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은 에덴에서 추방되었다. 남의 먹거리를 지켜내지 못한 삶은 더 이상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을 수 없다. 그냥 손을 뻗어서 그 열매를 먹지 못한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수고와 고통 그리고 갈등 관계를 유지하면서 창조의 목적인 선한 삶으로 다시 부름을 받는다. 특히 뱀과의 원수 되는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선한 삶, 생명이 있는 삶, 특히 다른 이의 먹거리를 지키는 서로 돕는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 에덴 밖의 삶은 에덴 안에서의 삶을 바탕으로 구성된다. 여전히 경작하고(수고) 지켜야 하는 삶이다. 그것이 돕는 이로써 다른 이의 먹거리를 공급하는 하나님의 형상다운 삶이다. 에덴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지만, 에덴 밖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에덴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으시고 불 칼과 그룹들을 두어 지키신다.

 

1. 불 칼과 그룹들의 역할

에덴의 생명나무에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지키기 위한 방편들이다. 소위 지킴이들이다. 그룹들은 지키는 실체이고, 두루도는 불 칼은 무기이다. 그룹은 천사의 한 종류이다. 성경에 천사들이 여러 종류가 나온다. 가브리엘, 미가엘, 그룹, 스랍 등이다. 가브리엘은 전령과 같다(마리아,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소식 전달). 미가엘은 군대 장관이다(다니엘서에 등장한다). 그리고 스랍은 찬송하는 군악대나 성가대와 같다(6). 그리고 그룹들은 경호대와 같다(성막과 성전 안에 많이 수놓거나 그려져 있다). 그룹은 왕의 자리를 지키는 경호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 지키는 역할을 에덴 이후에 성막과 성전과 관련해서 등장한다. 이런 관계로 에덴을 성전으로 보려는 시도들도 있다.

 

그룹들이 불 칼을 가지고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으로 들어가는 길을 지킨다. 이것을 통해 생명나무의 열매는 지키는 자가 먹는 것임을 에덴 밖에서도 계속 기억나게 한다. 지키야 할 것은 언제나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다. 그 명령의 핵심은 수고와 고통 그리고 때론 갈등을 통한 서로 돕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고, 무엇보다 뱀의 지혜 혹은 간교함에 전락하지 않고 뱀과 원수된 지혜를 가지고 남의 먹거리를 지켜내는 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2. 타락한 그룹과 두로 왕(28)

에덴과 그룹과 관련해서 에스겔 선지자는 두로 왕을 범죄한 그룹이라 칭한다(28:16). 두로 왕은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쌓았다. 온 세상과의 소위 중계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이다(27). 그런데 부를 쌓는 일이 성공하고 많아지면서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진다(28:2). 교만한 마음은 자신을 신이라(2) 여기게 되고, 나아가 강포를 행하게 된다(28:15-6). 강포는 폭력이다. 무역 거래에서 강포는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협박이며 불의이다(18). 이렇게 무역을 통해서 부를 쌓아가는 두로 왕의 모습을 지혜롭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마침내 그의 불의가 드러나서 에덴의 부유한 보석들 사이에서 떨어지고 망하게 되었다고 선언한다(28:13,16). 지키는 그룹들 사이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이익만을 추구하다가 자신의 지혜로 인해서 떨어진 자가 바로 그룹으로 표현된 두로 왕이다. 경제적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불의와 강포를 행한 자이다. 이런 두로 왕의 지혜가 범죄한 에덴의 그룹의 지혜와 비교된다.

 

뱀의 간교함 혹은 지혜와 비교되는 두로 왕의 지혜이다. 부를 쌓는 지혜이다.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불의를 행하고 강포를 행한 지혜이다. 다른 나라와 섬들의 편리보다는 독점적 무역의 권리를 주장하는 폭력적 지혜이다. 이런 지혜는 남의 먹거리인 선악과를 따 먹도록 유혹하는 뱀의 지혜와 간교함과 맞닿아 있다. 이런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지혜가 종교성을 가지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무역에 있어 이익과 이윤이 신의 자리를 가지면서 자신의 행위의 절대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이데올로기로서 현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된다. 세속적 탁월함 특히 부의 축적의 탁월함을 신의 자리로 추앙하는 것은 어느 시대나 동일하다. 두로 왕을 떨어진 그룹으로 비유하는 에스겔 선지자는 바로 창3장의 옛 뱀의 이미지를 가지고 두로 왕의 지혜를 경고하고 있다. 경제적 가치만을 추구하면서 남의 먹거리와 삶을 보호하지 않는 방식의 삶을 두로가 살았다.

 

옛 뱀을 떨어진 그룹 혹은 타락한 천사라고 하는 이유도 어느 정도 근거가 겔28장을 통해서 확보된다. 단순하게 타락한 것이 아니라 이익과 탐욕에 사로잡힌 그룹이다. 인간의 타락도 결국 남의 먹거리를 지켜내지 못한 것이 뱀의 간교함에 이르게 된 것이다. 벌거벗음을 인식하는 자리가 뱀의 간교함과 같다.

 

3. 성막과 성전에 있는 그룹들

에스겔 선지자는 포로가 된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환상 중에 한 생물을 본다(1:1,5). 그 생물은 그룹이다(10:20). 그룹은 한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의 지도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사분란하게 행한다. 이동식 보좌(메르카바)가 되어서 성막 혹은 성전 안에 그룹들처럼 생물인 그룹은 선지자 에스겔과 함께 하나님이 성전에서 떠나 바벨론으로 옮겨가신다(11:22-24). 그래서 실제로 포로된 곳이 잠깐 성소가 된다(11:14).

 

그룹은 하나님의 보좌와 관계된다. 그리고 그 보좌를 지키는 존재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자체가 된다. 언약궤 혹은 법궤가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 표현한다(대상28:2, 99:5, 132:7. 2:1). 보좌에 앉은 왕이 발을 두는 발등상은 바로 언약궤이다. 그렇다면 앉는 의지의 역할을 하는 것이 언약궤 위에 있는 그룹들의 두 날개이다.

 

에스겔서에서 생물의 형상을 한 그룹이 하나님의 뜻을 일제히 행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범죄한 그룹으로 두로를 칭한다. 두로는 앞서 본대로 해상 중계무역을 통해 많은 지역에 부를 주면서도 결국은 이익에 집중하여 교만하여 바다에 신이라 하고, 무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강포와 불의를 저질렀다. 이것이 결국 범죄한 그룹으로 이해된다. 두로의 범죄는 다른 나라 백성들의 삶에 무관심한 이익에 사로잡힌 자국 중심의 이익을 추구한 결과이고, 이런 이익에 집중하는 두로왕의 지혜가 바로 에덴의 뱀의 지혜와 간교함과 맞닿았다고 본다.

 

하나님이 순종하는 그룹을 타고 예루살렘을 떠나신다. 예루살렘을 떠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상숭배의 죄이다(8). 그런데 우상숭배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어떤 현실적인 유익을 위해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는가? 불의한 삶을 뒷받침하는 우상숭배이다.하나님이 먹그릇을 찬 순행자를 통해 예루살렘 성읍 중에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해 탄식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 표시하라고 한다. 하나님이 이 땅을 버리셨기 때문에 심판하신다(9:4, 9). 그러면 이런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그룹에 머물면서 순행자에게 명령을 내렸고(9:3), 동시에 그룹을 타고 바벨론으로 이동하신다(11:23).

 

예루살렘의 죄를 겔11장은 말한다. 예루살렘은 가마가 되고 1차 포로로 잡히지 않은 예루살렘 거민들은 고기가 되어서 가마가 고기를 보호한다고 주장한다(11:3).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이 성읍은 너희 가마가 되지 아니하고 너희는 그 가운데에 고기가 되지 아니할지라. 내가 너희를 이스라엘 변경에서 심판하리니(11:11). 왜 심판하시는가?

 

11장의 말씀이 선포되는 시점은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사로잡힌지 제5년이다. 시드기야 왕 5년이란 말과 같다. 남 왕국 유다의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포위가 되는 시점이 시드기야 왕 9년이고, 멸망이 11년이다. 멸망되기 전에 유다의 포로가 여호야긴 왕때 일어났다. 이때 먼저 포로로 사로잡힌 자들이 바벨론 그발강가에 머물고 있다. 거기서 에스겔 선지자가 사역을 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 포로가 되지 않은 예루살렘의 거민들이 자신들은 포로가 되지 않았기에 보호를 받는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반대로 포로가 된 자들은 저주받은 자로 간주한다. 그래서 예루살렘 거민들이 포로된 자들의 친척과 형제들을 쫓아내고 있다. 11:15절이 그것이다. 예루살렘 주민이 네 형제 곧 네 형제와 친척과 온 이스라엘 족속을 향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

 

우리는 예루살렘 거민을 한정한다. 그리고 이미 바벨론에 의해 약탈되거나 포로된 자들과 그 집안에 대해서 기업을 얻을 자격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배경이 예루살렘 성전이다. 성전이 있기에 예루살렘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7:25).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을 그룹을 타고 떠나려고 하시고 있다. 그러면서 성전은 예루살렘이 아니고 하나님이 가시고자 하는 포로된 곳이 성소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11:16).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하는 이유는 바로 포로된 자들의 기업을 탐하는 욕심이다. 우상을 섬기기에 이미 기업의 개념이 무너졌다. 그리고 재산으로 밖에는 가치가 없는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만 실제로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를 잊어 먹고 있고, 이를 위해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11:6).

 

이스라엘에게 기업을 주시고, 희년을 주신 것은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도록 함이었다. 47-8장에 기업 분배를 새롭게 하는 것도 바로 함께 사는 세상의 회복을 말한다.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었던 예루살렘은 그룹위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감을 야기하였다.

 

에덴에서 그룹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룹은 성전과 성막에서 여호와의 통치를 지키는 자이다. 그룹은 여호와의 통치가 구현되는 정의과 공평이 있는 세상을 보여준다. 우리가 율법과 율례를 지킴으로 의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에스겔에서 그룹을 타고 예루살렘을 떠나시는 광경은 예루살렘이 우상을 섬기며 이를 배경으로 탐욕이 지배하는 두로와 같은 세상이 되었음을 고발하고 있다.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그룹은 불칼을 가지고 에덴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사는 자들에게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다. 서로 돕고 살아라. 남의 먹거리를 탐내지 말아라.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은혜로운 세상이다.

 

다음은 창4장의 가인과 아벨 제사 사건을 다룬다. 왜 가인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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