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종교로서의 인터넷 설교를 극복하라

김대진 박사(설교학 Ph.D.)
김대진 박사(설교학 Ph.D.)

 

들어가는 글

인터넷 설교는 단지 설교에 대한 좋은 정보를 제공하는 종교 온라인의 역할을 오래 전에 뛰어 넘은 것으로 보인다. 앞의 글에서 살펴 본 것처럼 이미 인터넷 설교는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대체 종교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대체 종교로서의 인터넷 설교와 거기에 빠져드는 설교자들의 설교표절 문제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만 하는가? 인터넷 설교와 설교표절에 대한 신학적 문제와 그 대안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체하는 온라인 종교로서의 인터넷 설교

소통 기술과 환경의 혁명적 발전은 기존 종교의 대체물이 될 수 있는 온라인 종교를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는 인터넷 설교가 가지고 있는 이런 대체 종교의 모습 속에서 신학적 위험성들을 보게 된다.

설교자는 단순히 설교거리를 찾아내어 종교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말 잘하는 말쟁이가 아니다. 설교자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칼빈의 개혁주의 사상에 기초한 스위스의 제2차 헬베틱 신앙고백서(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에서 고백한 것 같이 -“praedicatio verbi Dei est verbum Dei” (THE PREACHING OF THE WORD OF GOD IS THE WORD OF GOD) -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자는 말하는 자이기에 앞서 말씀을 듣는 자이다.

일찍이 판 하른(Van Harn)은 설교하기에 앞서서 교인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설교자를 선구적 청취자”(pioneer listeners)라고 불렀다. 위에서 언급한 헬베틱 신앙고백과 판 하른의 말에 따르면 교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임명된 선구적 청취자(appointing pioneer listeners)”들이 선포하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만약 설교자가 기도함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본문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과정이 없이 설교한다면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는 설교는 세상의 강연 혹은 타종교의 강론과 다를 것이 없다. 설교자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청중들은 그 말씀을 경청할 의무가 있고 또한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 종교로서의 인터넷 설교는 설교자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수십만 편의 설교 저장고와 놀라운 예화의 보고로 인도한다. 설교자들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도 않고 말할 거리로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설교거리들을 인터넷 설교에서 찾아낸다. 대체종교로서의 인터넷 설교 사용자들은 누가 얼마나 좋은 자료에 접속하여 잘 편집하고 짜깁기 하여 감동적인 연설문을 만들어 내는가에 의해서 설교가 결판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어느 정도의 학문적 훈련만 되어 있으면 첨단의 표절 검색기로 검사를 해도 걸리지 않을 만큼 인터넷 설교를 이용하여 완벽한 설교문을 완성해 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설교문에 멋진 외모와 유창한 발음 그리고 좋은 목소리로가 곁들여 지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인터넷 설교에 의해서 태어난 설교는 하나님과는 별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쳐서 복종 시키는 설교자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9:27).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드는 이런 인터넷 설교의 문제는 매우 위험한 신학적 문제임이 분명하다. 여기에는 사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보다 독자들의 반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반응비평주의라는 신학적 영향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독자반응비평주의 영향으로 그 설교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보다는 그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종교적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신학적 경향들이 생긴 것이다.

따라서 인터넷 설교와 설교 표절은 단순한 도덕적, 윤리적 문제이기에 앞서서 근본적으로 신학적 문제이다. 스텔렌보쉬 대학교의 설교학 교수 실리에(Cilliers)는 이러한 독자반응중심, 즉 청중반응중심의 신학적 경향들이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우리 자신의 문제들과 신념들”(our own agendas and beliefs)을 따라 성경을 오용하고 남용하는 결과를 초래 할 수 있음을 일찍이 경고했다. 합동신학대학원의 이승진 교수는 인터넷과 전자 미디어의 발달 덕분에 설교자들은 설교 준비 과정에서 진지한 인격적인 관여가 배제된 채로 다른 설교자들의 설교를 활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유혹에 직면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런 현실적 유혹에 따라서 설교현장은 청중들의 단발마적인 감동과 즉흥적인 체험을 고취시키는 설교 상품을 소비하는 종교적인 오락장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면 하나님을 대체하는 대체종교로서의 인터넷 설교와 그에 따른 설교 표절의 문제는 신학적으로 매우 위험한 문제라는 점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과정이 없이 인터넷 설교로 설교 준비를 마치는 일은 하나님의 자리에 온라인 종교를 올려놓는 위험한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이 될 수 있다.

 

2. 인터넷 설교의 산물인 설교 표절과 종교적 체험만을 강조하는 바알주의와의 유사성

위에서 보았듯이 설교 표절은 윤리적 문제를 넘어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하는 신학적이며 영적인 문제이다. 설교학자 토마스 롱은 하나님의 말씀과 단절된 종교적 경험은 바알 숭배로 빠질 신학적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사람들은 종교적 경험을 추구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고, 그 종교적 경험을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의지하기보다는 늘 바알에게 의지하곤 했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산에 머물고 있었다. 모세의 내려옴이 더딤을 본 백성들은 아론에게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32:1)고 요구한다. 이런 백성들의 종교적 갈망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내고야 만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과 상관없이 종교적 체험과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 금송아지를 만들어 낸 백성들을 향해 저들이 부패했다고 말씀하신다(32:7).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는 금송아지를 섬기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착각한 백성들의 부패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생략한 채 인터넷 설교를 통해 만들어진 표절 설교 사이에 유사성이 있어 보인다.

대체 종교로서의 인터넷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는 종교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청중들의 종교적 감동과 경험을 위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생략한 채 인터넷 설교를 의지하는 설교자들도 바알 숭배자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3. 인터넷 설교와 설교 표절은 극복되어야 한다.

위에서 살펴 본대로 설교 표절은 근본적으로 신학적인 문제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설교준비에 대한 신학적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설교 표절을 말하기의 측면에서 이야기 할 때는 안진섭 목사가 27차 열린대화 마당에서 주장한 것처럼 무엇이 설교 표절인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모호한 측면들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글로 작성되는 논문과 달리 설교는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인용문의 출처를 다 밝히기는 쉽지 않다. 예를 들면 예화, 어떤 단어의 사전적 의미, 주석의 출처 등을 상세하게 밝히기는 어렵다. 예화의 경우는 출처가 불분명한 예화가 많아서 일일이 출처를 밝히기가 만만치 않다. 다만 표절을 피하기 위해서 설교자들은 가능한 한 출처가 분명한 예화를 사용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단순히 사전을 보면 이런 뜻이라고 밝히는 정도면 족하다. 설교자가 주석을 참고하여 묵상한 후 자신의 언어로 재해석하는 경우, 일일이 주석의 출처를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교회사에 있었던 탁월한 설교를 출처를 밝히면서 인용하여 설교하는 경우도 표절로 간주할 수 없다. 이렇게 여러 경우를 가정하다 보면 설교 표절이 무엇인가를 정리하는 것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다양한 주석과 책들을 읽는 가운데 이미 자신의 것으로 소화흡수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경우까지 다 출처를 밝힌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설교 표절 여부는 설교자 자신이 가장 잘 안다. 타인의 설교를 표절하는 목회자들은 대부분 출처를 알면서도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출처를 밝히지 않고 남의 설교를 표절하는 경우가 많다. 앞으로 전문 설교학자들이 설교 표절의 문제를 보다 깊이 연구하여 명확하게 정의해 주기를 바라면서 설교 표절이 무엇인가에 관한 정리는 이 정도로 끝내고자 한다.

안진섭 목사의 주장처럼 설교는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 설교 표절인가를 정의할 때 모호한 측면들이 많이 생긴다. 말하기 측면에서는 설교 표절의 기준을 세우기가 애매모호하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설교자는 말하기 이전에 듣는 자이다. 설교에서 말하기보다 중요한 것이 듣기의 측면이다. 우리의 해석학적 태도가 정보를 읽고 파악하는 데서 멈춘다면, 인터넷 정보망에서 설교 거리를 찾아 헤매는 정보 검색자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필자의 글에 의하면 설교자의 해석학적 태도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한다.

성경을 단순히 읽어내는 대상으로만 생각한다면, 성경은 나 혹은 우리의 사상과 의제(agenda)를 정당화시키고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의 사상과 계획을 성경에 맞추고자 한다면, 성경으로부터 듣고자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청취 해석학은 청자가 중심이 된 해석학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듣는 다는 것은 발화자의 은총을 필요로 한다. 청취 해석학은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청자의 자세와 철학을 강조한다.

이와 같이 설교에서 성경 본문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 듣기는 필수적인 부분이다. 그러므로 듣기의 측면에서 설교를 바라본다면 설교 표절의 기준이 보다 분명해 질 수 있다. 설교 표절의 기준은 말하기로서의 설교에 앞서서 듣기로서의 설교라는 측면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2차 헬베틱 신앙고백서의 고백처럼 성도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심지어 어느 설교자가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면서 혹은 설교집을 읽으면서 그 설교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설교 표절의 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설교를 표절하는 설교자는 다른 설교자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설교거리를 찾는 수준에 머물러 있게 된다. 따라서 거기에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보이지 않는다.

듣기 측면에서 보면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설교자라 할지라도 타인의 설교를 그대로 베껴서 설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타인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그 설교자는 내가 어찌할꼬!”(2:37) 하며 그 말씀에 스스로 반응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은 하나님과 그 설교자와의 관계 속에서 탄생한 오리지널한 사건이기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오리지널하게 만드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의 존재와 반응도 오리지널한 것이기 때문에 타인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할지라도 타인과 똑같이 설교 할 수는 없게 된다.

또한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 음성을 들은 설교자는 그 설교자의 기도와 묵상의 수고를 자신의 것인 냥 포장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안진섭 목사의 말처럼 거의 말씀을 연구하지 않는 설교자들이 성실한 연구를 통해 말씀의 깊은 세계를 경험한 듯 보이기 위해 영성 깊은 설교자들의 설교를 표절하는 것이다.” 만약 어느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그 설교자는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설교해 준 그 설교자를 언급하며 감사의 마음을 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어떤 설교자가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타인의 설교를 교인들에게 전하고자 한다면, 그 설교가 누구의 설교인지 밝히고 그 설교를 통해 은혜 받은 설교자의 고백과 함께 선포할 수 있다. 이것은 설교 표절이 아니라 설교 인용이 될 것이다. 공동 설교문과 같은 경우의 설교들은 표절 설교가 아니라 인용 설교라 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 이런 말씀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본문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정주채 목사의 말처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설교자의 인격과 삶을 통과하여 선포될 때 설교가 되고 설교는 설교자의 인격과 삶을 통하여 나온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물로서의 오리지널한 인격체인 한 설교자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인격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면 그 설교는 독창적인 것이다.

이와 같이 듣기로서의 측면에서 설교를 보면 오리지널한 설교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다. 성경을 올바로 해석함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본문으로 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설교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먼저 들은 그 말씀이 설교자의 오리지널한 인격을 통해 선포된다면 그 설교는 오리지널한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설교자가 성경을 묵상함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와 그 분의 말씀인 성경과 상관없는 다른 수단만을 이용하여 설교 거리를 찾아 설교 한다면 큰 틀에서 이러한 설교는 오리지널한 설교가 아니라 표절 설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도하며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타인의 설교를 통해 설교거리를 찾아 전전하는 행위 전반을 설교 표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주채 목사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설교준비의 바탕이며,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고 소통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여기서 설교 준비의 바탕이 닦여야만 설교 표절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가는 글

오락거리가 되기를 자처하는 대중문화에서도 표절은 심각한 문제가 된다. 훈련을 위해 제출하는 대학생들의 과제물도 표절은 빵점 처리의 대상이 된다. 만약 어떤 신대원 학생이 설교 실습시간에 남의 설교를 베껴서 설교한다면, 담당 교수가 책망하기 전에 동료들의 무서운 질책을 받게 될 것이다. 하물며 주의 몸 된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거룩한 사명으로서의 설교에서 표절은 결단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신학적이며 영적인 문제이다.

기도와 말씀이 사라진 정보 검색차원의 설교 준비는 설교 표절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생략하고 타인의 설교에서 설교 거리를 찾아 헤매는 모든 행위들이 바로 설교 표절이다. 인터넷 설교가 하나님과 설교자들 사이의 관계를 대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극복되어야 마땅하다.

인터넷 설교는 설교자들을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만드는 촉매제가 되어야 한다. 인터넷 설교를 운영하고 이용하는 모든 사람들은 인터넷 설교가 종교 온라인 시대의 바알숭배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그 운영과 사용의 방향을 개선해야만 할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들은 다음 글에서 다루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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