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선악과를 먹은 책임추궁과 저주가 정리되자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생명(하와)이라 했고, 하나님은 맞추어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뱀의 간교함이 지배하는 세상에 임한 죽음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된 것을 받는 신앙고백이 생명이란 이름이다. 나아가 이런 고백을 유지하는 방식이 가죽옷이다. 짐승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 제사를 통해 죄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이제 하나님은 사람들을 에덴 밖으로 내보낸다. 그 이유와 에덴 밖의 삶을 살펴보자.

 

1. 에덴 추방의 이유?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 그래서 그가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그리고 에덴에서 그를 내 보내신다(3:22-3).

 

선악을 아는 일에 있어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자로서 인간됨을 확인한다. 인간이 선악을 아는 방식과 하나님이 선악을 아는 것이 같지 않다. 인간이 선악을 아는 방식은 뱀의 간교함에 기대 것이다. 남의 먹거리를 남기지 않는 방식이다. 자기의 필요 중심이다. 돕는 이로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나의 필요에 이용하는 방식이다.

 

뱀의 간교함에 지배당하는 앎에는 제한이 필요하다는 것을 저주를 통해 살펴보았다. 남자의 수고 땀과 흙으로 돌아감, 여자의 해산 고통과 남자와의 갈등의 필요, 뱀과 여자의 원수 됨 등이 뱀의 간교함에 떨어진 죽음의 현실을 생명으로 견인하는 복음적 도구들이다. 뱀의 간교함으로 전락한 그대로의 지식과 앎은 생명나무도 손을 댈 것이라는 하나님의 판단이다.

 

생명나무는 다른 사람의 먹거리를 지켜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과 같은 것이다. 경작하고 지키는 삶을 살아낸 증거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다. 그래서 성례전적 의미를 가진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 남의 먹거리에 손을 댄 인간은 지킬 명령을 지키지 못했기에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자격을 상실했다.

 

에덴에 사람을 두시고 경작하고 지키게 하셨다. 그런데 경작하는 일은 진행되었지만 지키는 일은 실패했기 때문에 에덴에서 더 이상 살 수는 없다. 인간은 실패했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선하게 만드시려는 일은 계속된다. 그래서 비록 뱀의 간교함에서는 벗어났지만 에덴에서의 프로젝트는 종료가 된다. 뱀의 간교함이 지배하는 인간의 현실이지만 여전히 생명을 누리면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한 새로운 장소를 하나님이 제시하신다. 이것이 에덴의 추방이다. 에덴의 추방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에덴에서의 실패를 기억하면서 그것을 딛고 실패한 삶의 무게를 인식하면서 새롭게 시작하는 삶의 자리로 초대받음이다. 다시 시작하는 것인 추방이다.

 

2. 생명나무와는 영원히 단절되는가?

에덴에서 추방되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영원히 먹지 못하는가? 앞의 글에서 잠언은 다양한 경우들에 생명나무를 언급했다. 그리고 신약 계시록에 의하면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이기는 자는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 약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에덴이란 환경에서는 지키는 일을 실패한 사람들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없다 그러나 영원히 먹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뱀의 간교함이 만든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을 누리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제 그 말씀들을 간직하고 지키면서 새롭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길을 가능하게 하신다. 에덴 밖에서 새롭게 그 열매는 먹을 수 있는 생명나무의 길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새로운 삶의 자리에서 첫번재 실패가 준 상처를 가슴에 담고 기억하면서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고난과 갈등 그리고 원수됨을 유지하면서 뱀의 간교함을 극복하고, 원래 지음을 받은 돕는 이의 삶, 남의 먹거리를 지키는 삶, 경작하고 지키는 삶을 이루어 내는 참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갈 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게 된다.

 

3. 에덴 밖 새로운 자리에서 주신 두가지 말씀

1) 경작하는 삶

에덴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내 보내신다. 비록 실패했지만 다시 일으켜서 생명과 가죽옷을 입히시고 내보내신다.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서 다시 시작하도록 새로운 삶의 자리로 초대하신다. 에덴 동산에서 내 보시면서 하나님은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신다(3:23). 간다는 것은 경작하다는 것과 같다(לענד). 에덴에 두실 때 와 다르지 않다. 에덴 밖에서의 삶은 여전히 경작하는 삶이다. 땅을 기준으로 일구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땅을 일구는데, 사람이 땅에서 취함을 받았다는 말을 남긴다. 땅에서 일하는 삶을 살면서 수고의 땀을 흘리고, 흙으로 돌아가는 삶인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이다(3:17-19). 이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수고의 땀과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 남의 먹거리를 탐하면서 뱀의 간교함에 다시 빠져들어가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주어진 삶이다. 에덴에서나 밖에서는 삶은 이렇게 경작하는 삶으로 연속된다.

 

2) 지키는 삶

또한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함을 보여준다. 하나님깨서 에덴의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도록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도는 불칼을 두었다.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것은 에덴에 처음 사람을 둘 때 지키도록 한 것과 같은 단어이다(שמר). 생명나무의 길을 지킨다는 것은 에덴으로의 진입을 막으신 것이다. 에덴에서 지키지 못한 삶을 기억하게 하는 장치이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한 삶으로 인해 사람이 에덴으로 들어가서 생명나무를 먹는 길은 막혀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정적인 측면만이 아니다. 적극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에덴 밖에서 에덴으로 들어가서 생명나무를 따 먹으려고 애쓰지 말고, 에덴 밖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길을 찾으라는 신호이다. 에덴 밖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라. 어떻게?

 

에덴 밖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방식은 먼저 에덴으로 들어가서 먹으려는 노력을 중단해야 한다. 에덴 밖에서 찾아야 한다. 에덴 안에서 선악과를 따 먹은 결과로 인해서 주신 말씀들이 있다. 에덴 안에서 지켜야 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마찬가지로 에덴 밖으로 나오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들, 명령들이 있다. 남자는 경작하면서 수고의 땀을 흘리고,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임을 깨닫고 남의 먹거리에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여자의 경우 해산의 고통과 남자와의 정당한 갈등을 통해 바른 먹거리를 찾고 살아야 한다. 어설픈 일치감이 아니라 갈등하면서 하나님의 선한 길을 찾아가야 한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자녀를 낳는 기쁨과 기르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선한 길을 찾기 위한 갈등을 끊임없이 이루어야 한다. 선을 위한 협력, 남의 먹거리를 지키기 위한 갈등을 감당하면서 자녀를 양육하고 수고를 하는 것이 바로 지키는 삶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뱀과의 원수됨을 기억하면서 사는 삶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영이 주는 다스림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형상답게 살아내는 삶을 사는 것이 지키는 삶이다. 서로 돕는 존재로 양육하며 수고하며 성장하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임을 알고 움켜지지 말고 서로 나누는 선한 삶을 사는 것이 지키는 삶이다. 뱀의 간교함이 주는 탐욕, 남의 먹거리를 빼앗는 즐거움을 포기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른다. 이것이 가죽옷을 지어입히신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제사를 드림으로 자신의 탐욕과 수치 그리고 남의 먹거리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일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제사를 통해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선한 세상을 꿈꾸게 된다.

 

에덴 밖의 삶이 에덴의 삶과 다르지 않다. 수고하는 삶, 지키는 삶으로 초대를 받고 있다. 남의 먹거리를 지키는 삶이 그대로 선한 삶이다. 이를 위해 우리의 약함을 가리는 가죽옷 즉 제사제도를 만들어 두시면서 은혜를 주신다.

 

다음에는 에덴의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불칼과 그룹들을 더 살펴본다. 샬롬

 

관련기사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