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적 타자이신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경험은 여태까지 익숙하고 편안한 방식을 부수는 폭력적 은혜
- 폭력적 은혜로 느껴지는 하나님이 자리 잡는 과정이야 말로 진정한 평안에 이르는 과정

 

(출처: 국민일보, 플래너리 오코너)
(출처: 국민일보, 플래너리 오코너)

 

낯선 이의 침입 

 

갈2:20-2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본문에서 바울은 이제 내 안에 사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선포합니다. 바꿔 말하면, 바울 안에 타자가 들어왔다는 거죠. 그리고 새롭게 들어온 타자는 바울의 자아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삶과 영혼의 중심을 타자에게 빼앗겨 버린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이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21절을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닌 전적 타자가 들어와서 살고, 나를 지배하는 것이 은혜라고 합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율법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정통한 사람이었고, 그 율법의 전통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율법은 삶의 방식이요 신념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태까지 자신에게 익숙하던 삶의 방식과 충돌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자신 안에 들어와 중심을 차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타자인 중심을 차지하게 되면서, 타자의 의지와 욕망에 이끌린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자신이 익숙하고 편안하던 것들이 불편해 집니다. 거부해야 할 것들이 됩니다. 그 결과 그 동안 편안하고 익숙했던 것과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되는 거죠. 

이처럼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오는 은혜는 여태까지 내가 살아가던 방식과 일상의 모든 것을 밀어내려 하는 힘입니다. 그리스도의 세계는 너무 이질적인 것이어서 나의 세계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낯선 세계와 낯선 이의 침입은 창조적인 작용이 일어나는 현장이기도 하고, 나의 관점을 확장 시켜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세계를 산산조각 내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외국에 여행을 가거나 그 곳에 정착하여 살게 될 때, 여태까지 내가 가져왔던 지식과 관점이 여기서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직면하는 것처럼 말이죠. 새로운 문화와 관습을 접하게 되면서 여태까지 내가 가져왔던 선입견들과 그릇된 지식이 부서짐을 경험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바울은 이러한 경험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낯선 타자가 자신 안에 들어와서 자신이 여태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 원칙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경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폭력적 은혜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나타났을 때, 기존의 삶의 체계와 방식이 그를 받아내지 못한다사실을 줄기차게 묘사합니다. 기존의 삶의 공식이 그를 설명해내고 담아내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인간은 충격과 공포, 놀람의 반응을 자아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신비 앞에 마주선 모세와 선지자들이 그리했던 것처럼... 이처럼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전적 타자이신 하나님의 출현은 놀람과 충격을 선사합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자연법과 세상의 원칙을 위반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세계가 내 안에 밀고 들어오는 은혜는 불안함을 유발합니다. 여태까지 믿어왔던 삶의 원칙과 공식이 무너지기 때문이죠. 대신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원칙과 공식을 세우시죠. 아직은 받아들일 수 없는 새로운 것들이 밀고 들어와서 자리 잡으려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라는 은혜,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은혜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리는 폭력입니다. 내가 믿어왔던 것을 뒤집어 엎어 버리는 소란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북미의 괴테라고 불리우던 플래너리 오코너는 은혜를 폭력이라고 정의합니다. 

미학의 오랜 역사 속에서 아름다움과 고통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우리 몸의 기관들은 극단적으로 확장됩니다. 그래서 아름다움 앞에서 고통을 느끼게 되는거죠. 우리가 종종 들어왔던 ‘숨막힐 듯한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문학적 표현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여성을 바라볼 때에 남자들의 동공이 확대된다 표현은 지나가는 말장난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이며, 아름다움에 반응하는 몸의 반응을 이야기하는 과학이었던 겁니다. 이처럼 아름다움이 내 삶에 들어오는 경험은 언제나 고통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신비가 일상에 들어올 때 폭력적 모습을 드러냅니다. 신비는 언어의 형식을 부수어 버립니다. 신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러한 연유로 신비가들은 침묵에 접어듭니다. 언어와 사고에 폭력을 가해버린 겁니다. 

마찬가지로 신비를 경험한 이들은 자신의 육체가 신비를 감당해내지 못함을 경험하죠. 그래서 신비가들의 육체가 뒤틀리고, 설명할 수 없는 상흔이 남는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서  흥미롭게 분석한 결과가 있는데, 미셀 드 셰르토가 쓴 ‘La possession de Loudun(루됭의 귀신들림)’이라는 책입니다. 일상과는 전혀 다른 타자성이 출현했을 때, 즉 신비가 발생 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은 우리에게 매우 폭력적인 것으로 경험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의 근원이자 미의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내 삶에 품게 될 때에 고통이 동반되는 것은,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극도의 신비, 즉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올 때에 소란이 일어나는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라는 것은 평안, 기쁨, 축복만으로 정의할 수 없는 미묘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평안 하기만 하다면, 기쁘기만 하다면 그것은 은혜라는 신비를 제대로 소유한 적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이전의 삶이 거부당하며,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내 삶에 자리 잡기 시작하는 것은 평화롭기만 할 수 없는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워놓은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이 기쁠 수만 없기 때문입니다. 나만의 공간에 예고 없이 누군가가 침입한다는 사실이 유쾌 하기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들어오시는 은혜는 내적 투쟁을 유발합니다. 이전의 질서와 습관을 유지 하려는 나의 옛 자아와 새로운 질서와 습관을 세우려는 하나님이 충돌하기 때문이죠. 옛날로 돌아가려는 관성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이 부딪히기 때문이죠. 이를 바울은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갈 5:17 함께 읽어볼까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따라서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는 일은 소란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은혜가 없었다면 애초에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살던 대로, 익숙한 대로 살아가면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신 이상, 그렇게 되는대로 살아가던 나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으시는 겁니다. 

 

(출처: 알라딘, 국내에서는 루됭의 '마귀들림'으로 번역되었다.)
(출처: 알라딘, 국내에서는 루됭의 '마귀들림'으로 번역되었다.)

 

은혜를 소유하는 방식: 나를 대적하여 싸우는 것

바울은 이와 같이 소란스러운 은혜를 소유하기 위한 삶의 방식이 어떤 것인지 보여줍니다. 19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그는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이전에 익숙하고 편안한 삶, 여태까지 살아온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선포입니다.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려는 관성에 저항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 안에 사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말이죠. 나의 모든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욕망이 나를 완전하게 지배할 때까지 말입니다. 바울을 통해 우린 발견합니다. 은혜를 소유하는 방식은 익숙한 내 삶의 모든 모양과 방식, 습관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서 옛 자아와 옛 질서를 무너트리시는 폭력적 은혜에 동참하여, 나의 모든 옛 모습을 허물어 버리는 것이라고. 내 안에 들어온 타자이신 그리스도의 욕망이 나의 것이 될 때까지, 그의 세계가 익숙해질 때까지, 그의 삶의 문법과 공식이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나를 대적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내 욕망을 쳐서 타자의 욕망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내 안에 들어온 타자와 더불어 살기 위해서 나의 삶을 대대적으로 수술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말로 꾸며내고 자랑할만한 위대한 업적이 간증으로 남은 삶만이 은혜를 증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격변하여 성공했다는 공식이 은혜를 증거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치열하게 자신과 투쟁하는 삶 그 자체가 은혜를 증거하는 삶일 수 있다는 것이죠. 꺼지지 않는 내 추악한 욕망과 아직도 살아 펄펄 끓는 나의 자아와 싸우는 삶 그 자체가 은혜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살아나는 욕망과 옛 자아에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십자가에 못박는 미련하고 지긋지긋한 과정들이 은혜를 품어내는 삶의 방식이라는 겁니다. 그 미련한 과정을 반복할 때가 가장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신비, 하나님을 품고 사는 순간 입니다. 세익스피어는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표현한 건지 소네트 89편에서 나를 대적하는 삶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합니다. 

 

소네트(Sonnet) 89, 셰익스피어(Shakespeare)

 

당신이 내 어떤 잘못 때문에 나를 버렸다 말한다면

나는 그 잘못을 더 부풀려 인정하리다

나를 절름발이라 말한다면 나는 즉시 다리를 절으리다

당신의 주장에 어떤 항변도 하지 않으리다

 

사랑하는 이여, 사랑이 변한 것에 대한 당신의 변명은

내가 날 욕되게 하는 것의 절반도 날 욕되게 할 수 없도다

당신의 뜻을 따라 나는 나 스스로 오명을 뒤집어써


그간의 정을 끊어버리고 낯선 사람 대하듯 행동하리다

당신이 즐겨 찾는 곳은 가지 않을 것이며 

내 혀에 당신의 사랑스런 이름도 담지 않으리다

불경한 내가 우리의 옛 친분을 어쩌다 언급해

당신의 이름에 누를 끼치는 일 없도록 하리다

 

당신을 위해 나는 나를 적으로 여기겠다 맹세하리다

당신이 미워하는 사람을 나 역시 사랑할 수 없으니 

 

세익스피어의 시는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립니다. 하나님이 사랑할 수 없는 나의 옛 자아와 모습들과 끊임없이 싸우는 그 과정이 하나님을 가장 아름답게 사랑하는 방식이며, 그를 나의 가장 깊은 곳에 모시는 행위라고. 그와 가장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는 순간이라고 말이죠. 지긋지긋한 나를 향한 전쟁의 나날들이 말입니다. 

 

(출처: brunch.co.krAsandhya217, 세익스피어 소네트 89)
(출처: brunch.co.krAsandhya217, 세익스피어 소네트 89)

 

파괴적 창조

자아를 대적하는 괴로운 삶 그 자체로 은혜인 이유가 있습니다. 내 자아가 그렇게 조금씩 허물어 지면서 새로운 것이 스며들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새로운 것이 들어서기 위해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묵은 것은 부서져야만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것을 위한 공간이 생깁니다. 이러한 원리를 파괴적 창조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아와 옛 습관을 허무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러한 전쟁에 동참하기 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새로운 것으로 채우시기 원하시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는 경건조차 자아를 강화시키는데 사용할 뿐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은혜란 우리의 소원대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무의식 속에 우리의 기도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원과 성령의 소욕에 대해서 묻지도 생각하지도 않고, 자아의 욕망만을 내뱉는 겁니다. 그 결과 기도의 시간에 나의 자아의 목소리만이 가득 메우고 있을 뿐입니다. 기도마저 내 자아가 드러나는 공허한 시간으로 그칠 뿐인 겁니다. 아무리 거룩하게 기도해도 나의 목소리만 메아리로 들려올 뿐. 나의 자아만 강화될 뿐. 새로운 것이 스며들지 않는 것입니다. 설교 시간에도 나의 입맛에 맞는 말씀만 골라 들으며 자아를 강화시켜 갈 뿐, 나의 자아를 부수고 새로운 것이 들어올 공간을 마련하지 않습니다. 나의 입맛에 맞지 않고, 나의 자아를 거스르는 말씀을 튕겨내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거룩하다 생각하나 실상 나의 자아를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경건을 이용할 뿐입니다. 그래서 가장 거룩한 순간에도 자아의 메아리를 가득할 뿐입니다. 자기 파괴가 없는 거룩은 자아의 목소리를 공명 시킬 뿐,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공간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없는 의미 없는 경건과 거룩의 흉내만 반복하게 될 뿐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들어와 소란을 일으킵니다. 내가 굳게 지켜왔던 삶의 굳어버린 습관들과 신념들에 폭력을 가하십니다. 그렇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공간을 마련하시는 겁니다. 나의 자아와 욕심으로 가득 찬 우리에게 오셔서,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내 안에 그 틈을 점점 확장하십니다. 나의 세계에 균열을 내시는 겁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여 굳어져 버린 내 모든 것들을 부수어 나갈 때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새로운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 욕망과 자아의 공간들이 점차 사라져 갈 때에,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새로운 은혜가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자아와 욕망이 희미해질 때까지, 나의 세계가 사라질 때까지 나를 매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새로운 은혜가 내 안에서 준동하기 위해서 말이죠. 나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 구체적으로 일어날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와 역사가 무엇인지 예를 들어볼까요? 

먼저 자아가 사라지고, 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나면 우리 안에 새로운 평화가 스며들어오게 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거스를 나의 욕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와 질서에 저항할 나의 세계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연스레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 하나님의 심어 두신 만물과 조화롭게 어울려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과 평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거죠. 우리에게 폭력적인 것으로, 소란으로 경험되었던 은혜는 사실은 진정한 평안으로 가는 과정이었던 겁니다. 내 안에 가득한 괴로움과 내적 갈등은 내 삶을 진정한 방식으로 평화롭게 하는 그의 거룩하신 사역이었던 겁니다. 나의 자아를 산산조각 내는 거스를 수 없는 삶의 파도는 하나님의 새로움으로 나를 채우시는 역사의 일부였던 것이죠. 그러므로 내 안에 일어나는 내적 갈등과 소란스러움을 그 자체로 은혜롭다 고백하는데 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아가 죽어지고 나서 우리는 은혜를 드러내고 이웃과 세상을 감화 시키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한국교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목사님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분들 모두가 설교가 탁월하거나 성경 해석이 뛰어난나셨던가요? 모두가 논리적으로 신학적 난제를 명쾌하게 설명해내는 분들이셨던가요? 진부한 이야기들, 별 볼일 없는 신학적 통찰력들, 어눌하고 빈틈이 많은 논리들로 우리를 가르쳤던 분들이 아니었는지요? 그런데 그들의 말에는 왜 힘이 있는지요? 왜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가 교회와 세상을 감화 시키는지요? 

자아를 드러내는 탁월한 지적 능력과 유창한 언변이 사라지고 나서야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원리 때문은 아닐까요? 자아가 희미해지고, 나의 세계가 사라지고 나서야 은혜를 드러내는 능력이 임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내가 죽어지고 나서야 하나님의 은혜로 이웃과 세상을 감화시키는 능력을 얻기 때문은 아니었을런지요. 그래서 대단한 것을 하지 않아도, 위대한 것을 말하지 않아도, 그저 작은 몸짓과 어눌한 말로도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발휘하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내가 사라지고 그리스도가 살게 되는 신비가 가진 능력입니다. 나를 대적하여 싸우는 것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혜의 프로세스

이러한 과정들은 결코 금방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품어낸다는 것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은혜를 몰랐던 우리가, 하나님을 몰랐던 우리가 은혜의 원칙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의 원리와 관습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낯선 타국에 가서 언어와 문화, 관습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이전의 모든 것을 털어내고 새롭고 낯선 것들에 익숙해져야 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고 인내와 끈기가 필요한 삶입니다. 이처럼 은혜는 단기간에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바꾸지 않습니다. 오랜 인내와 연단을 통해서 조금씩 바꾸어 갈 뿐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180도 변해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의 삶이란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저 이 지긋지긋한 나를 향한 전쟁이 언젠가는 나를 그리 바꿀 것이라고 신뢰하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일어나는 지독한 소란이 나를 아름다운 작품으로 빚어가고 있다고 신뢰하며 견디는 것입니다. 인내와 연단이 소망을 만든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즉각적으로 은혜의 결과를 얻기 원합니다. 바로 평안함에 이르고 싶어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은혜를 품어내는 삶의 과정은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은혜의 결과에 바로 이르지 못함에 대하여 불평하고 원망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처럼 말이죠. 결과만을 은혜라고 생각하기에 모든 과정이 괴롭거나, 지루하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게 선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겁니다. 은혜의 프로세스, 즉 과정을 건너뛰기 원하는 헛된 기대와 욕망이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들었던 겁니다. 

우리가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과정을 생략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들을 견뎌내기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은혜를 구하는 이는 언제나 과정을 거치게 되어있음을. 은혜에 이르기 원한다면, 그 과정들을 살아내야 함을, 인내해야 함을, 견뎌내야 함을, 그리고 끝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함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선한 고백은 괴롭고, 불필요하다 여겼고, 원망스럽기까지 했던 모든 과정이 은혜였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선한 결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음을 깨달은 자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지나온 자가 비로소 할 수 있었던 고백입니다. 그러니 부디 하나님의 과정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그 과정을 살아내십시오. 인내하십시오. 그렇게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내 삶을 돌아보았을 때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다는 고백이 당신의 입술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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