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젠더는 사회와 문화가 부여한 역할에 지나지 않아. 사회가 부과한 역할을 반복적으로 수행한 것에 지나지 않아.
- 수행성(Performativity): 사회가 부과한 역할과 반대로 반복적으로 훈련 및 수행하면 자신의 의지와 욕망에 따라 마음대로 젠더를 형성할 수 있어.
- 금욕주의: 수행성의 신학화, 종교화된 버전.

몸에 대한 종말론적 열망

    사라 코클리는 20세기 후반의 서구 사회가 집착적일 만큼 몸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음에 주목한다. 특히 서구사회가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는 주제인 장수와 아름다움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인 노화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즉, 현대 서구 사회의 몸에 대한 관심은 죽음에 대한 거부, 죽음을 극복하는 육체에 대한 열망의 표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말론적 열망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젠더 이론가 Judith Butler의 이론은 서구인들의 관심을 빼앗기에 충분하다. 그녀는 반 본질주의(anti-essentialism)과 젠더 유동성(gender-fluidity)라는 개념을 통해서 몸의 고정성을 거부한다. 몸은 유동적인 것으로 생래적인 본질에 갇히지 않는다. 다양한 방식으로 형성될 수 있는 유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생래적인 본질에 의해 결정된 필연적인 과정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서구인들이 가진 몸에 대한 종말론적 열망과 잘 어울린다. 필연적인 죽음이라는 과정을 극복하기 위해 서구인들의 몸부림을 대변한다. 따라서 서구인들이 그녀를 중요한 이론가로 취급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사라 코클리. 사진: 캠브리지 대학교 신학부 공식 홈페이지)
사라 코클리. 사진: 캠브리지 대학교 신학부 공식 홈페이지)

 

    사라 코클리는 몸에 대한 관심이 커갈 수록, 몸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를 내리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다양한 육체의 존재들로 인하여, 몸에 대한 보편적이고 영구한 정의를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범주 안에 쑤셔 넣을 수 없다. 범주와 개념을 미끄럽게 빠져나가는 육체들인 점점 늘어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몸을 정의하던 준거점이 상실되었다고 지적한다. 오랜 기간 서구 사회 정신을 지배해온 데카르트적 영육 이원론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영육 이원론에서 몸은 영혼의 대척점에서 정의되었다. 즉, 영혼이 몸을 정의하는 준거점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육 이원론이 붕괴하면서, 대척점에서 몸을 정의하던 준거점이 상실되면서, 몸을 정의할 수 있는 기준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러한 서구 사회 정신적 변화는 몸을 정의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영육 이원론이 붕괴하면서, 육체를 부정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보지 않게 된다. 영혼의 감옥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육체의 욕망은 긍정된다. 따라서 더 이상 몸의 현재 상태를 극복하려거나 초월할 의지에 연료를 공급받지 못하는 정신적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몸은 성적으로 긍정되었다. 인간의 성적 욕망은 더 이상 영혼을 부패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초월과 극복의 행위보다 쾌락의 행위에 집중하게 된다. 이러한 전반적인 정신적 분위기 가운데서, 사라 코클리는 상대적으로 간과된 반대편 측면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돌린다. 현대인들은 몸과 육체의 욕망을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운동과 다이어트와 같은 수단을 통해서 몸을 처벌하고, 욕망을 억제한다. 더 나은 상태로 몸이 고양되기를 바라는 욕망이 자연스러운 몸의 성향과 욕망을 처벌하고 억제하는 것이다. 생래적인 상태로 몸을 놓아두면, 악화된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붕괴되고 완전히 해체된 줄만 알았던 영육 이원론은 용도 페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 아름답고 건강한 몸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행위 속에 영육 이원론적 사고가 깊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영육 이원론적 사고는 현대 서구 사회에서 몸에 대한 절제와 금욕을 강조한다. 영육 이원론에 기반한 금욕적 차원은 장수, 아름다움 등 늙어감을 극복하려는 열망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죽음의 과정을 초월하는 육체에 대한 열망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영육 이원론이 용도 폐기 되면서, 몸과 욕망을 긍정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한 연유로 현재 상태와 생래적 차원을 초월한 몸에 대한 열망, 즉 육체에 대한 종말론적 열망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몸의 생래적 성향에 굴복한 것처럼 보였다. 그 결과 쾌락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처럼 죽음을 극복하려는 종말론적 열망은 사라진 것 같았다. 죽음을 거부하는 대신에 주어진 시간에 최대한 누리려는 풍조만 가득한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서구인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여전히 영육 이원론적 사고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몸에 대한 종말론적 열망 역시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사라 코클리는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몸에 대한 종말론적 열망이 짙어질 수록 페미니즘의 한계는 뚜렷해진다. Judith Butler와 같이 페미니즘은 몸을 주요한 주제로 다루면서 서구 사회의 관심을 끄는데는 성공했으나, 몸을 지나치게 젠더와 성의 문제로 환원했다. 따라서 젠더와 성 이슈에 몰입하면서, 서구 사회가 가진 몸에 대한 종말론적 열망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라 코클리는 페미니즘을 보완하는 신학적 담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그녀는 버틀러의 젠더 이론을 종말론적 열망으로 치환하려고 시도한다. 페미니즘의 젠더 이론에 담긴 종교적, 영적 의미를 발견하려고 한 것이다. 젠더와 성 이슈에 몰입된 페미니즘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한다. 페미니즘을 종교적 신학적으로 재해석 하면서, 현대 사회에서 페미니즘의 효용성을 입증하려고 시도한다.

 

(쥬디스 버틀러. 사진: http://www.nomadist.org/)
(쥬디스 버틀러. 사진: http://www.nomadist.org/)

 

쥬디스 버틀러: 젠더와 수행성(performativity)

    버틀러는 젠더는 생래적인 것이 아니라고 봤다. 자연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정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대신에 반복적인 수행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라고 본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젠더라는 성역할이란 기존의 사회적, 문화적 시스템이 각 개인에게 부과한 역할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면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자신의 성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존의 사회, 문화에 적합하도록 훈련되고 길들여진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기존의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젠더 시스템, 이성애적 체제는 남성중심 사회 그리고 이성애적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고안된 픽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존의 사회와 문화가 부여한 역할과 반대되는 것을 반복적으로 훈련하는 행위는 지배적인 문화와 담론에 대한 저항으로 간주된다. 쉽게 말하면, 기존의 사회와 문화에서 남성으로 역할을 부여 받은 이가 여성의 역할을 반복적으로 훈련하게 되면, 남성중심적 그리고 이성애적 체제를 위협하게 된다. 따라서 사회가 부과한 역할을 반복적으로 훈련하는 대신에, 자신의 욕망과 의지대로 다른 역할을 반복적으로 훈련하면 기존 체제에 균열을 내게 된다. 그리고 기존 체제가 부과한 역할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된다. 자아의 진정한 실현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반복적 훈련은 동시에 기존의 시스템을 강화하는데 사용될 수도 있다. 기존의 이성애적 시스템 내에서 부여 받은 젠더 역할을 반복적으로 훈련함으로서 기존의 시스템에 충실한 존재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버틀러의 결론은 분명하다. 젠더는 사회와 문화가 부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생래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사회와 문화가 부과한 역할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면서 형성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각 개인이 부과된 역할을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과 의지대로 반복적으로 훈련하면 다른 젠더로 거듭날 수 있다. 즉 몸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형성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변혁에 열려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남성이라면, 그것은 사회와 문화에 의해서 형성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은 여성으로 변혁될 수 있는 여지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반복적 훈련을 통해서 당신은 여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복적 수행을 통해 몸은 가변적인 것이므로, 젠더는 유동적인 것이다. 젠더 유동성(Gender-fludity)를 주장한다. 

    이러한 젠더 유동성을 가능하게 하는 반복적 수행을 버틀러는 수행성(performativity)로 정의한다. 사라 코클리는 이러한 수행성을 현재를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으로의 변혁(transformation)에 대한 열망의 담긴 것으로 재해석한다. 이를 신학적으로 몸에 대한 종말론적 차원의 욕망으로 전유한다. 반복적인 거룩과 경건의 훈련으로 신적인 차원으로 고양되고자 하는 금욕주의적 열망과 수행성이 담고 있는 새로운 차원을 향한 열망은 닮아 있다는 것이다. 버틀러는 변혁에 대한 열망을 긍정한다. 그리고 변혁을 가로 막는 자연적 본질론적 담론을 거부한다. 그러한 담론은 개인을 한 가지 역할에 고정 시킴으로서 현 체제를 유지하려 들기 때문이다. 대신에 반복적 훈련을 통해서 새로운 역할과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욕망과 의지에 따라 자신을 자유롭게 변혁시킬 수 있다. 

    그러나 사라 코클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근본적인 질문 제기한다. 그렇게 자유롭게 자기를 변혁하는 것이 현 체제를 위협하는 혁명적인 차원 말고, 어떤 목표와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묻는다.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와 욕망에 따라 마음대로 행동하는 방종인가? 특정한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있는가? 그저 욕망에 따라 사는 무질서의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궁극적인 목표와 방향이 없다면,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와 욕망에 따라서 현 체제를 혁파하기만 한다면, 무질서와 혼돈 말고 무엇을 더 구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차원에서 목표와 방향, 궁극적 의미를 부여하는 신학적 담론이 요청된다.  

 

(닛사 그레고리. 사진: 1907revival.com)
(닛사 그레고리. 사진: 1907revival.com)

 

종말론적 재해석

    신학적 담론의 필요성에 따라서 사라 코클리는 버틀러의 대화 상대로 닛사 그레고리를 불러 온다. 그에 따르면, 육체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종말론적으로 승화된 육체로 나아가는 변화의 도상 위에 서 있다고 본다. 이러한 주장은 현대인에게는 당연한 이야기 처럼 들리지만, 당시에는 도전적인 담론이었다. 왜냐하면 플라톤주의자들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주의적 전제에 의하면, 신적인 것은 영구하고 변함 없는 것이다. 따라서 변화는 신적인 것으로부터의 이탈, 즉 부패로 간주된다. 그러나 닛사 그레고리는 변화는 부패가 아니라 더 높은 신적인 차원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본 것이다. 버틀러와 마찬가지로 당대를 지배하고 있는 고정성에 대한 담론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꼭 닮아있다. 

    닛사 그레고리는 우리는 지금 지금의 육체로부터 미래의 천사적 육체로 가는 연속 선상 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종말론적으로 실현될 천사적 육체는 본래 창조 상태로 회귀하는 것이다. 타락 이전에 천사적 육체는 non-sexed body, 즉 성 구별이 없는 몸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몸에 대한 종말론적 열망은 남녀 구별이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그에게 금욕적 프로그램은 이러한 종말론적 열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였다. 성적인 욕망을 억누르는 훈련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면서 천사적 육체에 이르는 것이다. 

    사라 코클리는 이를 신학적으로 재전유한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주어진 역할과 본성에 머무르지 않고, 반복적인 금욕적 훈련을 통해서 남녀 구별이 없는 천사적 육체에 이르고자 하는 것은 결국 젠더 유동성을 내포하고 있다. 기존에 주어진 성 정체성을 넘어설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젠더 유동성은 거룩한 몸을 향한 종말론적 열망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성 구별이 없는 천사적 상태에 이르게 하는 수단으로서 반복적인 금욕적 훈련은 젠더 유동성을 실현하는 수단으로서 반복적 훈련과 일맥 상통한다. 즉, 금욕적 훈련은 수행성이 신학화된 것이다. 나아가서 이는 지배적인 젠더 시스템에 대한 도전, 남성과 여성으로 양분하는 이성애적 사회에 대한 혁명과 도전이라고 해석한다.

    이처럼 사라 코클리는 닛사 그레고리의 신학을 통해서 버틀러의 젠더 이론에 신학적,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다. 젠더 유동성은 종말론적 열망으로, 수행성은 금욕적 훈련으로 신학적 번역을 시도한다. 그렇게 신학화된 젠더 이론은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을 부여 받게 된다. 반복적 수행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과 의지에 부합하는 젠더로 거듭나는 행위는 그저 자신의 욕망과 의지를 실현 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방향과 목적 없는 무의미하고 무분별한 욕망의 실현이 아니다. 대신에 종말론적으로 실현될 거룩한 육체에 이르는 하나님의 grand narrative를 실현하는 수단이다. 유동적인 성 정체성과 성 역할을 전복하는 반복적 훈련은 종말론적 실현이라는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을 부여 받게 되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주목해야 될 부분은 닛사 그레고리는 종말론적 변혁에 종착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끊임없이 발전하고 승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종말론적 육체는 특정한 이상과 규범에 갇히지 않는다. 어떤 지점과 모습에 정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더 발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재전유된 수행성과 유동성은 하나님의 grand narrative 안에서 방향과 의미를 획득하지만, 여전히 개인의 욕망과 의지는 자유를 보장 받는다. 특정한 모습으로 빚어질 것을 강요 받지 않기 때문이다. 

 

비판적 평가

    전반적으로 사라 코클리의 담대한 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 되어야 한다. 다른 여성신학의 시도와 다르게 그녀는 무분별하게 욕망이 난립하는 무질서를 그려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 유토피아를 거룩한 것으로 승화 시키는 반 기독교적 시도에 이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더 거룩하고 신적인 차원으로 고양하려는 종말론적 열망에 욕망과 의지를 편입 시킨다. 그 결과 페미니즘이 가진 고유의 혁명적인 차원을 잃지 않는다. 현 상태에 머물지 않고 끊임 없이 고양되려는 몸부림을 신학적으로 긍정하기 때문이다. 젠더 이론을 신학적으로 재전유 하면서 페미니즘이 가진 치명적인 약점을 극복하면서, 동시에 기독교 전통과 어울러질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프로젝트 자체는 긍정할 수 있다. 다만 비판에 하는 지점은 프로젝트의 목적과 방향성 자체가 아니라, 내부 논리에 대한 것이다. 

    그녀는 시대착오의 위험을 무릎쓰고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 버틀러와 닛사 그레고리를 함께 전유한다. 그러나 그녀의 담대한 시도의 위험성은 포스트 모던 사상가와 교부 사이에 있는 시대적 거리가 아니다. 문제는 버틀러와 닛사 그레고리는 애초에 화합할 수 없는 지점에 서 있는 사상가들이라는 점이다. 버틀러는 기존에 부과된 역할을 거부함으로서 자유로운 욕망의 세계를 꿈꿨다. 자신의 욕망과 의지에 따라서 성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세계. 모든 종류의 욕망과 의지가 허용되는 세계. 그러나 그레고리 닛사는 결정적으로 거룩한 욕망 이외의 모든 것을 거부한다. 욕망과 의지의 대상과 방향을 거룩한 몸으로 거듭나는 것에 고정시킨다. 따라서 거룩한 육체를 향한 종말론적 열망 이외의 모든 종류의 욕망은 배제된다. 고차원적인 욕망이 들어서면서, 저차원적인 모든 욕망은 거세된 것이다. 무분별한 욕망을 긍정하는 버틀러와 결정적인 차이점을 드러낸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닛사 그레고리가 주장한 non-sexed body는 모든 성적 욕망이 부정 당한 상태를 의미한다. 하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거룩한 욕망 이외에 모든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성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 중성 상태와 같은 경지가 최고로 고양된 상태라고 주장하면서, 욕망이 완전히 극복된 상태를 열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남성과 여성의 구별을 극복했다고 해서 다양한 방향성의 성적 욕망(동성애, 양성애, 다자성애 등)이 허용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라 코클리의 담대한 시도는 결국 양자 간의 격렬한 충돌로 끝나게 되는 프로젝트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대로 정체성을 형성하는 담론과 자신의 욕망을 거부하면서 정체성을 형성하는 담론이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페미니즘 담론을 기독교 전통 신학으로 재전유하고자 하는 시도는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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