이 계속되어야 한다. 지키는 삶은 생명나무를 지키는 그룹들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지키는 삶, 다른 사람의 먹거리를 지키는 삶을 통해 생명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을 말해주는 흥미거리를 보려고 한다.

먼저 천지창조라는 1966년 제작된 영화가 있다. 창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을 소재로 만든 영화이다. 이 영화가 한국에 상영되었을 때, 가인의 제사드리는 장면을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유심히 보았다. 가인은 제물로 곡식을 자루에서 부었다가 다시 제물의 일부를 자기 자루에 넣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런 영화의 해석은 어디로부터 유래했는가? 선을 행하지 않았다는 히브리어 본문에 대한 해석 결과인가?

이 장면을 만든 근거는 아마도 칠십인역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4:7절에 대한 칠십인 역은 이렇게 되어 있다.

οκ ἐὰν ρθς προσενγκς ρθς δμδιλς μαρτες (Gen. 4:7 BGT)

Hast thou not sinned if thou hast brought it rightly, but not rightly divided it? (translated by L.C.L.Brenson).

네가 바르게 그것을 가지고 왔으나 바르게 나누지 않았다면 네가 범죄한 것이 아니냐?

70인역은 히브리 성경의 유대인들의 번역이다. 번역자들은 선을 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바르게 나누지 않았다고 보았다. 먹을 것을 나 아닌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은 사실을 선이 아니라 악이라고 본다. 이것은 창1-3장의 선의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가인의 제사가 왜 열납되지 않았는가의 결론을 내린다. 가인은 믿음으로 제물을 드리지 않았다. 비록 수고의 결과를 하나님께 가지고 오는 제사를 드리는 수고를 했지만 그 결과물인 소산을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은 채로 하나님께 가지고 온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실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먹거리를 하나님이 우리의 소득에 주셨다. 이것을 인정할 때 우리의 수고의 삶이 의로운 삶이 된다. 의로움이란 질서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면, 즉 남의 먹거리를 염두에 두고 지키면서 살지 않으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 아니다.

다음은 가인의 잘못을 지키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과 연결해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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