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복음병원의 시작에서 종합병원으로 인가를 받기까지-

*아래 글은 『고신의료원 50년사』, 허순길의『한국장로교회사』, 그리고 이재술 장로의 메모 자료 “고신 초창기에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들” 등 (A4 용지 29 페이지 분량), 이 외에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약간의 자료들을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정주채 목사(향상교회 은퇴, 사단법인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이사장​)
​정주채 목사(향상교회 은퇴, 사단법인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이사장​)

 

1장 복음병원 약사

 

1. 복음병원의 시작

복음병원의 태동은 경남 구제위원회에서 비롯되었다. 미국 웨스턴신학교에서 유학 중이던 전영창 씨가 6.25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부를 중단하고 귀국하게 된다. 그는 귀국하면서 5,000불을 모금하여 이를 전쟁의 참화로 죽어가는 난민들을 돕는 사업에 사용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한상동, 이약신, 박손혁, 오종덕, 안용준 등과 함께 경남구제위원회(대표 전영창)를 조직하여 경남노회의 승인을 받았다. 경남구제위원회는 유엔 산하 의료기관으로부터 약품과 의료진의 지원을 받아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임시진료소인 복음진료소를 개설하였다. 그 때가 1951621일이었다.

그리고 한상동, 전영창은 육군 제3병원에서 진료하고 있던 장기려 박사를 만나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장 박사도 이런 구호병원을 세우는 일에 뜻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흔쾌히 승낙을 받을 수 있었다. 장 박사는 72일부터 진료소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고, 장소가 좁아서 그해 1220일에 영도 영선2180번지에다 세 개의 천막을 치고 이전하였다. 동시에 복음의원으로 개설 허가도 받았다. 복음병원의 설립 목적을 전영창 대표는 다음 4가지를 제시하였다고 한다.1)

1) 복음 전하는 병원(동포에게) 2) 무료 구호 진료하는 병원(극빈자에게) 3) 정직, 정확한 진료로 신용 얻는 병원(외국인에게) 4) 병 치료법을 가르치는 병원(영육 간에)

1951년 6월 21일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임시진료소인 복음진료소가 개설되었다./ 코닷 자료실
1951년 6월 21일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임시진료소인 복음진료소가 개설되었다./ 코닷 자료실

2. 복음의원의 송도 이전과 고신 총노회로 운영권 이관

19544월에는 고려신학교와 복음병원의 부지로 부산 서구 암남동 34번지 13천 평의 토지를 매입하였다.2) 이 땅을 매입하는 데는 박봉화, 주태화, 주영문 장로 등 몇몇 분들의 헌신이 있었고 특별히 말스베리 선교사가 소속한 선교회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경남구제위원회는 관하에 있던 복음의원을 19564월 제4회 총노회로 이관하였다. 총노회는 복음의원 운영을 위한 이사 9(초대 이사장 박손혁)을 파송함으로써 복음의원은 명목상으로는 총노회에 속한 기관이 되었다.3) 그러나 실제로 총회 직영기관이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8년 후인 1964년 제14회 총회에서 고려신학교를 총회직영으로 결정할 때 복음병원도 총회에 속한 기관으로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이때 병원 측의 요구로 단서를 붙였는데 그것은 병원의 설립 정신을 승계하며 운영한다는 조건이었다.4) 그러나 이후부터 고신총회와 복음병원은 이 문제로 서로 간에 갈등과 긴장이 계속되었다.

 

3. 복음의원 송도 이전과 복음병원 개설

병원 부지를 구입한지 2(1957. 5. 28)만에 240(사무실, 입원실, 기숙사 등) 건물을 미8군사령부의 건축자재 원조로 신축하고 복음의원은 송도로 이전하였다. 당시 직원은 27명이었고 연간 외래환자는 33,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송도로 이전한지 4년만인 196187일에 비영리의료기관 복음병원으로 개설허가를 받았다. 병원으로 새 출발한 것이다. 이어 19684월에는 복음간호학교의 인가를 받아 간호 교육을 겸하게 되었다.

 

4. 고려신학대학 설립인가와 대학의 수익기관이 된 복음병원

복음병원은 처음에는 무료 병원으로 운영하다가 송도로 이전하면서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진료비 부담이 가능한 환자에게는 정당한 수가를 받고, 가난한 환자들은 무료로 진료하는 식의 투 트랙으로 운영을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재정운영의 어려움 때문에 무료진료는 폐지할 수밖에 없었고 대신 장기려 박사는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만들어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은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도록 유도하였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시작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총회와 병원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66년에 고려신학대학의 설립인가를 받기 위해 복음병원을 학교법인 이사회의 수익기관으로 편입하려 할 때였다. 이때 병원에서는 강한 반대 움직임이 있었다. 이재술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부터 복음병원과 총회는 사사건건 대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 이유를 병원설립의 고유목적과 총회의 병원경영방침의 불합(不合)문제이다.”고 했다.

이후 19701231일에는 고려신학교 대학부가 고려신학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게 됨과 동시에 복음병원은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수익기관으로 편입되었다. 이것은 고신역사에서 매우 큰 변화였다. 총회는 병원 재산을 학교법인(당시는 유지재단이 학교법인을 겸하였다)에 편입시켰고, 병원을 통해 신학대학원과 대학 운영에 재정적인 도움을 얻고자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전과 같이 독립적으로 운영하려 했고, 또 비영리기관으로서 빈민구호와 의료교육에 집중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복음병원에서는 의료진의 반발이 컸고 상당한 소요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제15회 총회가 수습위원회를 조직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수습위원들은 양자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총회에서는 복음병원주일을 제정하는 등의 노력을 했고, 대학인가를 추진했던 사조직(私組織)이사들의 사과를 받고 이들을 총사퇴시키는 조치도 취했다.5) 사조이사회가 생긴 이유는 당시 법인 이사장인 송상석 목사가 대학인가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이런저런 일로 총회가 권위를 잃게 되었고 그동안 덩치가 커진 복음병원은 총회의 의도대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복음병원이 비록 학교법인의 수익기관이 되었어도 상당 기간은 장기려 원장과 학교법인 이사회의 긴장 관계는 계속되었는데6), 이재술의 증언에 의하면 장기려 원장은 이사회와 마찰하면서도 거의 독립적으로 병원을 운영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5. 종합병원으로 인가

1971년 화란 정부의 원조 및 화란개혁교회의 후원으로 고려신학교 본관을 건축하였고, 동시에 복음간호학교 신축과 병동 증축공사로 1,064평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19733월에는 종합병원으로 인가를 받았다.


◆ 미주

1) 이재술 메모자료 고신초창기에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들에서. 후에 송도로 이사할 때(195761)는 다음의 세 가지 운영방침을 세웠다고 한다. “1. 정확한 진단과 치료 2. 의학지식의 교육 3. 복음전도고신의료원 50p.80.

2) 이 부지는 한상동 목사의 개인 명의로 보존등기를 하였다가 196510월에 고신총회유지재단에 증여 등기하였다.

3) 총노회가 총회로 조직된 것은 1956920일이었다. 매년 4월에 모였던 총노회는 제5회로 끝났다.

4) 병원의 설립정신이란 구제를 위한 무료진료가 그 기본정신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장기려 박사가 가능한 이 정신을 지켜보려고 애쓰다 보니 재정적자 때문에 총회와 부딪칠 수밖에 없었고, 총회의 압력으로 이루어진 그의 조기 퇴진도 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5) 사조직 혹은 사조이사회란 총회가 아닌 사적인 모임에서 학교법인 이사회를 조직하였다하여 생긴 이름이다. 사조이사회 사건은 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일종의 교단적인 사기였다. 이 이사회의 이사장이 한상동 목사였다는 사실은 고신의 설립정신(신앙과 생활의 순결)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든다.

6) 당시 처장이었던 이재술은 그가 남긴 메모에서 한상동과 송상석, 그리고 송상석 이사장과 장기려 원장이 좋은 관계를 갖도록 하기 위해 세 사이를 오가며 많은 노력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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