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채 목사/향상교회 은퇴​,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이사장.
​정주채 목사/향상교회 은퇴​,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이사장.

복음병원 영욕의 70년 약사(12)

-장기려 원장의 퇴진과 의예과 학생들의 데모까지-

*아랫글은 『고신의료원 50년사』, 허순길의『한국장로교회사』, 그리고 이재술 장로의 메모 자료 “고신 초창기에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들” 등 (A4 용지 29 페이지 분량/ 그는 1965년 복음병원의 서무과장 겸 총회재단 총무서리로 부임하여 1972년 퇴임하였다), 이 외에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약간의 자료들을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2장 갈등과 소요

 

1. 이사회의 장기려 원장 교체 준비와 의료진의 탈교단 운동

1(1)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장기려 박사가 원장으로 있는 복음병원과 고신총회(유지재단이사회)는 관계가 원만치 못했고 갈등 관계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큰 이유는 구호를 병원으로서의 설립 정신을 지키려는 병원 측과 복음병원을 고신대의 수익기관으로 정한 이사회의 운영방침이 서로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갈등은 나중에 이사회가 장기려 원장을 조기에 퇴진시키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교단이 장 원장을 퇴임시키려 한 데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신앙 노선의 문제였다. 장 원장이 출석하는 교회가 고신 측이 아닌데다 그가 무교회주의적인 성향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오직 고신을 추구했던 당시 고신총회로서는 그를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고신의료원 50년사는 이 문제를 아래와 같이 요약하고 있다.

학교법인 이사장인 송상석 목사는 복음병원 원장인 장 박사에 대해 달갑지 않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유는 장 박사는 퀘이커교의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은 김교신과 함석헌 선생을 좋아하는 무교회주의자였음으로 개혁주의 신앙을 바탕으로 한 교단 병원의 책임자로서는 부적당하다는 것과 교단 수익기관인 병원경영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1)

그러다가 재단 이사회는 장 원장의 정년(19747)에 대비하여 고신 출신(제일영도교회)의 박영훈 박사를 외과과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복음병원은 유례없는 큰 진통을 겪어야 했다. 먼저 10여 명의 의사들은(주로 부신의대 출신) 이사회가 박 과장을 임명한 것은 앞으로 장 원장의 후임으로 세우기 위한 포석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격렬하고도 폭력적인 소요를 일으켰다.

그런데 이 데모는 단순히 장 원장을 지키려는 목적으로만 일으킨 운동은 아니었다. 그들은 장 원장을 앞세워 고신총회와의 관계를 끊고 독자노선으로 가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박영훈 과장을 장 박사를 퇴출시키려는 고신총회의 앞잡이(?)로 생각하고 박 과장을 병원에서 몰아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박 과장의 출근을 저지하고, 폭행을 가하며, 진료카드를 찢는 등의 행위로 진료를 방해하였다. 이 사태로 2명의 의사들이 구속되고 7명의 의사는 입건되었다. 그리고 박 과장은 다른 병원으로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2. 박영훈의 원장 취임(1976. 6.)

그 이후 복음병원은 부산 시민들의 평판이 나빠져서 환자들이 격감하고 극심한 재정적 압박으로 경영 위기에 내몰렸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재단 이사회(이사장 이경석 목사)는 당시 복음병원을 떠나있던 박영훈을 진료부장으로 영입하고(19761) 같은 해 625일에 제2대 원장으로 취임케 하였다. 그리고 장 박사는 명예 원장으로 밀려났다.

 

3. 의과대학 설립

박 원장의 취임 이후 그를 중심으로 의과대학을 설립하려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사회(이사장 한명동) 역시 신학교(지금의 신대원)와 대학을 분리키로 하여 신학대학을 일반 대학으로 변경하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명칭도 고려신학대학을 고신대학으로 변경키로 하여 제28회 총회에 상정하였다. 그러나 이 안은 총회에서 절대다수의 반대로 부결되었다.2) 다음 해 총회(29)에는 이와 비슷한 안건으로 의예과인가 추진안이 상정되었는데, 총회는 의예과 인가를 추진하되 고려신학대학을 개편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인가추진과정에서 당국자들은 임의로 고려신학대학을 고신대학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의예과 설치 인가를 받으려면 먼저 일반 대학으로 인가를 받아야 한다는 정부 방침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명 변경은 단순히 학교 이름을 바꾸는 정도의 일이 아니었다. 신학대학을 일반 대학으로 변경하는 중대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일도 대학 인가를 받으려 할 때처럼 총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대학과 병원의 당국자들에 의해 암암리에 단행되었다. 그리고 총회의 결의를 무시한 중요한 범법행위를 책임자가 사과하는 것으로 그냥 지나갔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이런 불법을 행했던 사람들이 교단의 실세들이었기 때문이다.3) 이런 방법으로 기어이 의예과를 설치했으나 몇 해 지나지 않아 의예과 학생들에 의해 일어난 데모와 분규로 교단과 병원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 일은 사조 이사회 사건과 매우 유사한 사건이었다. 고려신학교 예과(대학부)를 대학으로 인가 받으려 할 때 유지재단 이사장인 송상석 목사가 대학인가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적극적인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학 인가를 추진하던 사람들은 이를 참지 못하고 총회가 파송한 법인 이사회와는 관계없는 사적인 이사회를 조직하여 대학설립 인가를 추진했다. 그리고 결국 대학설립 인가까지 받아내는 공적(?)을 남겼다.

이 일을 비밀리에 추진하면서 얼마나 완벽하게 비밀을 지켰든지 당시 법인 이사들은 대학설립인가(처음엔 학력 인가였고 일 년 후에 설립인가가 났다)가 났다는 소식이 일간 신문들에 보도될 때까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신학대학을 일반 대학으로, 이어 종합대학교로의 변경도 모두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으니 고신의 역사는 그 고비마다 이런 불법이 자행되었다. 교권의 사유화였다.

이런 일들은 파벌 갈등이 그 근저에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고4), 이와 같은 일들이 반복되면서 파벌주의로 인한 갈등은 치유할 수 없는 지경까지 깊어졌다. 이후에도 복음병원에서 대형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지도자들의 파벌싸움이 사태를 크게 악화시킨 경우가 많았다. 이런 악풍은 현재까지도 그 찌꺼기가 남아있다.

 

4. 노동조합 설립

1980년대에 일어난 민주화운동은 노동계에 노동조합결성이란 붐을 일으켰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1987년에 복음병원에도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노동조합의 결승은 민주화의 과정에서 당연한 일이었으나 교회나 교회가 직영하는 기관에서는 노동조합 설립을 인정치 않은 것이 구미(歐美) 보수교회들의 전통이어서 교회와 노조는 정치적인 문제를 넘는 갈등 요인을 갖고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노동조합이 병원운영에서 일어나는 불법적인 행사나 불의한 일들을 지적하고 감시하는 역할로 병원의 발전에 기여한 일들도 있었지만총회(이사회)와 부딪히면서 재정적으로 손실을 보는 일들도 많았다. 먼저 노사관계가 일반적인 경우들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곧 노사관계가 노조와 병원 당국 그리고 노조와 총회라는 이중적인 관계 가운데 있다 보니 노사 합의가 웬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고 심각한 재정적인 손실로 이어져 병원이 위기에 빠지는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5)

그리고 1999년 제49회 총회에서는 의료원제도를 폐지하고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으로 개편하려 했는데 이 문제로 병원측 곧 노동조합과 총회 사이에 극심한 갈등이 있었다. 심지어 2001년에는 노조원들이 총회장을 점거하는 등의 실력행사로 총회가 정회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5. 고신대 의예과 학생들의 데모

80년대 초는 학생들의 대정부 데모와 함께 학내 문제로 인한 소요는 일종의 시대적 분위기였다. 고신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대학들보다 훨씬 더 심하였다. 의예과 신설 이후부터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병원이나 총회 지도자들은 이런 사태를 수습할만한 지도력이 없었다. 그래서 학생들의 소요는 점점 더 심해졌고, 고신교회 안에는 의예과 폐지를 주장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었으며, 아예 고신대를 다른 재단에 넘기자는 주장까지 나왔었다.

그러던 중 1988년에 들어서면서 의예과 학생들은 병동과 주차장 건축을 둘러싼 비리 공개 등 17가지의 요구사항을 내걸고 농성을 벌렸다. 학생들이 학장실과 재단사무실을 점거하고 이사들을 강금하며 집기를 파손하는 등 폭력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심지어 병원 경내에서 노제(路祭)를 지내기도 하여 고신교회들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1989년에는 재단이사회가 병원 지도부와 담합하여 의료기자재 구입과 신학대학원 이전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려고 12명의 학생을 보결 입학시키는 부정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원장인 박영훈이 구속되고 이사장이 입건되는 등 큰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 일은 학내 분규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낳았다.

학생들과 노동조합의 시위가 점점 심해지다가 1991년에는 학생들의 수업거부, 수련의들의 집단행동, 의사들의 휴진이라는 최악의 사태가 초래되었다. 당시 상황은 고신의료원이 존폐위기를 느낄 만큼 어려웠다. 고신의료원 50년사당시 학생들은 이사회나 학교의 비리 공개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것은 그 사실 여부를 떠나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으로 살고 교육한다는 이사회와 학교가 학생들로부터 비리 의혹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충격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평가하고 있다.6)


◇미주

1) 고신의료원 50년사p.86.

2) 28회 총회록에 의하면(p. 65) 재적 114명 중 가가 36, 부가 74, 기권이 3표였다.

3) 당시 학장은 고 이근삼 박사였고 이사장은 한명동 목사였다.

4) 당시에는 송상석 목사와 한상동 목사의 관계가 좋지 않아 사사건건 문제를 야기했다고 한다. 두 지도자의 이런 갈등은 자연히 파벌을 만들어냈고, 이것은 고소파와 반고소파의 분열에까지 이르는 결과를 낳았다.

5) 노사분규로 인한 것만이 아니었지만 병원이 이런저런 분규로 입은 재정적인 손실은 매우 컸다. 57회 총회임원회(총회장 권오정)는 대정부 보고서 - “대통령 정책실장님께 드리는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991년 사태 때 60, 1996년 의약분업으로 인한 분규로 100, 2002년 파업으로 인한 손실 200억 원.

6) 고신의료원 50년사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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