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죽음에 대한 단상, 그리고 절대적 허무주의
- 신의 죽음에 대한 담론: 신을 중요한 주제로 취급
- 절대적 허무주의: 신을 담론 바깥으로 몰아내
- 미래 기독교 담론은 절대적 허무주의를 대비해야 할 것

김삼열 목사(고신대 신학과 B.A. 고려신학대학원 M.Div, 영국 아버딘 대학교M.Th, 벨기에 루뱅카톨릭 대학교Pre-Doctoral Program, 한울교회 부목사)
김삼열 목사(고신대 신학과 B.A. 고려신학대학원 M.Div, 영국 아버딘 대학교M.Th, 벨기에 루뱅카톨릭 대학교Pre-Doctoral Program, 한울교회 부목사)

 

 신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반응

포이어바흐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본질’에서 대담한 주장을 한다. 신이란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의 가장 아름답고 이상적인 모습을 모아서 신이라는 가상 존재에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신의 형상은 인간의 형상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개념을 연구할 수록 인간의 사유와 이상향에 대해서 더욱 깊이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신학은 인간학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포이어바흐는 신의 죽음을 선포한 것이다.

신의 죽음에 대하여 두 가지 반응이 나올 수 있다. 첫 번째 반응은 다음과 같다. 만일 신이 죽었다면,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형상을 신에게 투영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이상을 투사할 대상을 상실한 것이다. 따라서 신의 죽음은 인간학의 상실을 의미한다. 신학이 인간학이라고 주장한다면, 신의 죽음은 더 이상 인간에 대한 유의미한 논의를 진행할 무대의 상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신의 죽음은 곧 인간의 죽음이다. 인간을 투영하는 신이라는 존재와 관념이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곧 인간에 대한 판단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의 죽음은 동시에 인간에게서 신성 및 신비로움을 박탈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상적인 형상을 투영할 틀로서 신의 존재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상적인 형상을 신적으로 승화시킬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상의 죽음은 인간의 탈신성화다. 마찬가지로 신과 신학의 죽음은 인간의 형상을 더 이상 신비롭고 초월적인 것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의 상실이다. 그러므로 설사 신의 형상이 인간학의 산물일지라도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연결된다. 신의 존재와 관념은 그것의 실제 여부 또는 생사 여부와 무관하게 인간학과 인간의 존재 의미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신의 죽음에 대한 두 번째 반응은 결이 다르다. 이에 동조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인간은 자신이 신이 되기 위해서 신을 죽인 것이다. “신은 죽었다. 그러므로 내가 신이다”라는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존재와 그 의미는 신을 살해할 때, 비로소 획득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막스 슈티르너는 신의 죽음은 인간이 신의 자리에 등극하기 위한 프리퀄이라고 선포한다. 요약하면, 인간의 자유와 절대성을 획득하기 위해 인간은 신을 살해한 것이다.  

신의 죽음을 논하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신이라는 존재는 인간의 존재와 그 의미와 연동되어 다루어진다. 일각에서는 인간의 신비롭고 고귀한 차원을 보존하기 위해서 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다른 측면에서는 인간의 절대성과 자유를 위해서 신의 죽음을 선포한다. 이처럼 신은 인간 존재와 생의 의미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신을 부정하는 순간에도 인간 사유의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니체는 외친다(Nietzsche, The Gay Science). “신의 그림자는 모든 곳에 있다. 심지어 우리 안에도 있다. 설사 우리가 회의론자 또는 무신론자 일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2천년간 종교의 프로그램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저작 게이 사이언스)
(니체의 저작 게이 사이언스)

절대적 허무주의

그러나 신이라는 주제는 절대적 허무가 지배하는 정황에서 무의미해진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신의 생과 사의 여부, 신을 부정할 것이냐 수용할 것이냐 여부는 인간 존재와 생의 의미를 구하기 위해서 다루어진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와 생의 의미가 절대적으로 허무해지는 순간 신이라는 존재와 신에 대한 신학적 의문은 무의미해진다. 절대적 허무의 세계에서 인간의 존재와 생의 의미를 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로트레아몽 백작은 “말도로르의 노래”에서 기존의 관념과는 완벽하게 다른 모습의 신을 발견한다. 시적화자가 눈을 하늘로 올려 바라본 신의 모습은 인간의 가장 고상하고 이상적인 이데아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 그가 발견한 신은 인간의 배설물과 금으로 만들어진 왕좌에 앉아 있다. 씻지 않은 더러운 옷을 입고 술에 취한 채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주정뱅이 신의 모습이다. 스스로를 창조주라고 부르면서, 인간의 썩은 시체를 손에 쥐고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신이다. 그래서 그의 입가 수염에는 인간의 뇌수가 가득 묻어 있다. 이는 절대적 허무에 직면한 인간의 모습이 투사한 것이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허무한 세상에서 되는대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보는 지옥의 개념은 전통적 신학의 것과 다르다. 신학자들은 지옥을 하나님의 사랑이 박탈된 곳 또는 결핍된 장소로 구성했다. 그러나 그는 더 깊은 심연의 지옥이 있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천국 개념은 천국을 준거점으로 사유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천국과 대비된 장소로서 지옥, 다시 말해서 천국의 반대 개념으로서 사유된 지옥인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 지옥이란 천국에 대한 모든 준거점이 완전히 상실된 장소다. 천국의 반대 개념으로서 지옥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곳과 대비되는 가운데 사유되는 지옥이 아니다. 지옥 그 자체를 사유한다. 이는 절대적으로 허무한 인생의 그대로 투영된 사유의 결과물이다. 희망과 삶의 존재, 의미를 사유할 수 없는 장소로서 지옥이 드러난다. 그러한 지옥에서 신, 천국, 희망은 반대편에서조차 상상될 수 없다. 

이러한 절대적 허무주의가 이론화 될 때, 두 가지 문제점이 발견된다. 먼저 신의 관념이 철저하게 비틀어진다. 인간의 형상이 투사된 신의 모습은 처참하다. 더 이상 신의 문제는 이상적인 모습을 한 신의 존재를 부정할 것이냐 수용할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신의 존재 자체가 처참할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사유할 의미조차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두 번째로 절대적 허무주의는 신 그리고 천상 세계와 연결점이 끊어진 세계를 사유한다. 따라서 신의 존재는 더 이상 인간의 사유에서 존재할 수 없다. 

이처럼 절대적 허무는 신이라는 질문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절대적 허무 속에서 인간 존재와 생의 의미가 처절하게 거부 당할 때, 신에 대한 신학적 질문은 불필요하게 된다. 신 자체가 인간의 사유에서 쫓겨나게 된다. 신을 부정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더 이상 논의 대상이 아니다.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또는 회의주의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더라도, 적어도 신을 중요한 철학적 주제로 취급한다. 그러나 절대적 허무주의는 신을 담론 자체에 들어오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결론

여태 살펴본 바처럼, 신의 죽음보다 더 위협적인 것은 절대적 허무주의다. 신의 죽음을 다루는 담론에 대응하는 신학적 결과물들은 충분히 나왔다. 그 결과물들이 전통신학의 관점에서 수용할 수 있는 것이든지, 없는 것이든지 간에 적어도 신의 존재가 담론 바깥으로 벗어나게 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논의하고 비판할 수 있는 무대 안에는 존재한다. 

그러나 절대적 허무주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데 관심이 없다. 다만 담론 바깥으로 쫓아내어 버린다는 점에서 더 위협적이다. 인간의 사유에서 아예 신의 존재를 잊혀지게 한다는 점에서 더 위협적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기독교 담론은 절대적 허무주의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고 대비해야 할 것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