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문은 신비를 향한 추구
- 해답이 없는 의문을 불편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다
- 끝없는 의문은 당신을 더 깊은 신비의 세계로 인도할 것

김삼열 목사(고신대 신학과 B.A. 고려신학대학원 M.Div, 영국 아버딘 대학교M.Th, 벨기에 루뱅카톨릭 대학교Pre-Doctoral Program, 한울교회 부목사)
김삼열 목사(고신대 신학과 B.A. 고려신학대학원 M.Div, 영국 아버딘 대학교M.Th, 벨기에 루뱅카톨릭 대학교Pre-Doctoral Program, 한울교회 부목사)

 

하나님의 침묵

본고에서 함께 묵상해볼 본문은 욥기711:-21입니다. 성경을 펴고 글을 찬찬히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본문은 욥이 까닭 모를 고난을 마주한 후에, 세 친구들이 찾아와 대화를 나눈 이후 욥이 내뱉는 탄식입니다.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은 욥이 의문형으로 하나님께 탄식을 내뱉고 있다는 것이죠.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도대체 어떤 괴물이길래 나를 이리도 괴롭게 하시는 것입니까?”라는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어서 17-20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욥은 세 가지 의문에 직면했습니다. ①사람을 권징하시며 단련하시는 이유는 무엇인지, ②언제까지 이렇게 나를 괴롭게 하실 것인지, ③설사 내가 죄를 범했다 한들 그것이 하나님 당신에게 무엇이 그리 큰 일이기에 이토록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인지 라는 의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욥의 세 친구들은 이미 해답을 주었습니다. 자신들의 경험, 지식, 그리고 세계관을 토대로 욥이 마주한 고난의 원인을 파악하고, 지금 욥이 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답을 내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욥의 고통을 더 크게 했을 뿐, 어떤 위로도 대안도 되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의문을 던지는 욥과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세 친구들 사이에서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해소되지 않은 의문을 지닌 채 살아가게 방관하시는 분 같아 보입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과 해답이 아닌 것을 제시하는 세 친구들 사이에서 욥은 해답을 얻지 못한 채, 의문을 가득 안고 인고의 시간들을 보냅니다. 욥기는 의문을 던지는 욥, 해답을 제시하는 세 친구, 그리고 침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패턴이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패턴이 끝나고 새로운 시작이 일어나는 지점은 38장입니다. 38장에서 이르러서야 욥은 비로소 하나님과 대면하게 됩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순결한 자인 욥의 의로움이 바닥날 때에, 그리고 인간의 명철로 무장한 욥의 세 친구들의 지혜가 바닥을 드러낼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면하시고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침묵의 의미를 비밀스레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의문에 침묵하심으로, 의문이 가득한 채 살아갈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문이 가득한 삶의 순간들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러한 연유로 하나님께서는 답이 없는 의문들과 씨름하며 살아낼 시간과 공간을 열어 두십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그저 방관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심 있게 우리의 악다구니 섞인 질문을 받아 내시며, 때로는 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오명을 덮어 쓰면서, 그 시간이 이를 때까지 묵묵히 인내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그렇게 우리가 붙들고 살던 의로움이 얼마나 얕은 것임이 드러날 때까지 인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문에 대하여 침묵하십니다. 그렇게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 채 내려 두십니다. 이러한 해소되지 않는 의문은 우리의 경험과 지혜, 그리고 지식이 얼마나 무상한 것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배운 것으로부터, 경험한 바에 따라, 누군가에 의해 가르침 받은 바를 따라 최종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이 철저하게 벗겨질 때까지 그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침묵은 때로는 분명한 음성보다 더 묵직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해소되지 않는 의문들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 여정이라고. 그 시간들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포함되어 있으니 신뢰하라고 말이죠. 당신과의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게 될 깊은 교제로 들어가는 관문이라 하시며 인내하라 하십니다. 그 자리를 떠나지 말고 견디라 하십니다. 해답을 주는 대신에 그저 괴로움으로 유발된 의문들을 삶으로 겪어내라 하십니다. 따라서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의문과 씨름하는 삶이 신비에 이르는 거룩한 훈련이라고. 의문이란 신비에 이르는 거룩한 추구라고 말입니다.

 

(사진:trevorknapp.com)
(사진:trevorknapp.com)

 

의문에 얽매이지 않는 삶

저는 여러분께 스스로 욥기 38장부터 41장까지 묵상해 보시기를 제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의문과 씨름하던 욥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욥의 의문에 대해서 일언반구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욥의 의문을 해소하시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저 자신이 얼마나 위대하며, 지혜로우며, 당신의 계획이 얼마나 광대한지 말씀하실 뿐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 욥에게 또 다른 의문을 던지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질문은 신비롭게 작동합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던지시는 의문은 욥의 의로움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의의 근원이며 의로움 그 자체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한줌 같은 너의 의로움에 근거해서 나의 공의를 시험하려는 네 질문이 옳으냐고 말입니다. 동시에 욥의 세 친구들의 지혜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한 지혜의 근원이자, 명철 그 자체인데, 너희들이 내린 대답이 가당키나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제서야 욥은 자신의 의문들이 의로우시며, 위대하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에, 그 질문 자체가 정당하지 않음을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욥은 더 이상 자신들의 질문들에 얽매이지 않게 되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의문과 더불어 씨름하는 삶의 순간들 속에서 하나님의 더 깊은 신비와 광대하심을 만날 때에, 우리 삶에서 발생했던 의문들이 어리석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의 의문은 해소가 되는 것이죠. 자연스럽게 의문이 사라집니다. 의문의 해답이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말이죠. 이처럼 우리의 내면에 소용돌이 치는 의문들은 하나님과 대면하도록 이끌어 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에 우리의 무지함을 일깨우는 또 다른 의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새롭게 발생한 의문은 하나님의 더 깊은 비밀로 당신을 인도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의문에 답을 얻는 인생이 아니라,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의문에 이끌리어 깊은 신비를 마주하게 되고, 이전의 의문이 데려다 놓은 미몽의 상태에 벗어나 새로운 지혜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에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의문들을 따라서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신비를 맛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문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의문을 직면하고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그 의문을 더욱 더 깊게 하십시오. 끊임없이 의문을 던짐으로써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하십시오. 설사 당신 안에 회의와 불안이 일어나더라도 말입니다. 그 의문에 답이 없다고 하여, 의문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 의문들을 따라가는 당신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문은 더 심원한 하나님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하기 때문입니다. 의문이 해소되지 않음에 불안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끊이지 않는 의문들은 따라가며 살아갈 때에, 더 이상 그 의문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선물로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쉬운 대답의 유혹

그리고 욥의 세 친구들이 인간의 지혜에 기반하여 내놓은 해답들이 틀렸음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드러냅니다. 쉬운 대답을 얻으려는 우리의 습관이 옳지 않다고 말이죠. 왜냐하면 타인에게 쉽게 얻어낸 대답은 당신이 의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시간과 공간을 앗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가장 깊이 만나는 신비에 이르는 사다리를 걷어차 버릴 것이기 때문이죠. 당신이 어딘가에서 얻어낸 쉬운 해답은 당신이 인간이 생각해낸 피상적인 대답에 머물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대면하여 나누는 신비로운 교제와 대담 속에서 얻게 될 지혜와 신비에 이르지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말씀 드립니다. 답을 찾아 이 교회, 저 교회, 이 목사 저 목사 설교 찾아다니며, 타인에게 답을 얻으려는 헛된 노력을 멈추십시오. 당신에게 명쾌하게 보이는 해답을 주는 척척 박사들을 피하십시오. 그들은 욥의 세 친구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누가 그들의 지혜와 지식, 경험이 어렵고도 복잡한 당신의 삶에 대해서 해답을 줄 권한을 주었습니까? 누가 그들에게 당신의 삶에서 비밀스럽게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습니까? 곧 무상함이 드러날 인간의 지혜로 인하여 쉽게 안도함을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대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피어 오른 의문들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그 의문들, 회의와 의심, 불안함을 그대로 품고 살아가십시오. 당신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불안의 시간들이라면 그 순간들을 지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권면 드릴 것은 당신 또한 선생이 되지 마십시오. 당신의 짧은 인생의 경험과 부족한 지혜에서 나온 그 피상적인 대답이 그들에게 잠시 안도함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나, 하나님께서 살아내라 명하신 의문의 시간들을 그들의 삶에서 치워버릴 수 있음을 아시고 두려워 하십시오. 그저 그들의 삶에서 피어 오른 질문들 앞에 침묵 하십시오. 이겨내라고도 하지 마시고, 성경으로도 가르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성경 또한 해답을 주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해답을 주는 대신, 답이 없는 삶은 어떠한 것인지 묘사하는 그칠 때도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해답이 없는 상태는 그저 그 삶을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의도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소되지 않는 의문의 상태를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길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여정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욥기는 그러한 삶을 아주 파격적이고 극적인 모양으로 그려내고 있을 뿐, 우리의 삶의 본질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답이 없는 상태를 받아들이고 그저 그 시간들이 지나갈 때까지 내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것이, 신비에 이르는 고행이며, 신비에 이르는 거룩한 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살아낼 수 있도록 침묵으로 지켜봐 주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사진: amaz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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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훈련: 의문을 지속하는 삶

그러나 우리는 답이 없는 상태를 불안해 합니다. 그래서 잘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권위있는 이가 내놓은 피상적인 해답에 만족해버리거나, 스스로 한계 있는 대답을 내어놓고 그것이 답이라고 스스로를 기만합니다. “우리 목사님이 그랬어. 어떤 유명한 신학자가 그랬어. 내가 살아보니 그렇더라”며 불안한 자신을 위로하려 듭니다. 조금 더 편안해 지려고 말이죠. 그러다가 그것이 진짜라고 믿어버리는 상태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렇게 헛된 대답에 머무르게 되는거죠.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의문이 발생시키는 불안함을 견디지 못해 마땅히 살아내야 할 시간과 장소를 회피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에게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공동체 속에서 솔직한 나눔을 통하여서 내가 가진 회의, 의심, 불안함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죠. 이것이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 신앙생활의 일부라는 사실, 아니 인생의 일부라는 사실이 의문이 가득한 삶을 받아들이고 지속할 용기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답이 없는 상태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공동체는, 그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솔직한 나눔은 의문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용기를 배양하는 거름입니다. 공동체의 솔직한 나눔은 의심과 회의로 가득한 삶을 편안하고 익숙하게 하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것입니다. 반면에 욥기는 홀로 지속하는 의문의 삶이 얼마나 괴로운 것이며, 외로운 것인지 잘 드러냅니다. 욥의 아내도 그를 비난하고 떠나버리며, 그의 친구들도 그의 과오를 인정하라고 몰아붙입니다. 그의 나약함과 연약함, 불안함을 솔직하게 토로할 곳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욥은 죽음을 더욱 갈망했던 것일지도 모르죠. 이러한 욥의 고독함은 역으로 우리에게 서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따스한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냅니다. 서로의 나약함과 불안함, 회의를 솔직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의 존재는 의심과 불안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수적임을 드러냅니다. 신앙생활 역시 아주 멀고 험한 길이기에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저는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다 극복하라고 권하는 친구를 멀리 하십시오. 성경에서 해답을 찾아서 가르치려는 이의 말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그 사람과 그의 지혜는 의문이 떠오르는 현 상태가 마치 잘못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켜, 당신이 지속해야 할 의문이 가득한 삶에 대한 의지를 꺾어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의문의 삶을 살아가는 당신을 낙심케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삶을 지탱하지 못하고 의문을 회피하는 삶을 살게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에게 이르게 될 여정에서 벗어나게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 계실지도 모를 누군가에게도 권면 드립니다. 설사 당신이 믿음으로 다 극복하였다 하더라도, 성경에서 답을 찾았다 하더라도 입 밖에 그런 말을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가벼운 말 한 마디가 의문 속에서 고통 받는 누군가에게는 절대 가볍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낙심케 할 수도, 의지를 꺾어 놓을 수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자를 낙심케 하여 지옥 불에 들어갈 이가 당신이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그저 당신의 숨겨진 연약한 모습을 내어놓고, 곁에 있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는 이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괴로운 삶을 지속할 용기와 의지를 얻기 때문이죠. 괴로움이 나만의 것이 아니란 이유만으로 지독한 고독함이 조금은 달래어 지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조금 더 솔직해지고,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 보임으로써 의문으로 가득한 고통스러운 삶의 동행자가 있음을 그들에게 알게 해주라는 것입니다. 타인을 섬기는 삶이란 위대한 희생과 헌신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의 아픔과 고통, 의심과 불안을 솔직히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솔직해지기만 하면 발휘할 수 있는 능력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솔직하지 못합니다. 나약함을 드러내면 안된다는 강박이 우리가 가진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합니다. 공동체를 통해 서로가 누릴 수 있는 유익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공동체를 통하여 의문이 가득한 삶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거룩한 연료를 얻지 못하게 합니다. 솔직하게 내어놓는 대신에 홀로 간직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가면 뒤에 숨어서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합니다. 우리가 맥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의 상처와 의문, 회의와 불안을 솔직하게 나누는 대신에, 자신 안에 숨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의문으로 가득한 고통스러운 삶에서 스스로 혼자가 되어 지쳐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타인이 고독함에 처하도록 내버두려 두었기에 우리에게 타인을 살리는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론

글을 맺으려 합니다. 저희는 의문을 품고 사는 삶이 하나님이라는 거룩한 신비에 이르는 삶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시간에 당신이 가진 의문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직면해보시기를 권합니다. 잊어버리고 살았던 의문들을 하나씩 떠올려 봅시다. 마주하기 두려워서, 씨름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워서 회피해버렸던 의문들을 다시 마주해봅시다. 그렇게 당신 내면 속에서 요동치는 의문들이 하나님의 깊은 신비로 부르시는 거룩한 음성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그 의문을 따라 살며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굳이 편안하고 조용하게 살고 있는 지금을 뒤흔들고, 불편하게 살게 하려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애써 피하고 외면했던 것들을 다시 붙들고, 더 이상 그것들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선물로 얻게 될 신비를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생의 의문들에 조금씩 해방되어 가는 삶을 살자고, 그것이 신앙의 능력이기에 그것을 누리며 살자고 권면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 드릴 것은 솔직한 나눔의 공동체는 의문 가득한 삶을 지속하게 하는 용기와 의지를 제공하는 능력이라고 배웠습니다. 당신에게 그러한 솔직한 나눔의 공동체가 있었습니까? 나의 구석까지 연약함을 다 솔직하게 털어놓을 영적 친구가 있습니까? 어쩌면 당신이 편안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닌지요? 그 동안 나의 배려 없는 말들이 상대들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은 아니었을런지요? 그래서 그들이 나에게 솔직하기 어려웠던 것은 아닌지요? 오늘 이 시간에 기도하며 나아가길 원합니다. 타인에게 편안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타인이 솔직해질 수 있을 만큼 신뢰 받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말이죠. 그리고 한 가지만 더 기도합시다. 내가 먼저 솔직해질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말이죠. 그래서 솔직한 나눔이 일어나고, 그 나눔을 통하여 형제와 자매들이 하나님에게 이르는 여정인 의문 가득한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역사가 각처의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일어나게 해달라고 말이죠. 그러한 능력이 충만하게 넘치는 여러분의 교회가 그러한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먼저 솔선수범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죠. 그렇게 삶의 의지와 위로를 제공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의 초석이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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