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무한한 개방성과 수용성, 경계를 넘는 사랑은 난잡함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 성적으로 난잡한 육체들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거룩한 형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욕망은 방향성까지 무차별적이지 않다.
-전통적 기독론의 프레임은 경계선을 초월한 사랑을 추구하지만, 경계선을 망각하지 않는다.

(사진: 밴더빌트 대학교 공식 홈페이지)
(사진: 밴더빌트 대학교 공식 홈페이지)

 

서론: 하나님을 드러내는 육신(Flesh reveals divinity)

Laurel C. Schneider는 성육신은 신성이 육체 가운데 충만하게 거하는 것으로써, 신성과 육체의 관계를 재정립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신성이 육체 안에 거하면서, 신성이 가진 타자성과 초월성이 크게 중화되기 때문이다. 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거리감이 확 줄어 버린다. 게다가 신성과 육체의 연합을 의미하는 성육신은 육체에 대한 관점 또한 재고하게 만든다. 그동안 신성의 대척점에서 해석되어 왔던 육체적 특성, 특히 부정적으로 해석되어 왔던 육체적 특성(fleshy characteristics)들은 더 이상 신적인 것의 반대 지점에서 열등한 것으로 취급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성을 온전히 받아내고 연합하면서, 육체는 신성을 담아내는 것으로 승화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담론을 육체적 특성과 연결 시켜 다루는 것에 무리가 없다. 신성과 인성의 거리가 줄어 들면서 양자 간의 절대적인 차이가 더 이상 유의미하게 취급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양자는 성육신으로 인하여 분리할 수 없는 강력한 연합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의 타자성과 초월성을 강조하는 개념들보다, 육체적 특성과 연결 지어서 신에 대한 담론을 형성해야 한다는 주장에 이른다. 욕망, 죽음, 부패, 가변성 등등이 신성을 해석하는 중요한 개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 난잡한 하나님

그녀는 성육신에서 이루어진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신과 인간 사이에 그어진 절대적인 경계를 넘어서 연합한 사건으로 해석한다. 하나님께서 신과 인간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을 넘어 가신 것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놓인 규칙을 범하신 것이다. 성육신은 신적인 사랑과 욕망은 도덕과 규율을 침해하는 종류의 것임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육신은 도덕과 규범, 관습을 어긴 모든 종류의 관계(intercourse)와 사랑을 긍정한다. 뿐만 아니라 성육신은 절대적 타자에 대한 배타성을 극복한 사랑을 드러내기도 한다. 즉, 대상을 가리지 않는 욕망과 사랑을 긍정한다. 요약하면, 성육신은 어떤 것에도 구애 받지 않는 무차별적인 욕망과 사랑, 무한한 개방성과 수용성을 신적인 차원으로 승화 시킨다.

그리고 그녀는 전통적인 기독론의 배타성을 문제점으로 지적하면서, 성육신은 나사렛 예수라는 특정 시대와 장소에 살았던 특정한 역사적 인물과 배타적인 결합으로 축소할 수 없다고 강변한다. 왜냐하면 시대, 문화, 인종, 성별과 같은 특정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진 개인과 배타적으로 연합하는 성육신은 억압과 차별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연합한 특정한 개인의 육체적 특성이 다른 육체적 특성보다 더욱 신적이고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면서, 그 특정한 개인이 가지지 않은 육체적 특성을 가진 이들은 부적합하고 열등한 것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Laurel C. Schneider는 전통적 기독교는 억압과 차별을 양산하는데 있어서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최소한 묵인했다고 비판한다. 결국 전통적 기독교는 지배층과 기득권층의 입맛에 맞게 성육신을 왜곡해 왔다는 것이다.

그녀는 성육신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육체(flesh)의 현대적 이해를 거론한다. 현대 과학 담론이 이야기 하는 육체는 분리된 개별적 존재가 아니다. 유기적으로 모든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다시 말해서, 육체는 무차별적인 개방성과 수용성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육체와 연합한 하나님은 특정 시대와 장소의 특정한 개인과 배타적으로 연합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신 성자 그리스도는 나사렛 예수와 배타적인 결합을 이루셨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성육신은 나사렛 예수라는 특정한 개인에게 갇혀서는 안된다. 따라서 성육신은 시대와 장소, 문화와 인종 등등 특정한 육체적 특성과 연결되어 다루어질 수 없다. 대신에 모든 것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육체가 되시면서(God becoming flesh), 성자 그리스도는 모든 존재와 무차별적으로 관계 하시며 연합 하신다. 다시 한 번 무한한 개방성과 수용성, 무차별적인 욕망과 사랑의 주제는 반복된다.

그녀는 이러한 무한한 개방성과 무차별적인 관계와 연합(intercourse), 금기를 어긴 욕망과 지향성의 특성을 가진 성육신을 성적 은유로 재해석 한다. 그 결과 난잡한(promiscuous) 하나님의 형상을 그려낸다. 금욕적 규범을 어긴 육체들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열어 놓은 것이다. 성에 대한 사회적 도덕적 금기를 어긴 욕망의 행위, 지향성을 가진 존재들을 신학적으로 긍정한다. 동성애자, 레즈비언, 트렌스젠더, 양성애자들 모두 난잡한 하나님을 반영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성적으로 무한하게 개방적으로, 대상에 구애 받지 않고 성적으로 수용하는 이들의 형상인 하나님의 이미지가 등장한 것이다. 앞서 살펴봤던 것처럼, 모든 것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교류하는 육체가 되신 성자 그리스도는 모든 종류의 육체적 물리적 특성을 끌어 안는다. 따라서 어떤 성적 특성도 하나님을 묘사하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

Laurel C. Schneider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성육신은 신성과 인성이라는 이질적인 본성들이 뒤섞인 것이라고 해석한다. 무차별적인 사랑과 욕망, 무한한 개방성과 수용성은 하나로 규정지을 수 없는 복잡하고 혼종적인 존재를 탄생시킨 것이다. 성육신은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 놓여진 경계를 무력화 시켜 버렸다.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분류되는 이분법적 대립(binary opposition)의 공식 또한 허물어 버렸다. 따라서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 놓인 경계선에 놓여져 있는 존재를 긍정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제 3의 성, 남성과 여성 중간 어디쯤 인가에 있는 간성적 존재들 역시 신학적으로 긍정할 수 있다는 주장에 이른다. 그들은 다른 육체들 보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더욱 차별 없이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수용적이기에 난잡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기에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사진: www.independent.co.uk)
(사진: www.independent.co.uk)

 

2. 억압 기재: 부계 중심 경제

그녀는 난잡함이라는 성적 은유가 초래하는 거부감과 당혹스러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 동안 난잡함이라는 성적 은유가 신학적 담론에 등장할 수 없었던 억압 기재에 대해서 설명한다. 난잡함이란 성적 은유는 특정한 집단의 특정한 목적에 의해 억압 되어 있었기에 도발적이고 신성 모독적으로 느껴질 뿐이라는 것이다. 다만 생경할 뿐이다.

Laurel C. Schneider는 난잡함은 부계 중심의 상속 경제를 위협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부계 중심의 상속 경제는 아버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상속하려는 아버지의 씨앗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야만 아들은 상속의 권한을 가진다. 즉, 아버지가 누군지 분명해야 유지될 수 있는 경제 체제라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여성의 성적 욕망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 여성의 성적 욕망이 통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친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그 결과, 부계 중심 상속 경제는 혼란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안정을 위해서 여성의 욕망을 통제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안정적인 경제 시스템을 유지하고, 상속을 두고 일어날 골육상쟁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부계 중심 상속 경제 시스템에서 여성의 성적 욕망은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 안정과 밀접하게 연결된 공적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난잡함이라는 성적 은유는 철저하게 억압 되어 온 것이다. 사회적 불안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은 이러한 은유를 사용해서 여성의 성적 자유를 정당화 시켜서는 안된다. 결국 난잡함이라는 성적 은유가 신학적 담론에서 그 동안 묻혀 온 것은 부계 중심 상속 경제를 유지하려는 가부장 세력과 보수 종교간의 은밀한 담합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반면에 어머니의 정체성이 중요한 모계 중심 사회에서는 성적 욕망을 통제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헷갈릴 우려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머니를 통해 이루어지는 모계 중심 상속 경제는 다툼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성적 개방이 사회 유지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성적 난잡함은 가부장 및 부계 중심의 가족 질서를 뒤흔드는 것일 뿐이다. 가부장제와 부계 중심 사회를 지속하려는 세력에 의해서 난잡함이란 은유는 억압 되었을 뿐이다. 그녀는 현대 사회에서 여성이 경제적 힘을 가지면서 더 이상 부계 중심의 상속 경제는 유효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여성의 성적 통제는 더 이상 현대 사회의 질서와 안정과 연관된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난잡한 하나님이라는 신학적 담론이 용인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강변한다. 도리어 부계 중심 질서가 쇠퇴하는 현대 사회 현실에 더욱 적절한 신학적 담론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서 아직도 부계 중심 사회와 가부장제에 머물고 있는 시대착오적인 신학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녀의 관점에서 난잡함이라는 신학적 개념은 평등 사회로 변해가는 현대 사회에 대한 선제적 신학적 대응이다.

 

(사진: softpedia News)
(사진: softpedia News)

 

3. 비판적 평가

Laurel C. Schneider의 난잡한 하나님 (promiscuous God)은 크게 2가지 지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첫 번째로 그녀가 주장한 욕망에 대한 긍정은 틀리지 않았다. 기독교는 욕망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욕망의 방향성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직 바른 방향성의 욕망만 긍정된다. 모든 종류의 지향성을 긍정하지 않는다. 욕망의 방향성에 따라서 욕망의 종류를 엄격하게 구별한다. 예를 들면,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구별하고 욕망의 방향성에 따라 그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엄격하게 내린다. 육체의 소욕은 싸워서 부정해야 할 것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성육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육체의 연약함을 취하셨으나, 죄까지 수용하고 끌어 안으시지는 않으셨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이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하나님의 개방성과 수용성, 경계를 침범하는 사랑은 방향성까지 무차별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무한한 개방성과 수용성, 경계를 침범하는 사랑과 욕망은 전통적 기독론 프레임 내에서도 충분히 다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동시에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적절한 경계와 규범도 해치지 않을 수 있다. 한 마디로 전통적 기독론 프레임이 더 낫다는 것이다. 전통적 기독론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경계선을 넘는 자유로운 교류를 부정하지 않는다. 신성과 인성은 각각의 특성을 주고 받는다. 두 본성의 교류는 전통적 신학 담론이다. 전통적 기독론은  타자에 대한 무한한 개방과 수용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는다. 전통적 기독론은 동시에 ‘without confusion’을 동시에 강조한다. 두 본성은 결코 섞이지 않는다. 환원하면, 자유롭고 무차별적으로 개방하고 수용하지만, 경계선에 구애 받지 않고 서로를 사랑하지만, 서로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을 망각하지 않는다. 엄격한 분리와 구별은 존재한다. 전통적 기독론에서 사랑과 욕망, 수용과 개방은 경계선을 긋는 사회 규범과 도덕과 대치되지 않는다. 신적 사랑은 반드시 위법적이고 반 규범적일 필요 없다(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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