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셀라 알트하우스-리드/ Marcella Maria Althaus-Reid는 라틴아메리카 매춘부들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
- 예수 그리스도는 외설적이고 단정치 못한 존재로 묘사
- 외설적 기독론은 크게 3가지 오류(그릇된 출발점, 우상화, 신인동형론적 오류)

 

서론

아르헨티나 출신 여성 신학자인 마르셀라 마리아 알트하우스-리드/Marcella Maria Althaus-Reid의 신학적 작업의 평생의 목적은 여태까지 배제되어 왔던 여성의 삶과 경험을 신학 담론의 형성의 장으로 불러내는 것이었다. 특히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여성들, 라틴아메리카의 매춘부들의 삶과 경험이 신학의 출발점과 자양분이 될 수 있기를 원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삶과 동떨어진 신학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약자들을 더욱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하는데 부역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라틴아메리카의 매춘부들의 삶과 경험을 기독론의 출발점으로 삼고, 그녀들의 삶과 경험을 신학적 담론에 반영하고자 했다. 그렇게 형성된 담론이 약자를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체제에 균열을 낼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 극빈층 매춘부들은 공공화장실이나 길거리에서 빠르게 성매매를 하기 위해서 스커트 안에 속옷을 입지 않는다. 단속이 오기 전에 빨리 시작하고 해치워야 하기 때문이다.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본고의 제목은 Althaus-Reid가 라틴아메리카 극빈층 여성들, 특히 극도로 경제적으로 빈곤한 여성들이 매춘하는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려내고자 한 시도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SCM Press. Marcella Maria Althaus-Reid의 생전 사진)
(사진=SCM Press. Marcella Maria Althaus-Reid의 생전 사진)

 

1. 방법론적 도전: 존재론적 신학 방법론 비판

Althaus-Reid는 그 동안 신학적 담론에서 배제되었던 여성들, 특히 라틴아메리카의 매춘부들의 삶과 경험을 신학적 담론의 출발점으로 삼기 위해서, 기존의 전통적인 신학 방법론에 도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전통적 신학적 방법론을 비판한다. 전통적 기독론의 문제는 전능하시고 전재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그리스도의 관계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늘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 간의 내부적 관계에서 기독론이 형성되고 발전하면서, 기독론은 영원에 대한 차원으로 세속에서 멀어졌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실제적인 삶과 경험의 좌소에서 멀어졌다는 것이다. 신학은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담론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이는 실제적 삶과 경험에서 동떨어진 관념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 결과 기독론을 비롯한 신학적 담론에서 인간의 실제적인 삶과 경험은 사라진다. 특히 사유의 주체가 될 능력이 없는 이들, 교육 받지 못한 하층민들의 삶과 경험은 신학적 담론에서 자리할 곳이 없다. 따라서 그들과 하나님의 사이는 멀어지고, 하나님은 바닥에 있는 자들과 동떨어진 분, 무관한 분처럼 그려지게 된다. 대신에 사유의 주체가 될 능력이 있었던 엘리트들의 사고가 신학적 담론을 가득 메우게 된다.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기독론을 비롯한 신학 담론은 엘리트의 전유물이 되고, 그들의 사고를 대변하는 체제가 된다. 엘리트와 기득권들을 위한 체제를 공고하게 만드는 것으로 변질된다고 비판한다.

반면에 해방신학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삶과 경험에서 출발한다. 신학적 담론을 그들의 삶과 경험을 기반해서 발전시키기 때문에, 아래로부터의 신학(from below) 라고 부른다. Althaus-Reid는 해방신학이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들의 경험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전통적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신학적 방법론을 극복했다고 높게 평가한다. 신학적 담론의 장에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지게 했고, 실제적 삶과 경험과 괴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해방신학 역시 한계가 뚜렷하다고 지적한다. 출발점이 되는 가난한 자와 억압 받는 자의 삶과 경험을 정치적, 경제적 차원으로만 환원한 것이다. 그래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차원에서 억눌린 자들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된 신학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 가난과 억압을 극빈층 여성들의 매춘과 같은 성적 억압의 차원까지 발전 시키지 못했다는 점을 비판한다.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인 라틴아메리카의 매춘부를 가난한 자에 포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적인 억압을 겪고 있는 매춘부의 삶까지 신학의 담론으로 초대하지 못했다. 심층적으로 가난과 억압을 신학적으로 제대로 전유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해방신학과 그녀의 신학적 작업은 갈라진다. 해방신학에 가한 이러한 차원의 비판은 전통적 기독론에도 다시 한 번 적용된다. 

Althaus-Reid는 전통적 기독론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가 수태 되었음을 강조하면서, 성적인 결합을 배제한 성자의 탄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 결과 인간의 sexuality에 대한 차원을 배제한 기독론이 형성되고 발전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결국 인간의 성적인 경험은 다시 신학적 담론에서 배제된다. 성이라는 인간의 삶의 중요한 측면을 담아내지 못하는 신학적 담론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인간의 sexuality를 배제한 서구 기독교 전통은 삶의 품위와 정절을 강조하게 된다. 아버지 하나님에 의한 수태. 동정녀 마리아의 출산. 예수 그리스도의 독신의 삶에서 형성된 기독론은 여성의 성적 억압의 경험을 철저하게 배제하며, 가장 소외되고 낮은 자인 라틴아메리카의 매춘부들의 삶과 경험은 불경한 것으로 취급한다. 

따라서 가난하고 억눌린 여성은 기독론과 신학적 담론의 형성 과정과 대화에 자리할 수 없게 된다. 서구 전통 기독론은 가난하고 억눌린 여성의 현실과 괴리된 형이상학적이며 존재론적인 관념으로만 남게 된다. 다시 한 번 전통적 신학 방법론에 대한 비판이 전개된다. 실제적인 삶과 경험, 특히 성적인 착취와 억압에서 출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탄생에 집중하는 기독론은 하늘과 땅의 괴리를 더욱 깊게 만든다. 여태까지 살펴본 바처럼, Althaus-Reid는 집요하게 전통적 신학적 방법론을 물고 늘어진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아래로부터의 신학 방법론을 강조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해방신학은 방법론에서 옳았으나 범위가 협소했다.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라틴아메리카 매춘부의 삶과 경험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려는 기독론적 시도는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신학 방법론에 도전이었다. 그녀의 관점에서 소외되고 고통 받는 자를 배제하고, 그들을 억압하는 체계에 부역하는 신학 담론을 생산해내기 때문이다. 방법론적 전복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러한 담론은 계속해서 생산될 것이고 억압과 착취는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매춘부의 삶' 포스터. 사진=ko.swewe.net)
(영화 '매춘부의 삶' 포스터. 사진=ko.swewe.net)

 

2. 외설적 기독론(Indecent Christology)

Althaus-Reid의 관점에서 여성의 성적 억압의 경험을 포함하지 않는 기독론과 신학적 담론은 결국에 여성의 욕망을 억압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고 본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서구의 전통적 신학은 아버지와 아들의 내적관계, 성적결합 없는 그리스도의 탄생,  예수의 독신에 집중하면서 성적 차원을 철저하게 배제한다. 자연스럽게 품위와 정절, 욕망의 억제를 강조하게 된다. 여성의 삶에 대한 통제와 억압, 침묵을 요구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서구 전통 신학 담론과 가부장제는 은밀한 동맹관계에 있다고 본다. 여성의 성적 욕망을 통제 하에 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여성의 성적인 삶과 경험에서 출발한 신학은 외설적인 신학(indecent theology)로 발전한다. 매춘의 경험에서 출발하고 형성된 기독론과 신학적 담론은 더욱 외설적인 특징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담론은 여성의 욕망을 억제하고 통제하지 않는다. 여성의 욕망의 고삐가 풀리는 것이다. 여성의 참된 해방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불결한 것으로 취급된 매춘부들의 삶은 외설적인 신학 안에서 의미를 얻게 된다. 

매춘과 같은 외설적인 차원이 신학에 흘러 들어오는 것을 비판하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그녀는 매춘을 경제적 차원으로 재해석하려고 한다. 매춘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이들의 불가피한 경제적 선택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등장하는 과부 역시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의 차원에서만 해석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한 여성을 지칭하는 표현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들에 대한 성경적 표현은 사회적, 경제적 차원을 포괄하는 좀 더 폭 넓은 것이기에, 매춘 역시 경제적, 사회적 이슈로 재해석 해내는 것이 무리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정치신학, 사회신학, 경제신학의 일종으로 재해석 해내려는 시도였다. 

그러므로 매춘을 품위와 정절, 도덕적 차원에서만 접근할 필요가 없다. 해방신학이 그리했던 것처럼, 매춘을 경제적, 사회적 억압이라는 신학적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매춘부의 삶과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기독론의 신학적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매춘부의 삶과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반영하는 신성한 것으로 승화된다. 그래서 치마 속에 속옷을 입지 않은 그리스도라는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묘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매춘부 여성의 삶과 경험을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출발점과 토대로 삼으면서, 기존의 전통적 기독론이 그리스도를 a normal man으로 정의해온 것에 도전한다. Althaus-Reid의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일반적인 남자로 정의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성애적 규범 내에서 정상으로 규정된 남성에 가두어 둔 것이다. 이성애적 시스템과 이성애적 시스템에서 허락된 남성을 신의 형상으로 삼으면서, 이성애와 남성 중심의 사회부역하는 신학적 담론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이성애 사회 체제에서 정상적인 남성이 아닌 모든 존재, 특히 다른 성적 지향성을 가진 존재들, 레즈비언과 트렌스젠더와 같은 이들을 사회 주변으로 밀어내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이성애적 남성으로 국한 시키는 것은 다양한 성적 지향성을 가진 이들을 소외 시키는 이성애적 시스템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접근일 뿐이라고 목소리 높인다.

반면에 여성의 매춘 경험이 반영된 외설적인 기독론(Indecent Christology)은 이성애적, 남성 중심적 체제를 유지하는 시스템을 해체한다. 이성애적 시스템과 남성중심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이 신학 담론 중심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과 경험이 거룩한 담론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양한 성적 지향성의 자유를 허락한다. 다양한 성적 옵션들이 제공된다. 이성애적, 남성 중심적 체제를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사회를 신학적으로 정당화 시키지 않으면서, 성적 지향성의 자유로운 세계, 즉 성 유토피아를 열어갈 것이라고 기대한다. 연장 선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성애적 남성의 성적 지향성만 취했다고 보기보다, 가능한 모든 성적 지향성을 취하셨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다양한 성적 지향성을 가진 이들의 삶과 경험이 신학적 담론에 허용되고, 그들의 삶과 밀접한 하나님의 형상이 발전한다. 하나님은 이성애적 사회에서 억압된 이들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성애적 사회에서 억압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드러내는 거룩한 것으로 승화된다. 

외설적인 실재들을 신학에 끌어 들이면서 그녀는 강하게 소리 높인다. 실재는 decent(품위 있는)하지 않다. 실재는 indecent(외설적인)한 것이다. 따라서 실재는 스캔들이다. 그러나 삶이 그러하다. 고로 삶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신학은 필연적으로 Indecent Christology로 귀결된다고 결론 짓는다.

 

(사진=세종방송. 성자 안토니우스(251-356)가 성사를 준 매춘부. 그녀는 성사 이후에 한 평생 남장을 하고 수도사로 살았다.)
(사진=세종방송. 성자 안토니우스(251-356)가 성사를 준 매춘부. 그녀는 성사 이후에 한 평생 남장을 하고 수도사로 살았다.)

 

 

3. 비판적 평가

Althaus-Reid의 외설적 기독론은 크게 3가지로 비판할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기독론의 토대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녀는 아버지와 아들의 삼위일체 내적 관계를 출발점으로 삼는 방법론을 비판한다. 동시에 동정녀 탄생 그리고 독신의 삶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 역사와 경험에서 출발하는 기독론의 방법론도 비판한다. 대신에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들의 역사와 경험을 기독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즉,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경험보다 특정 주체의 역사와 경험에 기대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담론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존재의 삶과 경험으로 구성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담론이라는 모순에 빠진다. 과연 타자의 삶으로 구성되고 설명되는 나에 대한 담론은 어떤 것일까?

두 번째로 특정 주체의 삶과 경험에서 출발하고 형성된 기독론은 결국 인간의 모습이 투영된 우상이다. 치마 속에 속옷을 입지 않은 그리스도는 매춘부의 모습이 투영된 그림이다. 결국 인간의 삶과 경험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투영시키면서, 특정 주체의 삶과 경험을 신성화 시켜 버린 것이다. 이는 피조물의 형상에 하나님을 가두어 버린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다(이 부분에 대해서 Jean Luc Marion, God without being을 참고하라). 결국 인간학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유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매춘부에 대한 사유일 뿐이다. 반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원하는 모습대로 만들어낸 그리스도일 뿐, 그리스도 그 자체 모습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과도한 신인동형론적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로서 우리의 삶과 경험에 공감하시지만, 인간의 모든 본질 특히 부정적인 차원을 소유하지는 않으신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환언하면, 인간 삶의 부정적 차원은 그리스도를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정 주체의 삶과 경험을 출발점과 토대로 삼다가, 성자 그리스도의 비공유적 속성과 초월성을 놓쳐 버린 것이다. 결국 출발점과 토대로 삼은 특정 주체의 인간적인 모습을 반복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Althaus-Reid의 외설적 기독론은 그릇된 출발점을 설정했다. 매춘부 여성의 삶과 경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려냈다. 여성의 형상에 기대어 하나님의 형상을 그려내는 시도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하나님의 역사와 삶을 떠나서 구성된 형상이라는 점이 문제다. 하나님이 아닌 허구적인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매춘부 여성의 삶과 경험을 출발점과 토대로 삼으면서, 여성학으로 전락해버렸다. 신학이 아니라 여성학이 된 것이다. 결국 이는 여성의 우상화로 귀결된다. 매춘부의 삶의 모습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예배하며 섬기게 되는 것이다(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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