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으로 가는 길 Ⅲ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에덴을 뱀의 놀이터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회복하신다. 선악과를 먹은 책임 추궁과 형벌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답게 사는 길로 회복하신다. 남자가 수고의 땀을 흘리고, 여자가 아이를 해산하는 고생을 하면서 때론 남자와 여자가 갈등하면서 남의 먹거리를 지키지 못한 일을 기억하고, 이를 지키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신다. 그리고 뱀의 간교함이 실패하도록 여자와 뱀이 원수가 되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원수되며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는 복음으로 인도하신다. 뱀과 원수 된 삶이 무엇인지를 아담은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부르면서 고백한다. 사망이 아니라 생명의 길이 열렸음에 대한 찬송이다. 또 이런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다.

 

1. 하와라는 이름: 생명을 회복하는 삶

남자와 여자 그리고 뱀의 순으로 책임을 추궁하면서 뱀, 여자, 남자의 순으로 형벌이 주어졌다. 모든 형벌 혹은 저주가 선언된 이후 남자는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부른다. 하와의 뜻은 생명이다. 왜 생명이라고 했을까? 선악과를 따먹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리고,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 자신들을 찾아오셔서 행한 하나님의 일련의 형벌들을 듣고 나서 한 사람의 첫 반응이다. 생명이다.

이런 반응은 선악과를 따 먹은 상태는 죽음이란 의미이다. 왜 그런가?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선언이 있었다(2:17). 실제로 따먹은 결과 변화가 생겼다. 하나님처럼 선악의 판단자가 되었지만 모든 것이 변화되었다. 벌거벗음이 비정상적인 상태가 되었고, 그래서 부끄러워 가려야 할 것이 되었다. 사람이 뱀의 간교함에 종속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피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동산에서 누려야 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다. 두려움의 자리에 있다. 나아가 인간 상호 간의 관계도 파괴되었다. 서로 돕는 자가 아니라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리고 결국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런 전반적인 현실이 바로 죽음이다. 뱀의 간교함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변화되었다. 뱀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항변했지만 죽음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죄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하나님은 에덴을 뱀의 놀이터로 전락되어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자리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영(바람)이 임하여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신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역할을 하도록 견인하신다. 무엇보다 뱀과 원수되는 삶을 규정하셨다. 뱀과 원수가 되어 다시금 하나님의 편으로 돌아오도록 길을 열어 놓으신다. 뱀의 간교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명령에 순종하는 인간으로 회복하신다.

남자는 땀 흘려 수고함으로, 여자는 아이를 낳은 해산의 고통을 통해 죄와 뱀의 간교함을 늘 기억하여야 한다. 다시는 그리로 끌려가지 않기 위함이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관계도 적절한 갈등을 가짐으로 뱀의 간교함으로 끌려가지 않도록 한다. 인간 수고의 땀과 해산의 고통, 서로 간의 갈등을 통해 서로 돕는 삶을 사는 선한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다운 삶이란 것을 깨닫게 하신다.

아담이 아내를 향하여 이름을 생명(하와)라고 부름은 다시 찾아온 회복의 시간을 축하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속아서 뱀의 간교함에 끌려 다니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의 선한 뜻을 다시 품고 이루는 삶을 사는 생명을 가진 삶이 가능함을 깨닫는 탄성이다. 다시 찾아온 생명이다. 선악과를 따 먹은 책임자로 지목한 대상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돕는 자로 회복되었음을 말한다. 다시 열린 하나님과의 풍성한 생명의 길은 서로 돕고, 다른 사람의 먹거리를 존중하는(선악과를 따 먹지 않고 뱀과 원수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2. 산자의 어머니

하와 혹은 생명이란 이름은 하와를 모든 산자의 어머니가 되게 만들었다. 산 자의 조상이다. 하나님은 비록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이지만 이들을 회복하여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의 역사를 지속하시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미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원수 됨을 통해 드러난 구속사의 진행이 있다. 이 결과 뱀과 원수 됨 삶을 살아내는 여자의 후손들은 생명을 가진 자들이 된다.

산 자의 어머니라는 말을 통해서 해산의 고통을 기억하면서 아이를 낳는 것이 생명의 역사임을 말한다. 태어나는 아이들이 이기적이고, 남의 것을 빼앗는 훈련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는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역사를 위한 삶으로 태어난다. 서로 돕고 서로의 먹거리를 챙기고 선한 일에 힘쓰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난다는 약속이다. 산자의 어머니가 된다는 말은 에덴에 다시 찾아온 생명이 지속성을 확인해 준다.

순천만습지에서/ 사진@김대진
순천만습지에서/ 사진@김대진

3. 가죽옷을 입히시는 하나님

아내의 이름을 하와(생명)이라고 고백을 한 후에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가죽옷을 입히신다. 가죽옷은 선악과를 먹은 후에 눈이 밝아짐으로 벌거벗음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것을 대신하는 것이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것이 일회용이라면 가죽옷은 지속적인 효용가치가 있는 것이다.

가죽옷을 만들어 주신 것은 사람들이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선악과를 따 먹었기에 일어난 변화가 있음을 확인해 주신다. 벌거벗은 상태가 부끄러움이라는 것의 인정이다. 부끄러움은 죄의식이다. 성적인 수치심으로만 보는 것은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이다. 죄가 만들어 내는 에덴의 질서 전체가 왜곡된 현실이다. 따라서 가죽옷은 선악과를 따 먹은 사실을 기억시키는 역할을 한다. 범죄했다. 남의 먹거리를 탐을 내는 인간의 탐욕스러운 현실을 말해준다.

나아가 선악과를 따 먹은 죄를 가리는 것이 필요함을 말한다. 죄의 고발만이 아니라 죄를 해결하는 길을 보여준다. 가죽옷은 벌거벗음을 가리기 위함이다. 가림으로 사람들 간의 관계가 유지되도록 만드는 수단이다. 부끄러움을 가림으로 사람들이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수단이다. 무화과나무 잎이 가진 짧은 유효기간을 가죽옷으로 길게 거의 영구적으로 늘려주었다.

가죽옷은 짐승의 희생을 전제한다. 짐승의 희생은 제사를 말한다. 실제로 3장을 넘어 4장에 이르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나온다. 짐승의 희생으로 드리는 제사는 죄를 가리거나 속죄는 수단이며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화목하게 하는 수단이다. 정결과 속죄와 화목의 수단이다. 가죽옷은 인간 사회에 죄를 가리는 짐승의 희생과 제사를 정당화한다.

뱀의 간교함이 있는 곳, 탐욕과 남의 먹거리를 약탈하는 삶의 자리에는 죄를 가리는 가죽옷이 필요하다. 이것은 위선적인 삶을 사는 정당한 수단이 아니다. 적당히 가리고 죄를 지어도 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겉에 있는 가림을 통해 본질적으로 서로의 먹거리를 돕고 탐심을 버리고 서로 돕는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도록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이다.

제사는 드리면서 탐욕을 여전히 부린다면 즉 탐욕의 값싼 면죄부가 제사가 되는 시절이 이사야 시대였다. 1장이 말한다. 너희가 무수한 제물을 가지고 오지만 아무 유익이 없다. 헛된 제물일 뿐이다.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악한 행실을 버리라.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1:11-17 요약).

가죽옷이 제사를 말한다면 제사를 드리는 자는 다른 사람의 삶과 필요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죄를 가리는 것의 적극적인 면이 선을 행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먹거리를 지켜주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가죽옷이 참된 복음이 된다.

하와 혹은 생명이 다시 찾아왔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은 가죽옷으로 보장되었다. 뱀의 간교함이 지배하는 어두운 삶이 계속되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사는 삶으로 다시 초대되고 있다. 생명이 찾아온 자리를 확인하는 가죽옷이다. 뱀의 간교함, 남의 먹거리에 대한 욕심, 탐욕, 그리고 죄로 인한 부끄러움을 하나님이 가죽옷으로 가리면서 선으로 초대하신다. 다시 한번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상으로 보내신다.

왜 에덴에서 사람들을 내보내시는가? 에덴 밖에서는 생명 나무가 없는가? 다음에 본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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