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는 수동적 경청과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훈련
- 하나님의 말씀을 독서하고 사유함은 수동적 경청과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훈련을 가장 높은 강도로 하는 것
- 신학공부와 목회는 본디 괴리가 없어

(사진: uploaded by Kari Shea on Unsplash)
(사진: uploaded by Kari Shea on Unsplash)

 

독서: 수동적 경청

    현대 사회는 말하기 바쁜 시대 입니다. 자기 PR의 시대이기 때문이죠. 어떻게 자신을 그럴듯하게 과장하고 부풀리느냐에 성공이 결정되는 시대거든요. 그리고 침묵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묵묵하고 성실하게 일 하고 있으면, 누군가 알아준다는 것은 철지난 신화 쯤으로 치부되는 시대거든요. 그래서 자신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에 몰두할 수 밖에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탓에 서로의 마음에 가만히 귀를 기울일 여유를 빼앗긴 채 살아갑니다. 서로의 진심에 닿지 못한 채, 의미없는 공허한 말들만 주고 받는 관계, 겉도는 이야기로 즐거워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관계만 난무합니다.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지 못한 채,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하게 아는 정도로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서로의 진심을 알지 못하니, 서로 경계하는 관계만 늘어갈 뿐이죠. 그러한 연유로 사람 대 사람으로 진심이 통하는 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 정과 따스함을 보기 어려워졌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독서라는 주제를 들고 나오는 것이 쌩뚱맞게 들릴 수 있습니다. 어쩌면 독서는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하거나 최소화 한 채, 더욱 자기 자신의 세계로 몰입하는 행위처럼 느껴질 수 있거든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독서는 그런 종류의 훈련이 아닙니다. 독서는 타인의 마음에 닿는 훈련입니다. 왜냐하면 독서는 말하기 전에 침묵을 요구하거든요.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전에 조용히 저자가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오랜 시간을 들여서 꼼꼼하게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을 쏟아 부을 것을 요구합니다. 독서를 마치기 전까지는 자기 주장을 내려놓고 수동적으로 듣기만 해야하는거죠. 

    따라서 독서는 자연스럽게 수동적인 경청을 훈련합니다. 그리고 노력과 시간을 들여서 타인의 생각과 마음에 닿으려는 훈련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독서란 타인의 마음에 귀 기울이는 체질로 만들어 가는 습관인거죠.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는 것이 똑똑한 것이라고 교육 하는 이 시대에 독서훈련은 말을 잘하기 위한 훈련이 아닙니다. 타인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체질로 바꾸어 가는 습관 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다음과 같이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독서는 단순한 지적 노동이 아닙니다. 침묵을 유지하며 타인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겸손함 입니다. 어쩌면 현대인들이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독서를 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헤아릴 줄 모르는 것일지도요. 어쩌면 독서를 통해서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저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 적 없기에 타인의 진심을 이해할 줄 모르는 것일지도요. 그래서 피상적인 이야기만 오고가는 메마른 관계에 만족하고 지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거룩한 독서: 절대적 경청

     성경은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독서하라는 겁니다. 말씀을 읽음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헤아리는 훈련을 받으라는 겁니다. 이는 일반 독서와 달리 절대적인 차원에서 수동적인 경청을 훈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인간의 글과 수준과 차원이 다른 경청을 요구하거든요. 하나님의 이야기 앞에 자기 주장과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을 것을 요구합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독서할 때에는 모든 잡념까지 다 제거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저 하나님 마음을 들으라는 겁니다. 나아가서 주야로 묵상하라고 합니다. 매순간을 그리하라는 것이죠. 하루 중에 딱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경청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삶의 태도 전반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경청이어야 함을 이야기 하는겁니다.

    이처럼 우리는 말씀을 독서 하는 훈련을 통해서 가장 높은 강도의 수동적인 경청을 훈련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독서함으로서, 수동적인 경청이 절대적인 수준이 되도록 훈련 받습니다. 타인의 마음을 듣기 위해 불필요한 잡음들을 완전히 소거 시키는데 이르게 되는거죠. 특히 자신의 목소리를 한껏 낮추게 됩니다. 나아가서 수동적인 경청이 삶의 태도로까지 끌어 올리도록 훈련 받는 것입니다. 삶의 태도가 타인을 경청하기에 이르는거죠. 그렇게 우리는 한 차원 더 높은 경청에 이르게 됩니다. 세속적 독서로는 이를 수 없는 수준으로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거죠. 세상 사람들은 흉내내지 못할 정도로 타인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거죠. 

    누군가가 말씀을 많이 읽는데 말씀 지식에 대해서 자꾸 이야기하게 된다면 설익었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을 읽는 훈련을 통해 목표로 하는 경청의 체질에 이르지 못한 증거일테니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독서하는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심을 더 알게 될 수록 침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중의 깊은 곳에 이를 수록, 그의 생각의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갈 수록 모든 것은 모호해지고 아리송해지는 법이거든요. 너무나 오묘하고 신비로운 것이어서 그의 마음과 생각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음을 경험하게 되거든요. 그리고 이러한 오묘함과 신비함을 맛보게 되면, 더욱 안테나를 바짝 세워서, 우리의 모든 감각과 지성의 날을 날카롭게 세워서 하나님에게 귀 기울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의미가 알듯 말듯하기에 더 귀를 쫑긋 세우게 되거든요. 자신의 말조차 그 오묘함과 신비함을 듣는데 방해소음이 되기 때문에 더 차원 높은 침묵에 이르게 되거든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거룩한 독서는 가장 높은 차원으로 타인의 마음을 듣는 훈련입니다. 세속적 차원에서는 이를 수 없는 타인의 마음에 극단적으로 기울어진 상태로 바꾸어 갑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독서하는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서로의 마음에 닿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독하게 외로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세상과 타인은 당신을 외롭게 내버려둔 적 없는 것일지도요. 서로가 거룩한 독서를 통해서 서로의 마음에 귀 기울이고 헤아리는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진심이 없는 텅빈 관계, 서로가 진심을 모른 채 오해하고 미워하기에만 바쁜 서투른 관계만 난무했던 것일지도요.

 

(사진: uploaded by Dollar Gill on Unsplash)
(사진: uploaded by Dollar Gill on Unsplash)

 

사유 훈련: 헤아리는 훈련

    논어에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헛것이다.” 독서에만 머물면 깨달음이 없고, 독서하지 아니하고 생각만 하면 위험한 생각에 이르게 된다는거죠. 그래서 독서와 사유하는 훈련은 반드시 함께 가야한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읽은 것을 두고 깊이 생각하는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러한 사유훈련은 단순히 지식이 확장되고, 생각이 발전되는 차원에 그치지 않습니다. 책을 쓴 저자의 생각과 의도를 단순히 1차원적인 차원에서 정보로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됐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저자의 마음 속으로 더 깊이 파고 드는 훈련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유 훈련이란 글쓴이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글쓴이가 처한 당시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 교육 및 성장 환경, 영향을 주고 받은 지적 교류 대상과 사상과 책 등등. 가능한 글쓴이의 모든 것을 고려하면서, 그의 생각과 마음이 이러한 결론에까지 이르게 된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하고 헤아려 보는 과정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유하는 훈련이란 멀찍이 서서 저자의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자의 입장과 위치까지 낮은 자세로 바싹 다가가서 저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훈련인거죠. 저자의 삶의 사정까지 다 헤아리면서, 저자의 마음을 살펴보는 훈련인거죠. 그러므로 사유훈련이란 현실에서 벗어난 신선놀음이 아닙니다. 치열한 삶에서 한 발짝 벗어나서 여유있는 자들이 하는 그런 것 아닙니다. 저자에게 낮은 자세로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서,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저자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하고 헤아려보는 훈련, 즉 타인을 더 섬세하게 묵상하는 훈련인거죠. 그리고 낮은 자세로 한 사람의 삶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이죠. 사유훈련을 통해서 한 사람을 더욱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사유하는 습관을 통해서 한 사람의 목소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법을 베우는 겁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아주 면밀하고 섬세하게 모든 사정을 헤아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야로 묵상하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지시합니다. 묵상이란 깊이 생각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유하는 훈련을 요구하는 겁니다.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서 제 3자처럼 그 말씀의 의미를 헤아려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정보와 지식을 취급하듯이 대하지 말라는거죠. 대신에 낮은 자세로 하나님의 마음에 기울이라는 겁니다. 나아가서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 위해서 애쓰라는 명령인거죠. 이러한 훈련은 대상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에 담긴 그의 마음이기 때문에,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신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능력과 수단을 동원해서 순종해야 하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훈련을 통해서 절대적인 차원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섬세하게 헤아리는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타인의 입장과 위치까지 낮은 자세로 바싹 다가가서 마음을 헤아리는 훈련. 내가 할 수 있는만큼 타인에 대한 모든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그 사람의 마음으로 파고들어가는 훈련. 그렇게 우리는 한 사람을 진정성 있게 대하는 훈련을 가장 강도 높게 받는 것이죠. 가장 높은 수준으로 한 사람의 마음을 소중하게 대하는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독서하고 사유하는 인간은 따스하고 친절한 법입니다. 타인을 섬세하고 소중하게 대할 줄 아는 법입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이 무례하게 보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독서하고 사유하는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타인의 진심도 모르고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하는 것 역시, 타인의 사정과 사연을 전혀 헤아려보지 못한 채 늘 자기 입장에서 타인을 비판적으로 정죄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독서하고 깊이 생각하는 훈련이 없기 때문일지도요. 

     우리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데 익숙해져야 합니다. 독서하고 사유하는 영성은 따스하고 친절한 법이기에.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는 법이기에. 가장 높은 계명 형제 사랑을 배우는 훈련이기에 그리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관계를 통해서 누리게 될 위로와 평화, 안식이 있을 것이기에 그리해야 합니다.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누릴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자세하게 헤아려 보고 진심을 알고나면 미워할 이유는 사라지는 법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말 못할 각자의 사연과 사정이 있기 때문이죠. 자세히 헤아려 보면,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 이해 못할 일이 없어지기 마련이거든요. 한 사람의 진심을 알고 나면 모든 오해는 풀리기 마련입니다. 처음부터 못된 마음을 가지고 악하게 구는 사람은 생각보다 별로 없습니다. 상처주고 아파했던 부분이 사실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거든요. 해묵은 감정이 사실은 이렇게까지 번질 필요 없었던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독서하고 사유하는 훈련을 통해서 오해하고 미워하며 고통스러웠던 나날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이미 그리하고 있다면, 당신은 독서하고 사유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독서하고 사유하는 영성이 훈련시키는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니까요. 우리는 독서와 사유를 통해서 지식을 배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진심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독서하고 사유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그리하지 않기에, 우리도 세상을 따라 그리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독서하고 싶이 묵상하는 훈련을 통해서 바뀌자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독서와 사유는 목회를 위한 종합 훈련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낮은 자세로 다가가 그 사람의 모든 사정을 헤아려보고, 그 사람의 진심을 고려하는 훈련 말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신학공부와 목회는 본디 괴리가 없다는 확신 말입니다. 신학공부의 여정은 결코 목회 현장에서 멀어지는 시간이 아니라는 확신 말입니다. 신학과 목회가 괴리가 있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독서와 사유훈련이 사려 깊음을 스며들게 하는 공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를 사려 깊게 이해하는 노력이 없는 공부였기 때문이었던 겁니다. 그저 정보와 지식을 취급하는 방식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신학공부와 목회적 현실 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고 느껴졌던 겁니다. 

 

(사진: uploaded by Aaron Burden on Unsplash)
(사진: uploaded by Aaron Burden on Unsplash)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전문성있는 목회가 아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 시대의 필요한 것은 유려하고 전문성 넘치는 목회가 아니라는 생각 말이죠. 이미 현대인들 중 많은 이들이 자신의 분야에 있어서 충분히 유려하고 전문성 넘치거든요. 전문성은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우와 하고 입이 딱 벌어질 뿐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이 시대 사람들이 보고 싶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은 전문성 넘치는 모습이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전문성 있는 이를 통해서 예수를 보고 싶었다면, 교회가 아니라 전문가를 찾아갔을테지요. 저를 포함한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잘 전달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주지 않는 세상 말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보고 싶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은 낮은 자세로 자산에게 바싹다가와서, 친절하고 따스한 표정으로 귀 기울여주는 모습이 아닐까 감히 헤아려 봅니다.

     독서와 사유하는 영성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그러한 모습으로 바꾸어 가는 겁니다. 저는 그런 확신을 가지고 독서와 사유 훈련이 지향하는 모습으로 사역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종종 후회합니다. 성도들에게 너무 바싹 다가간 것은 아닌지. 그 사람에 대해서 애초에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들을 알게 된 것은 아닌지. 그들의 마음을 너무 깊이 알아버린 것은 아닌지. 그래서 설교 때 무슨 문장을 써야할지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자세히 사정을 알다보니 보편적인 이야기를 해도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낄까봐 말이죠. 

     그러한 과정에서 내가 목사로서 지켜야 될 적당한 선을 넘어간 것은 아닌지. 그래서 내 바닥까지 보여준 것은 아닌지. 그래서 목사에게 받아야 할 은혜를 누리기 전에 자꾸 나라는 나약한 사람이 보이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이 주는 후회들 말입니다. 목회는 조금 포멀해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형식적인 모습, 적당한 거리에서 보여주는 젠틀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너무 바싹 다가가 귀를 기울이고 헤아리다가, 그런 것들이 내게 없지 않았나 하는 자책 말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 누군가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실 줄로 압니다. 형제 또는 자매에게 너무 바싹 다가간 것은 아닌지. 굳이 몰라도 될 그 사람의 바닥까지 본 것은 아닌지. 적당한 선을 넘어버린 것은 아닌지. 그래서 내 부족하고 나약한 부분까지 다 드러나 버린 것은 아닌지. 그런데 괜찮습니다. 말씀을 깊이 독서하고 사유하는 훈련의 결말이 그러한 것이라면, 이 역시 거룩한 결말일 것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하는 것이 형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중하게 대하는 방식입니다. 우리의 바닥까지 보실만큼 우리의 가장 내밀한 곳에 들어오시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비밀을 다 드러내신 하나님. 죽음을 앞두고 고뇌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연약한 모습. 우리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들어오신 하나님,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을 보여주신 하나님, 그리고 자신의 나약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신 하나님. 당신은 그 하나님을 닮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변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고 독서하고 사유하는 훈련을 게을리지 하지 맙시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독서하고 깊이 묵상하는 습관을 세워갑시다. 그렇게 하나님 사랑을 체득해 나갑시다. 메마른 세상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따스함과 정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형제와 자매 사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 각박한 세상에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하는 공동체에서 편안함을 누릴 수 있도록 말이죠. 서로의 마음을 향하여 기울이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이 세상에서, 서로를 깊이 헤아리지 않고 오해하며 손가락질 하는 이 세상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평화와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말씀을 달고 오묘하게 여기면서, 말씀을 독서하고 사유하는 영성을 통해 이러한 은혜에 닿기를 소망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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