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종성(Hybridity)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체제를 흔든다
- 예수 그리스도는 상반되는 정체성이 공존하는 양가적이고 혼종적 존재
- 예수 그리스도의 혼종성을 성적 은유로 재해석 및 재구성한 결과: 성 도착증 환자 예수 그리스도, 양성애자 예수 그리스도

(Kwak Pui Lan이 강의 하는 모습. 사진: 웹진 교회 평화 연구소)
(Kwak Pui Lan이 강의 하는 모습. 사진: 웹진 교회 평화 연구소)

 

서론: 그리스도의 젠더는 중요한가?

Kwak Pui lan은 “그리스도의 젠더는 중요한가?”라는 질문은 다음의 질문으로 번역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위 주체(Subaltern)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가? 신학적 담론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하위 주체에게 중요한 이슈는 신학적 담론에 반영될 수 있는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여성, 양성애자, 동성애자, 트렌스젠더와 같은 젠더와 성 이슈에 있어서 소외되고 억압 받고 있는 하위 주체는 신학적 담론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이슈인 젠더가 신학적으로 중요하게 취급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젠더가 중요하다면, 젠더와 성 이슈에서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신학적 담론을 형성하는 기반과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이다.

그녀도 Marcella Maria Althaus-Reid와 마찬가지로 소외된 공동체와 주체가 신학적 담론을 형성하고 발전하는 과정에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특히 그 동안 다루어지지 않았던 이슈가 신학적으로 취급 받기를 바랬다. 그 동안 들리지 않았던 자들의 목소리와 이슈가 신학 담론의 장에 들어오면서, 백인 남성 엘리트의 사유 한계 내에 머물고 있던 신학적 담론의 지평이 확장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현재 신학이 가지고 있는 인식론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백인 남성 엘리트의 시선에 갇혀서 포착해내지 못했던 그리스도의 숨겨진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 동안 소외되었던 다양한 주체가 경험하는 사회 경제적, 정치적 측면이 신학적 담론에 반영 되면서, 그들의 삶과 경험, 문화와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이미지들이 그리스도에게 투사 된다. 그리스도는 더 이상 여태까지 정통 신학과 교리가 그려왔던 단일한 이미지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게 그리스도는 다양한 모습을 가진 하나의 존재로 재구성 된다. 상반되는 정체성이 공존하는 혼종적(hybrid)인 존재로 묘사된다.

 

1. 혼종성: 정치적, 사회적 의미

탈 식민주의 철학자들은 혼종성(hybridity)을 단순하게 하나의 존재 안에 두 가지 이상의 정체성과 문화가 공존하는 것으로 의미를 축소하지 않는다. 혼종성이 가지는 정치적, 사회적 의미에 주목한다. 지배자들은 지배체제의 법과 규범에 합당한 시민상을 만들어 내고, 그에 부합한 존재를 양산한다. 지배체제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들을 부적절한 존재로 규정 짓는다. 오직 통치 이데올로기 안에서 허락된 정체성만 허락된다. 통치 이데올로기 안에서 이질적인 존재들은 통치 이데올로기 안에서 흡수하고 동질화 시킨다. 그렇게 피지배자들의 특수성을 말살한다. 그리고 흡수되고 동일화 되지 않은 존재들은 법으로 단죄하거나 소외 시킨다. 피지배자들의 고유의 정체성은 불법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통치 이데올로기 안에서 부적절하다고 판단된 존재들의 정체성은 억눌려 있다. 혼종성은 이렇게 부정 당한 존재들의 정체성이 표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통치 이데올로기에 합당하게 길들여진 정체성을 뒤 흔든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부터 일본 신민으로 철저하게 교육 받은 조선인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일본인으로 충실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 우연한 계기로 인하여 조선인으로서 고유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된다. 일본인이면서 조선인이라는 양가적인 자신의 정체성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일본적 특성과 조선적 특성이 복잡하게 뒤섞인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일본의 법과 규범에 의하여 길들여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의 법과 규범과 조선인으로서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처럼 그가 직면한 혼종적 정체성은 제국의 통치 이데올로기에 위협적이다. 저항과 불복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혼종성은 이분법(binary opposition)의 붕괴를 의미한다. 혼종성은 한 가지 사실을 드러낸다. 문화적 순수성은 환상이다. 섞이지 않은 순수한 존재란 없다는 사실. 예를 들면 타 민족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인 순수한 한국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여러가지가 뒤섞인 혼종적인 존재다. 이는 경계선을 분명히 긋고, 정체성을 명확하고 분리하고 구별하는 담론을 해체한다. 존재 사이에 놓여진 엄격한 경계선의 흐려 버리는 것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중심부와 주변부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따라서 혼종성은 지배자들의 통치에 위협이 되는 실증적 증거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위치가 명료하게 구분돠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배자들은 언제나 인간은 복잡하고 다양한 정체성으로 구성되었다는 혼종성의 증거들을 은폐하려고 한다. 그리고 지배자와 피지배자, 중심부와 주변부를 엄격하게 분리하고 구별하는 이분법적 담론을 형성하려고 한다. 혈통의 순수함, 문화적 기원의 순수함 모두 결국 지배자 이데올로기에 부역한다고 비판한다.

탈 식민주의 철학자들이 지적한 혼종성의 정치적, 사회적 의미는 복잡하지 않다. 혼종성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위협한다. 억압과 착취의 지배 체제에 균열을 낸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리스도를 혼종적 존재로 재구성하는 기독론적 작업은 의미가 있다. 지배 이데올로기와 부당한 지배 체제를 신의 이름으로 단죄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배 이데올로기와 부당한 지배 체제에서 억압 당한 이들을 해방하는 담론으로 기여한다.

 

(남성과 여성이 뒤섞인 혼종적 존재를 묘사하는 사진. 사진:Pixababy.com)
(남성과 여성이 뒤섞인 혼종적 존재를 묘사하는 사진. 사진:Pixababy.com)

 

2. 혼종적 예수/그리스도

Kwak Pui lan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러한 혼종적 존재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는 예수와 그리스도 사이에 슬래쉬를 넣어서 표기한다(Jesus/Christ, 한글로는 예수/그리스도). 왜냐하면 상반되는 정체성, 신성과 인성의 양가적 본성이 한 인격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함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역사적 인간과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둘째 위격이 공존한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는 신과 인간 사이의 그어진 경계선 그 언저리 모호한 위치에 서 있는 존재라고 묘사한다.

마찬가지로 신약성경 안에서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 역시 혼종적이라고 주장한다. 신약성경이 제공하는 기독론은 각각의 초대 공동체(팔레스타인 공동체, 헬라 유대인 디아스포라, 헬라 공동체)들이 그들의 삶의 정황과 문화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각각의 이해를 발전시켰음에 주목한다. 신약성경은 다양한 공동체의 다양한 기독론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통일성 있는 기독론을 제시하거나, 하나의 특별한 기독론을 우선적 채택 하지 않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한 인격에 대한 다양한 복수의 이미지를 허용하고 있다.

Kwak Pui lan은 이와 같은 신약성경이 허용하는 그리스도의 다양하고 복수적인 이미지는 로마 제국의 기독교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이라고 해석한다. 로마 제국의 기독교가 제공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미지와 담론에 복속하지 않는 공동체들을 용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녀는 공의회의 교리적 통일은 제국의 프로젝트라고 비판한다. 정통과 이단을 분리하고, 정통 교리 아래에서 기독교를 통일하려고 한다. 이는 하나의 공인된 교리 하에 다양하고 이질적인 존재들을 복속시키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제국 기독교라는 지배 이데올로기 안에 이질적인 복수의 초대교회 공동체들을 복속 시키려는 것이다. 이에 순응하지 않는 공동체와 존재들은 이단으로 낙인 찍고 배제 시켜 버린다. 파문이라는 제도를 통해 기독교 밖으로 축출 시켜 버린다.

이는 통치 이데올로기에 맞춰서 원주민의 다양한 문화와 관습을 말살시키거나 이에 따르지 않는 원주민들을 억압하는 제국의 모습, 저항하는 원주민들을 제국의 시민으로 용납하지 않는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제국의 동일화와 억압의 과정이 종교적인 형태로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는 현대 신학에서도 동일한 제국주의적 프로젝트가 재현되었다고 본다. 신약의 기독론에 있어서 반 유대주의적 경향을 예시로 든다. 예수의 유대적 기원을 삭제함으로서 예수가 가진 유대적, 헬라적 양가성과 복수성을 은폐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의 백인 중심으로 형성된 그리스도의 이미지로 통일하려고 든다. 유럽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지 않는 다양한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은밀하게 폐기해 버린다.

 

(양가적인 성 정체성을 지닌 존재로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 사진:www.nationalreview.com)
(양가적인 성 정체성을 지닌 존재로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 사진:www.nationalreview.com)

 

3. 성적 은유로 재구성된 예수/그리스도

그러므로 신학이 제국주의적 통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제국주의적 억압과 착취에 부역하지 않으려면, 그 동안 기득권이 은폐 해왔던 혼종적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살려내야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Kwak Pui lan은 예수 그리스도의 혼종성을 성적인 은유로 재구성 해낸다. 젠더와 성 이슈에서 은폐되고 있는 자들의 목소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들을 억압하고 있는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기 위해서.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transvestite로 재구성한다. Transvestite는 반대의 성의 복장을 한 성 도착증 환자를 의미하는데, 쉽게 말하면 남장 여자 또는 여장 남자를 의미한다. 남성과 여성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진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 하려한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양성애자로 묘사한다(Bi-Christ).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신적인 정체성과 인간적인 정체성이 공존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남성과 여성의 정체성을 동시에 보유한 성 도착증 환자로 재현한 것이다.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양가적인 정체성을 상대 파트너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넘나드는 양성애자로 재해석 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복수의 성적 지향성을 가진 혼종적인 존재로 재구성하면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갈 곳 없이 방황하던 존재들. 동성 또는 양 쪽 모두에게 욕망을 느끼던 존재들. 그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들의 존재와 성적 지향성에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성애적 사회에서 억압 받는 이들에게 해방구를 열어 놓은 것이다. 나아가서 그들을 억것이고 비정상으로 취급하던 이성애적 사회 시스템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반대편에 있음을 드러낸다. 성 소수자를 억압하는 이성애적 사회 시스템과 이데올로기를 기독론적으로 전면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미지는 한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 정체성은 혼종적일 뿐만 아니라, 유동적이라는 것이다. 상황과 상대방에 따라서 남성일 수도 여성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젠더 유동성(Gender fluidity)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성적으로 유동적인 존재로 묘사함으로서, 남성과 여성의 경계선을 흐려 버린다. 이성애적 시스템의 남성과 여성의 명확한 분리와 구별을 폐기한다. 따라서 고정된 성이란 신학적으로 정당한 개념이 아니다. 욕망에 이끌리는 대로 성 정체성이 형성될 수 있도록 신학적으로 허용한다. 어떨 때는 남자, 어떨 때는 여자, 양성애자, 동성애자 등등. Gender의 경계선이 없다. 그들의 무분별한 성적 지향성과 쾌락에 신학적 정당성 부여해 버린 것이다. 성 유토피아에 대한 야망을 서슴 없이 드러낸다.  

 

4. 비판적 평가

Kwak Pui lan의 혼종적 기독론은 크게 3가지 지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먼저 기독교 인식론에 있어서 수동성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능동성을 과도하게 강조했다는 점이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 소수자들이 자신들의 성적 지향성과 정체성에 따라 해석하고 재구성하도록 도와주었는데, 이는 계시의 수신자들이 계시를 전유하는 방식에 대해서 깊이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드러낸다. 계시를 수신하는 자들은 당대의 역사와 문화에 의해서 조건 지워진 것은 맞다.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의 이미지들로 계시를 전유한 것도 맞다. 이러한 점에서 성 소수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능동적으로 전유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 그러나 그녀가 간과한 점은 계시는 때로는 낯설고 충격적인 이미지로 침범해 들어온다. 당대의 역사와 문화가 온전하게 표현해내지 못하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할 수 없는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자신의 말의 미련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실제로 인간의 언어와 기호로는 차마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이질적이고 다른 차원에서 침범해 들어온 계시 앞에서 인간의 말은 겸손하여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말로 표현하려는 순간 이질적이고 다른 차원의 계시는 왜곡된다. 그리고 인간의 말은 계시의 비밀을 은폐하고 삭제한다.

따라서 인간이 소유한 도구로 계시를 온전히 전유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침묵 가운데 계시를 수동적으로 받아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처럼 인간의 언어와 도구가 겸손해 지는 지점에서 계시는 특정 주체의 역사와 조건에 맞추어서 능동적으로 전유할 수 없다. 계시는 때로는 강제적이고 폭력적으로 침범한다. 인간이 능동적으로 받아낼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녀가 시도한 것처럼 특정 주체의 삶과 경험으로 온전히 전유해낸 그리스도는 계시의 이질적인 차원을 감소 시킨다. 계시 수신자의 수동성을 간과한다.

두 번째로는 신학 담론 형성 과정을 헤게모니 관점에서만 해석하다는 점이다. 과도하게 정치, 사회 신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한다. 특정 주체의 신학 담론 형성은 항상 누군가를 배제하고 억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학 담론 형성 과정을 정치적, 사회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해방 신학적 뿌리를 가진 그녀의 한계다. 그 결과 기독교의 신비적 차원이 감소된다. 더 이상 성자 그리스도의 신비를 다루는 기독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해석으로 전락해 버린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계시를 해석하는 출발점이 계시가 아니라, 특정 주체의 성적 지향성이다. 따라서 계시 자체가 제공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해석의 경계선을 쉽게 넘어 가버린다. 환언하면, 계시가 제공하는 해석의 준거점을 벗어나버렸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해석에 대한 내적 객관성과 설득력을 담보하는 기준이(계시를 받아들이는 공동체 내에서의 객관성과 설득력) 상실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경험에서 출발하고 형성되는 신학적 담론이기에 살아있는 목소리일 수 있으나, 임의적인 창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결과 공감대를 얻지 못하는 성적으로 혼종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이라는 결과를 도출하게 된 것이다(3편에서 계속).

관련기사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