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aximus가 추구한 치유와 통합의 삶은 내재된 욕망과 생물학적 성적 구별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다.
-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내재된 욕망을 긍정하고, 성적으로 구별된 이들의 연합을 추구

(사진: blessedmart.com, Maximus the Confessor의 초상화)
(사진: blessedmart.com, Maximus the Confessor의 초상화)

 

1. 다섯 가지 양극성(Polarities)

    Maximus는 그의 저작 Difficulty 67, 41에서 다섯 가지 양극성(polarity)에 대해서 언급한다. 다섯 가지 양극성은 실재가 분할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모든 실재를 포괄하는 다섯 가지 양극성은 다음과 같다. 먼저 피조물과 피조되지 않은 존재 사이의 존재론적 간극이다. 두 번째로는 피조된 존재들의 이질성이다. 인식할 수 있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감각할 수 있는 것과 감각할 수 없는 것들을 포괄한다. 세 번째로는 하늘과 땅의 분할, 네 번째 양극성은 낙원과 인간이 거주하고 개발한 땅을 구별한다. 마지막 양극성은 인간의 성별 분할이다. 다섯 종류의 분할에 각기 다른 종류의 긴장이 있으며, 마지막 다섯 번째 인간의 성별 분할은 모든 실재의 양극성을 인체학적으로 설명한다. 다양한 종류의 복잡한 실재가 인간의 생물학적 범주 가운데 요약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별의 구분은 실재의 분할의 인체적 버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양극성은 인간에게 극복되어야 할 과제로 주어진다. Maximus는 이러한 실재의 양극성은 성적으로 구별된 인간 안에서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적으로 분할된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통합으로 말미암아 복잡하게 분할된 실재들은 회복되고 통합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한스 폰 발타자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성적으로 분할된 인간 안에서 실제 세계의 다양성과 구별은 극단적인 정도까지 발전한다. 그리고 통합으로 나아가는 첫 번째 단계를 밟는다는 것이다. 

    Maximus는 모든 종류의 분할을 극복하는 과업은 로고스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졌다고 주장한다. 이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삶아야 한다. 그에게 하나님 중심의 삶이란 사물의 원리, 즉 로고스와 일치하는 삶이다. 이러한 삶은 실재의 통합을 위한 촉매제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중심의 삶은 사물의 본질과 본래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인 것이다. 그는 이러한 삶을 신적 덕성(divine virture)라고 요약하는데, 이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 분할을 초월하는 삶의 양태다. 성적 구별과 무관하게 살아야 하는 삶이며, 이러한 삶을 통하여 분할된 실재는 통합되는 것이다. 

    이러한 통합의 과정은 다섯 가지 분할의 순서와 반대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로 성적 구별을 무색하게 하는 인류의 화해다. 두 번째로 인간이 거주하고 발전시킨 땅과 인간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낙원의 통합이다. 이는 인간의 죄성의 영향에서 벗어난 거룩한 삶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세 번째로 하늘과 땅의 통합인데, 이는 천사와 유사한 덕스러운 삶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네 번째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감각할 수 있는 것과 감각할 수 없는 것의 통합인데, 이는 천사와 동일한 수준의 지식에 이름으로서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피조물과 피조되지 않은 존재의 교제인데, 이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다. 요약하면, 신적 덕성을 따르는 삶을 통해서 실재 가운데 만연한 분열은 치유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적 구별을 초월하는 거룩한 삶은 모든 실재의 통합과 치유를 포괄하는 삶의 양태라는 것이다. 더욱이 우주 내에서 인간의 중심성을 고려할 때, 실재의 다양한 차원를 관통하는 통합의 여정은 가장 직접적인 분열, 즉 남자와 여자 사이에 상존하는 분열을 치유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젠더 이론가들은 이 지점을 파고든다. Maximus는 성적 구별을 초월한 삶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모든 실재의 분열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삶의 양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부장제가 지운 젠더를 극복하고 초월하는 삶의 양태, 특히 반복되는 수행으로 부과된 젠더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모든 실재를 회복하고 통합하는 거룩한 삶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또한 생물학적으로 내재된 욕망의 방향성을 부정하는 삶의 훈련 또한 실재를 치유하는 회복과 통합의 삶의 양태로 추앙된다. 이처럼 젠더 이론가들에 의해 성적 구별에 구애받지 않는 삶의 양태는 그리스도인의 추구해야 할 삶으로 재전유되는 것이다. 

 

2. 성과 육체적 기쁨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Maximus는 다섯 가지 분할 중에 인간의 성적 구별에 대해서는 다른 관점을 취했다는 점이다. 그에게 성적으로 구별된 인간의 상태는 하나님에 의해서 포용된 것이다. 그가 구상했던 성적 구별을 초월한 삶의 양태는 인간에게 지워진 생물학적 구별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다. 내재된 본성적 욕망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성적 구별을 초월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각각 구별된 성이 자신의 본래적 특질을 잃지 않으면서, 하나로 “연합”되는 것이다. 본래의 특질을 벗어버리거나, 내재된 욕망의 방향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내재된 욕망의 방향성을 정확하게 취함으로서 “연합”하는 것이다. 그가 취한 결혼에 대한 입장은 그가 구상했던 치유와 회복의 통합이란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그가 결혼에 대해 취한 입장은 젠더 이론가들이 그를 전유하는 방식을 철저하게 반박한다. 

    이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그가 성과 육체적 기쁨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성적 결합과 그 행위에서 파생되는 육체적 기쁨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는 “To Thalassius”의 서문에서 아담과 하와는 성적 결합의 기쁨을 맛보는 것을 영원히 금지 당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대신에 아담과 하와는 영적 성숙에 이르기 전까지 인내심 있게 육체적 기쁨을 맛보기를 미루도록 권면 받았다고 주장한다. 영적 성숙에 이르게 되면, 그들은 성적 결합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다만 영적으로 성숙한 방식으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무분별하게 쾌락에 젖는 것과는 구별된다. 그러므로 그가 내재된 욕망 자체를 부정하거나, 성적 쾌락을 악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았다고 추론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창조 기사에 등장하는 낙원을 육체적 기쁨이 부재하는 세계로 보지 않았다고도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의 진술을 해석할 수 있다. “만일 결혼이 악한 것이라면, 자연 생식법 역시 악한 것이다.” 그는 성적 결합과 결혼을 하나로 묶어서 이해했고, 악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Maximus가 추구한 성과 결혼에 대한 관점은 금욕적 전통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제공되지 않는다. 금욕적 전통은 성적 욕망을 부부관계에서 승화 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는 결혼과 생식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서 다룬다. 그러므로 그는 금욕적 전통 안에서 성적 욕망에 대해서 긍정한다. 이성을 향한 내재적 욕망은 부부 관계 안에서 다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남성과 여성의 결혼을 긍정하며, 내재된 이성을 향한 성적 욕망 또한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구상한 성적 구별을 초월한 삶이란, 젠더 이론가들이 향유하려고 시도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각기 구별된 성이 하나로 연합하는 결혼을 분열을 치유하는 통합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는 성적 구별이 하나님에 의해서 포용된 것이라고 봤기 때문에 더욱이 젠더 이론가들이 향유한 방식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사진: upoloaded by Nathan Dumlao on unplash)
(사진: upoloaded by Nathan Dumlao on unplash)

 

3. 영적인 삶의 두 가지 길  

    Maximus는 그의 저작 Difficulty 10에서 실재의 분열을 치유하는 영적인 삶의 모범으로 모세와 엘리야를 제시한다. 모세는 결혼, 엘리야는 독신의 삶의 모범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긍정된다. 그는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그리스도와 함께 등장하는 장면을 해설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나타나심으로서 사도들이 결혼과 독신의 신비를 전수했다고 해석한다. 특히 모세는 결혼했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에 지장이 없었음을 강조한다. 독신과 결혼 두 가지 모두 동일한 수준으로 실재를 치유하고 통합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적 삶의 방식으로 결혼을 승인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왜냐하면 젠더 이론가들이 내재된 욕망의 방향을 극복하거나 제거하고, 생물학적으로 지워진 젠더를 초월할 것을 요구하는 것과 영적인 삶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젠더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삶의 방식은 Maximus의 프로젝트와 호환되지 않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앞선 편에서 제시했듯이, 그는 가족 공동체의 영성을 강조했다는 점 역시 젠더 이론가들이 Maximus를 전유하는 방식은 임의적이고 편파적임을 드러낸다. 

 

나가면서

    2차례에 걸쳐서 Maximus the Confessor의 신학과 젠더 이론가들이 그의 신학을 전유하는 방식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그의 신학은 결코 결혼과 가족 공동체의 중요성, 생물학적으로 지워진 이성애적 성향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전유될 수 없음을 살펴보았다. 최근에 젠더 이론과 신학이 활발하게 대화를 하면서, 특히 교부신학의 몸에 대한 관점이 젠더 이론에 유리하게 재전유되고 있는 실정이다. 기독교 고유의 전통이 젠더 이론가들에 의해서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가 강조하는 생물학적 특성, 이성애, 결혼과 가족 공동체를 무너트리기 위한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젠더 이론가들이 신학을 전유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은 기독교가 구상하는 사회상을 지키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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