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에 대한 책임 추궁과 형벌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선악과를 먹은 결과는 벌거벗음을 알게 됨으로 부끄러움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벌거벗음으로 인해 뱀의 간교함에 이르게 됨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동산 에덴이 뱀의 놀이터가 되도록 버려두지 않았다. 영으로 에덴이 자신의 영역임을 확인하면서 사람들을 회복하는 일을 하신다. 뱀의 말을 듣는 인간을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돌리는 작업이다. 바닥을 기는 표현으로는 남의 먹거리를 존중하는 삶으로 다시 부르시는 것이다. 땀 흘리는 수고와 해산의 고통은 남의 것을 기억하는 대가다. 수고와 고생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먹거리를 탐내는 삶은 회복할 수 없는 파멸을 부른다. 서로 돕는 이로 사는 선한 세상의 꿈을 다시 꾸게 하신다.

 

1. 뱀에 대한 책임 추궁과 형벌

앞의 글에서 소개한 창3:9-21절의 구조분석을 설명하는 과정이다. 남자와 여자에 대한 책임추궁과 형벌을 다루었다. 형벌 혹은 저주는 잘 받으면 회복의 길을 여는 열쇠가 된다. 저주가 복으로 전환된다. 남자는 하나님이 주신 여자에게 책임을 미루고, 여자는 뱀이 속여서 선악과를 먹게 되었다고 했다, 이제 뱀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앞의 구조분석에 C에 해당한다. 네가 이렇게 행하였다. "이렇게"는 여자를 속임으로 사람들이 선악과를 먹도록 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뱀에게 질문을 하지 않고 선언만을 한다. 남자와 여자에게는 질문을 하지만 뱀에게는 더 이상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이렇게 하였기에 기어 다니고 사는 동안 흙을 먹을 것이다. 이것은 C'에 해당한다. 뱀에 대한 저주와 형벌이다. 뱀이 원래부터 기어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기어 다니기에 흙을 먹는다고 본다. 무지개가 원래부터 있었지만, 노아 홍수 후에 언약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과 비교할 수 있다.

흙을 먹는다는 것은 땅이 저주받는 것과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 것, 그리고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남자의 저주와 관계가 있다. 뱀이 실제로 흙만을 먹지는 않는다. 그러나 저주받은 삶을 유지한다는 표시이다. 죽은 후에 흙으로 돌아가는 삶과 흙을 먹는 것은 죽음을 먹고 사는 뱀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한 것을 먹게 한 결과 죽음의 열매를 만들어내었고, 그 결과를 먹고 사는 삶이다.

뱀이 저주받은 자리 죽음과 연결되었고, 동시에 여자와 원수가 된다. 여자와 원수가 된다는 것은 뱀의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 된 것을 말한다. 뱀은 사람을 속여서 하나님의 편에 있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간교함에 지배당하도록 했다. 그러나 에덴은 뱀의 자리로 찬탈 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사람들을 뱀의 간교함에서 벗어나는 길을 만드신다. 남자와 여자에 이어서 뱀에게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함으로 사람을 다시금 하나님의 편으로 돌아오는 길을 만들었다.

뱀과 여자와 원수 됨은 남자와 여자의 갈등과 비교된다. 남자가 여자의 말을 따라서 선악과를 먹는 일에 하나가 됨으로 생긴 일치를 깨는 갈등이다. 유혹과 죄가 있는 곳에 갈등이 있어야만 한다. 거기에 건강함이 담보된다. 뱀과는 갈등을 넘어 원수 됨을 말한다. 3:15절을 소위 원시 복음이라고 부른다. 뱀이 저주를 받는 것이 왜 복음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또한 원시 복음을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는 결정적 승리 선언만을 연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복음은 뱀과의 원수 됨 자체에서 발생한다. 이런 원수 관계를 만든 것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뱀과 여자가 즉 사람이 원수가 되어 다시 하나님의 편으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될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결국 뱀의 견고함이 한 수고를 헛된 것으로 돌린 것이다. 힘들여 속임을 통해, 자신의 모든 간교함을 동원해 설득한 그 사람을 자기의 수하에 두지 못하고 원수가 되어 피 터지게 싸워야 하고 죽기까지 싸워야 하는 대상이 되어 버렸다. 원수 됨은 만나면 싸워야 하고 죽기까지 싸워야 하는 관계이다. 그래서 뱀의 형벌이 바로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된다.

뱀과의 원수 됨의 대상이 여자라고 지명된 것은 뱀이 여자를 직접 유혹한 사실에 근거한다. 여자로 대표되는 사람과 원수가 된다는 말이다. 뱀의 간교함은 선악과를 먹게 한 것이기에, 남의 먹거리를 남겨두지 않고, 지키지 않도록 했다. 이제 뱀과 원수가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선한 세상으로 돌아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남의 먹거리를 지키고, 다른 사람의 삶을 돕는 도우미로서 상호 호혜와 환대의 관계를 만들어 가도록 초청함이다. 뱀의 간교함이 속임인 것을 깨닫고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삶을 살 때 거기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열린다.

Photo by Nick Rickert on Unsplash
Photo by Nick Rickert on Unsplash

 

2. 구속사와 먹거리

뱀과의 원수 관계는 한 세대만의 과제가 아니다. 3:15절은 시간과 역사가 흐르면서 지속적으로 원수 관계가 진행되도록 선포하였다. 뱀의 간교함에 대한 지속적인 거부, 원수 됨을 유지하는 삶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산다. 선악과를 먹지 않고 지켜야 할 삶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셨다. 남의 먹거리를 욕심내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하나님은 유지시키신다.

3:15절 한 절에 구속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많은 내용을 담으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관심사는 뱀의 간교함이 주는 억압과 속임에서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구출하시는 일을 하신 사실이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과의 원수 관계가 지속된다고 선언하신다. 여자의 후손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뱀의 후손은 누구인가? 신약성경은 창세기의 이 뱀을 옛 뱀이라고 부르고, 용이나 사탄과 마귀라고 부른다(20:2). 뱀의 후손은 뱀 새끼를 말하기보다는 뱀이나 사탄의 무리들로 본다. 물론 뱀의 편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사탄과 마귀가 있고, 그 밑에는 귀신들이 있다. 악한 영들이 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적대관계는 시간을 두고 지속되도록 하셨다. 시간이 지나도 이 관계를 유지해 가시는 하나님의 구속적 사역의 증거가 노아의 등장이며, 셈의 하나님 되어 아브라함을 부르심이다. 창세기 끝에는 요셉이 등장하여 온 세상에 먹거리를 해결하는 역할을 한다. 선악과를 지키는 삶의 실체를 보여준다. 이렇게 지속되는 적대관계에서 진행되는 구속사의 흐름을 성경을 통해 보게 된다.

바벨론의 포로가 된 소년들인 다니엘과 세친구는 왕의 진미와 포도주가 아니라 채소와 물을 먹기로 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이사야가 말한 종말적 나라의 회복을 소망하는 고백적 표현이다. 이상적 동물원을 통해 드러난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 시대를 꿈꾸면서(11:7) 다니엘과 친구들은 고기를 거절하였다. 남의 먹거리를 침략하고 약탈하는 제국적 이데올로기에 반기를 들면서 약속의 선한 세상을 꿈꾼 것이다(1). 실제로 느부갓네살이 소처럼 풀을 먹기도 한다(4:25, 33).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면서 세상에 먹거리를 공급하는 왕이 될 것을 말한다(4:27).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나 유다가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오는 회복은 먹을 것이 풍성한 시대로 그리고 있다. 특히 곡식의 소출이 풍성한 시대이다(65:21, 47:12, 14:5-8, 3:18, 9:14, 2:19, ).

욕심과 탐욕으로 불의를 행하며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는 세상은 망할 것이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그렇게 망했다. 그러나 죄가 용서됨으로 오는 회복의 새 언약 시대는 먹을 것이 풍성하여 함께 사는 세상으로 회복된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싸움은 구속사의 진행을 예견한다. 뱀의 의도대로 세상이 움직여지지 않는다고 한다. 에덴을 뱀의 놀이터로 만들고 싶어 했지만, 에덴에서 축출된다. 그리고 에덴 밖에서도 여전히 뱀의 놀이터가 되지는 않는다. 뱀은 여전히 사람들로 하여금 남의 먹거리를 지켜주는 존재가 되기보다는 약탈하고 빼앗는 삶의 강함을 추구하도록 만들지만 여자의 후손과 원수 됨을 지켜내는 욥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바벨론 제국의 음식을 거절하는 다니엘과 친구들이 있다. 그러기에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이 된다. 이것이 구속사의 진전이다.

케이프타운 어느 공원에서 / 사진@김대진
케이프타운 어느 공원에서 / 사진@김대진

3. 그 원수 됨의 끝은?

3:15절은 뱀과 여자의 후손과의 싸움이 시작되고 역사를 두고 계속되며 그 결국을 향해 치열할 것을 말한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밟고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 원수 됨은 피 흘리기까지 싸움을 하게 한다. 그리고 결국 사람이 뱀의 머리를 밟고 뱀은 그의 발꿈치라도 상하게 하는 혈투가 벌어진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을 메시아로 예수 그리스도로 보는 기독론적 이해가 발전하기도 한다.

여자의 후손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어떤 사람에 의해 뱀을 박살을 내는 결론을 성경 전체에서 도출하면서 원시 복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거시적 좋은 해석이다. 그러나 본문은 여자의 후손이 죄와 뱀과 싸움에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뱀의 저항도 발꿈치를 무는 것으로 완강하지만 하나님이 뱀을 이기도록 개입하신다. 개입의 최종적 온전함이 십자가와 부활이다.

창세기를 하나의 책으로 볼 때 창세기는 여자의 후손인 사람과 뱀과의 완수됨이 만드는 갈등을 제시한다. 먹을 것을 놓고 벌이는 한판 승부이다. 뱀에게 철저하게 승리를 한 사람이 창세기 마지막에 요셉이다. 요셉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었다(50:20). 그래서 악이 만들어내는 죽음과 기근, 그리고 생명에 위협이 되는 재난으로 공격하지만, 악을 선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지혜가 이것을 넉넉히 극복한다. 7년의 기근이 요셉의 지혜를 이기지 못한다. 요셉은 애굽을 먹이고 팔레스타인의 가족을 먹이고 근동을 먹이게 된다.

창세기의 선과 악은 먹을 것이 있어 같이 먹거리를 먹는 세상을 선한 세상으로 본다. 반대로 악한 세상은 혼자 먹는 세상이다. 돕는 것을 포기한 삶이다. 같이 살아야 할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선함이다. 요셉은 악을 멀리함으로 선한 것을 만들어내었다. 형들과의 삶에서,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에서 그리고 애굽의 총리실에서 어디서든지 그는 함께 살고 함께 먹는 세상을 만들어내었다. 이것이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짓밟는 실체적 증거이다. 탐욕이 지배하는 이기적이고 힘과 권력이 사적 이익에 함몰되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먹이고 살리는 지혜,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는 지혜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은 지혜로운 의인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맺는다고 선언한다(11:30).

뱀은 자기 뜻대로 에덴을 접수할 수 없었다. 에덴에 사람들을 자기의 편으로 온전히 데리고 올 수 없었다. 뱀의 모든 노력이 헛됨으로 결과된다. 원수 되므로 귀착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즉 이웃의 먹거리를 지켜내는 선함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는 증거를 창세기는 보여준다. 우리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기회와 은혜를 따라서 그 명령을 지키는 삶에서 생기는 생명의 길이다.

3:9-21절의 구조분석은 대칭구조이다. 대칭구조의 강조점은 가운데 핵심이 있다. CC'가 중심이다. 뱀을 식별하고, 뱀과의 원수 됨을 유지하는 삶을 살면서 남자와 여자는 땀 흘리는 수고와 아이를 얻는 고통에 담긴 하나님의 의지 즉 다른 사람과 함께 먹고 돕고 사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결단을 날마다 해야 한다. 때론 남자와 여자가 갈등을 빚으면서 선에 대한 열심,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삶을 수행할 때 에덴 밖에서 에덴의 생명의 나무가 주어진다.

 

다음은 아담이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부른 것과 가죽옷을 입힌 사건을 살핀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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