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말론적 완성은 본질의 변화가 아니라 실존적 변혁
- Maximus는 내재적 본질, 존재론적 특성이 사라진 상태를 종말론적 완성이라고 보지 않아

(사진: blessedmart.com, Maximus the Confessor의 초상화)
(사진: blessedmart.com, Maximus the Confessor의 초상화)

 

서론

기독교적 차원에서 젠더이론을 구성하려는 학자들은 Maximus the Confessor의 신학을 젠더 이론 관점에서 전유하곤 한다. 그는 갈3:28에 근거해서 종말론적 완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다”는 진술을 들어서, 젠더 이론가들은 그가 꿈꾸었던 종말론적 완성은 생물학적 성구별을 초월한 무성적 존로 승화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성에 대한 담론은 더 이상 본질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생물학적 차이를 긍정하는데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Maximus가 주장한 종말론적 완성에 따르면, 본질론적이고 존재론적 특성을 극복한 성이야 말로 종말론적 차원이며,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성의 최종 목적이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종말론적인 완성을 위해서 내재적으로 심겨진 욕망을 부정하는 훈련, 즉 금욕을 젠더 이론의 차원에서 재전유 하려고 시도한다. 금욕적 훈련을 반복적으로 수행함으로서, 인간에게 내재된 생물학적 욕망을 완벽하게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젠더이론에 따르면 금욕은 무성적 존재에 이르기 위한 수행 도구라는 것이다. 기독교적 금욕은 젠더이론에서 추구하는 생물학적 구별을 초월한 non-gendered being을 추구하는 도구로 재전유 된다. 이렇게 젠더이론가들이 Maximus의 신학을 특정한 방식으로 재전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추구한 종말론적 완성이 과연 존재론적, 본질론적 변화인가 살펴보는 것은 기독교 신학과 젠더 이론 사이 간에 놓인 가교가 타당한지 검토해보는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종말론적 완성: 본질의 변화가 아닌 실존적 변혁

Maximus는 종말론적 완성을 크게 3단계로 나눈다. 첫 번째로, 창1:26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음을 선포한다. 이는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어서 창1:27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 선포한다. 이는 인간의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이다. 생물학적으로 남녀의 성구별이 지어진 실존이라는 현실 말이다. 마지막으로 종말론적 완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갈3:28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없음을 선포한다. 이러한 주장에 기반하여, 젠더이론가들은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종말론적 완성이 생물학적 구별이 사라진 무성적 상태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간의 내재적 욕망이 철저히 거세 당한 욕망의 중립 상태를 추구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내재된 욕망에 의해서 이성을 원하는 상태는 종말론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특히 마지막 단계의 완전함은 지금 그리고 여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세에서 하나님의 삶에 참여함으로서 실현된 종말론적 완성인 것이다. 현세에서 종말의 부분적 성취를 주장하면서, 반복적인 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무성적 상태, 욕망의 중립의 상태에 이르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현된 종말론은 젠더이론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내포한다. 현실에서는 생물학적 성구별이 있는 현 상태와 생물학적 성구별이 극복된 종말론적 완성 상태가 공존한다. 종말론적인 완성에 참여하지 못한 상태와 궁극적인 완성에 다다른 상태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결국 연대기적으로 이해하면서, 생물학적 특성에 충실한 상태를 중간 단계 정도로, 극단적으로는 미완성의 단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차원이 거세되지 않은 상태를 종말론적으로 미진한 상태에 머무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Maximus는 이러한 두 가지 상태가 공존하는 것을 인간 존재의 이중성에 근거해서 이해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신적인 차원과 육체적인 차원을 모두 가진 양가적인 존재다. 나아가서 인간의 육체적인 차원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신적인 차원은 섞일 수 없다고 본다. 즉, 육체적 차원은 거세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그가 추구했던 종말론적 완성은 육체적 특성이 거세된 무성적인 상태, 욕망의 중립의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도 여자도 없다는 갈라디아서의 진술은 인간의 내재적 욕망과 성적 구별이 모두 사라진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애초에 거세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생물학적 성차이가 무의미해지는 새로운 삶의 형태를 종말론적 완성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 

이를 뒷받침 하는 근거로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Maximus는 삶의 실존적 모드와 본질을 구별했다. 특히 종말론적 완성에 있어서 실존적인 변혁과 본질의 변화를 구별했다. 그에게 있어서 본질은 불변한 것으로 간주됐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종말론적 변화는 본질의 변화일 수 없다. 대신에 실존적 모드는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지한 것이다. 그에게 종말론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삶의 실존적 태도이다. 그러므로 그가 상상했던 종말론적 완성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지해서, 새로운 삶의 양태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본질은 불변하지만, 본질적으로 박혀있는 내재적인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삶, 의지로 욕망을 거스르는 거룩한 삶이었던 것이다. 

그는 결코 영적 변화의 과정에서 존재론적 차이가 사라지는 것을 상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구별이 없다”는 진술을 생물학적으로 남녀로 구별된 존재론적 특질을 초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없다. 그에게 종말론적 완성이란 남자 또는 여자가 무성적인 존재, 성적 중립의 상태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생물학적 본성에서 우러 나오는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그가 꿈꾸었던 종말론적 완성이란 존재의 변화가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종말론적 완성이란, 성적으로 구별된 생물학적 조건에서 탈출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방식의 변화다. 더 이상 내재된 본질에 좌우되지 않는 삶. 타고난 대로 사는 것이 아닌 삶. 자신의 의지대로 거룩한 삶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그는 덕스러운 상태를 above nature, a surpassing of nature로 규정한다. 즉, 종말론적으로 이르게 되는 덕스러운 상태는 본질의 변화가 아니라, 본질을 초월한 삶인 것이다 생물학적, 존재론적 본질에 좌우되지 않는 삶인 것이다. 인간의 의지가 내재적인 욕망을 이기는 삶을 의미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없다”라는 진술은 존재론적 상태라기 보다는 욕망을 거스르는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사진: Photo by Natasha Ivanchikhina on Unsplash)
(사진: Photo by Natasha Ivanchikhina on Unsplash)

 

성적 결합에 대한 복잡한 입장

Maximus는 성적 결합에 대해서 가혹한 언사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러한 그의 언어는 독자들이 성적 욕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이를 거세하는 금욕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오해하기 쉽게 만든다. 특히 그는 하와를 언급할 때, 폄하적인 표현을 종종 사용했다.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창녀(harlot)로 지칭하곤 했다. Maximus는 아담에게 오직 두 가지의 가능성만 있다고 생각했다. 먼저 하나님에게로 상승하여 그와 연합하는 것. 그리고 창녀와 연합하는 것. 두 가지 가능성 중에 무엇을 선택하는지는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아담이 하와의 권유를 따르는 결정을 한 것은 성적 욕망을 신비로운 연합보다 우선시한 것과 같다고 해석했다. 아담은 거룩한 삶, 즉 하나님과 연합으로 부르심 받은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런 아담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성적 욕망에 빠지게 한 책임을 하와에게 돌렸다. 그러한 차원에서 하와를 창녀라고 지칭한 것이다. 그는 남자와 여자의 성적 결합을 하나님과의 연합에 반대하는 악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맥락에서는 하와를 아담의 배우자 또는 동반자라고 지칭한다. 그는 타락의 스토리를 삶의 방식의 급격한 변화로 해석한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삶의 방식에서 세속적 욕망을 선호하는 삶의 방식으로 변화라고 간주한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하와를 배우자 또는 동반자라고 지칭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에게서 돌아서서 세속적 욕망을 선택한 동일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가능성을 언급하는 맥락에서는 하와를 창녀라고 지칭하는 반면 타락을 언급하는 맥락에서는 배우자 또는 동반자로 언급한다. 이는 아담의 가능성을 언급하는 특정한 맥락 바깥에서는 그녀를 폄하적으로 취급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결합을 배우자 또는 동반자 관계로서 간주함으로서, 남녀의 결합을 전적으로 부정적 차원에서 취급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는 남녀의 결합에 대해서 복잡하고 양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성적 결합에 대한 부정적인 뉘앙스는 일관되지 않다는 것이다.

이를 고려하면서, 그가 남녀 간의 성적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가족의 영성을 강조했다는 지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인간에게 내재된 성적 욕망을 거세된 상태에 이르는 것만이 종말론적 완성이라고 주장했다는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2편에서 계속).

 

참고문헌

Doru Costache, “Living above Gender: Insights from Saint Maximus the Confessor”, Journal of Early Christian Studies 21:2(2013), 261-290

Manuel MIRA IBORRA, “Friendship in Maximus the Confessor”, Studia Partistica LXVIII(2013), 273-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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