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묵은 신비를 담는 그릇이다.
- 침묵은 신비를 다루는 철학적 담론이다.
- 침묵은 외면적인 고요함이 아니라, 경청의 인식론이다.

(사진: 더 아시아N)
(사진: 더 아시아N)

서론: 시리즈의 의도

앞으로 5-6번에 걸쳐서 신비와 일상이라는 시리즈로 신비에 대해서 묵상해보려고 합니다. 신비는 한국교회에서 상당히 훼손된 개념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신비라는 것은 우리의 일상과 괴리된 더 높은 영적 차원, 소위 방언을 하거나 통변을 하는 것, 병을 고치는 은사, 환상을 본다든지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것과 연결되어 오해되어 왔습니다. 마치 신비란 우리의 익숙한 삶의 환경을 벗어나야 경험할 수 있는 것, 더 특별한 경건의 훈련과 열심이 있어야 우리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은혜가 되어버린 것이죠. 그러한 연유로 우리의 익숙한 매일의 삶 속에서 맛볼 수 있는 신비의 깊이를 놓쳐버려 왔기 때문이죠.

그러나 중세의 수도원 전통에서 신비라는 개념은 우리의 노동과 습관, 매일의 묵상과 사색과 깊이 연관된 개념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신비라는 것은 우리의 일상의 경건이라는 것이죠. 신비는 우리의 일상을 초월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일상을 떠나서는 체험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신비는 기도원에서나 통용되는 단어도 아니며, 기적과 특별한 종류의 체험에 제한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경건과 영적 훈련을 하는 소수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은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소소한 것에서 획득할 수 있는 은혜라는 것이죠. 따라서 저는 신비와 일상이라는 시리즈를 통해서 신비를 우리의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내려 보려고 합니다. 이것이 신비와 일상 시리즈를 연재하는 저의 의도입니다.  

 

신비를 마주한 바울

바울은 소위 삼층천이라고 불리우는 신비를 체험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환상 속에서 봅니다. 그는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가는데, 신비의 황홀로 인하여 자신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환상을 본 바울도 알지 못합니다. 이는 엑스타시라고 부르는 순간입니다. 신비에 매혹되고 사로잡힌 순간이죠. 신비의 단계에 깊이 들어감으로 인하여 육체적 감각이 희미해지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몸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도 헷갈리는 단계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아는 그 사람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다고 묘사합니다.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그가 보고 들은 신비가 인간의 언어와 표현의 범주를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신비라는 것은 너무나 깊고도 오묘한 것이어서 사람의 지혜와 말로는 다 드러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라고 말할 뿐, 그 신비가 무엇인지 어떤 종류인 것인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말이나 인간의 지혜를 통해서 표현하려고 하는 순간 자신이 체험한 신비를 온전히 설명해낼 수 없다는 한계를 직면하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비를 체험한 이들은 달변가일 수 없습니다. 신비를 표현하고 할 때마다 마땅한 표현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죠. 신비를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함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죠. 모든 언어적 기능이 정지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말문이 막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한 연유로 신비를 아는 자는 자연스럽게 눌변이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스스로 눌변임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철학에 대해 토론할 때에, 그를 본 자들은 바울을 말쟁이라고 부릅니다. 신비가 아닌 철학에 대해서 말할 때에 바울은 눌변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인간의 지혜와 지식에 있어서 그는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다만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 앞에서 그가 자랑할만한 지식과 철학들이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눌변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동일한 차원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신비를 전할 때에, 십자가라는 신비를 전할 때에,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혜와 지식이 신비 앞에서 마비 되기 때문에, 미련한 말과 방법으로 밖에 전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죠. 그 결과로써 신비를 아는 자는 바울이 고백한 바와 같이, 자신이 알던 모든 지혜와 지식이 배설물과 다름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지독하게 사랑할 때, 내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길 때, 어떤 말로 내 사랑을 표현해도 언어가 다 담아내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신비를 경험한 자들은 초월적인 신비를 언어적인 것으로 치환 시키려 할 때에, 언어가 담아내지 못하는 신비의 차원들이 잘려 나가는 것을 압니다. 신비를 인간의 범주로 표현하고 전달하려면 할수록 그 한계를 더욱 절실하게 절감하게 됩니다. 따라서 신비를 손상시키지 않고 온전히 보전하는 유일한 방법이 침묵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침묵할 때에 비로소 신비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신비를 맛보고 느끼는 이들은 침묵의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한 연유로 바울은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간 낙원에서 들은 것들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는 것입니다. 동일한 이유로 바울은 눌변이 되기를 선택했던 것이며, 오늘 본문에서는 침묵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신비를 온전히 담아내고 싶은 욕망이 바울을 침묵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신비를 담아내는 그릇: 침묵

따라서 저는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침묵은 신비를 담는 그릇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침묵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침묵이 삶의 습관이 될 때에 우리는 신비를 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신비는 비로소 우리의 삶에 찾아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하기에 너무 바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얼마나 아름다운 말로 잘 꾸며 내느냐에 따라서 사회에서의 성공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죠. 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사람이기에 위해서도 아름답게 표현하는 훈련을 받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내 안에 무언가를 담아내는 훈련 없이 뱉어내도록 강요 받습니다. 담아낼 틈도 없이 쏟아내기 때문에, 우리 말은 아무 것도 없는 텅빈 자아만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보다 배우지 못했고, 말도 잘 못했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경험했던 신비가 우리 안에는 없는 것이죠. 지독한 가난 때문에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셨던 어른들, 형제들을 위해 희생하느라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탓에 설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가득했던 신령함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배우지 못해서, 아는게 없어서, 자신의 무지가 드러날까봐 부끄러워서 우리의 선배들은 자연스레 침묵했습니다. 가난해서 교회를 물질로 섬길 수 없어서 민망했던 그 어른들은 자연스레 말 없이 몸으로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연스럽게 신비를 담아낼 그릇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없던 신비와 신령함으로 가득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비를 품지 못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선배들과 달리, 자연스럽게 침묵하게 하는 겸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단하지는 않아도 배울 만큼 배워서, 알만큼 알아서, 있을 만큼 있어서 침묵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성령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혹시 아시는지요?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성령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즉, 침묵하는 영이시지요. 성령께서는 고통의 신비라는 것을 침묵으로 안으시고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영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교의학적으로 성자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는 흥미롭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에게 들은 것을 말씀하시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언제나 자신의 말을 하는 대신에, 성자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나게 하시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결코 드러내지 않으시는 존재입니다. 언제나 성부는 성자에게 말씀하시고, 성자는 세상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은 항상 침묵하십니다. 

고린도전서 2:10-11을 함께 읽어봅시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성령께서는 알지 못하기에 침묵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깊이 통달하신 분이시지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영, 오직 성령만이 아신다는 것이지요. 가장 깊은 신비를 소유한 유일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침묵을 지키십니다. 따라서 저는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충만이란 침묵하는 상태이다. 우리의 모든 지식을 드러내지 않고 침묵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신비를 통달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성령이 소유하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신비를 맛보는 방법은 우리의 일상에 새로운 습관을 세우는 것입니다.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는 인간의 소욕, 즉 말하고자 하는 욕망을 따르는 대신에, 침묵하시는 성령을 따르는 습관을 세우는 것이죠. 자신을 변명하기보다 침묵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억울함을 밝히고자 하는 욕망을 따르기 보다 성령을 따르는 훈련을 내 삶에 세워나가는 것이죠. 자랑하고 내세우기보다 묵묵히 섬기는 봉사의 습관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안에 가득한 인정 욕구를 따르는 대신에 성령을 따르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주장하고 내세우기보다 내 의견을 한 번 억누르는 습관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주도하고자 하는 내 욕망 대신에 답답해도 지켜보며 기다려주는 삶의 습관을 세우는 것입니다. 상대를 지적하는 대신에 그저 상대를 묵묵히 지켜 봐주는 습관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대의 잘못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 대신에 모든 것을 다 아시나 침묵하시는 성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침묵 가운데 억울함과 인내, 아무도 알아주지 않음을 감내하는 것이 신비로 나를 채우는 훈련인 것입니다. 그러한 습관이 우리 안에 하나 하나씩 세워져 갈 때 성령께서 느리지만 조금씩 우리의 삶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채워 가실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께서는 우리를 신비를 담아낼 그릇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지 못할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사진: https://webstoryboy.tistory.com/)
(사진: https://webstoryboy.tistory.com/)

철학적 묵상: 경청의 침묵

신비와 침묵은 아주 종교적인 주제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신비와 침묵은 서구 철학 전통에서도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직접적으로 신비라는 주제를 다루는 철학자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플로티누스가 있겠지요. 반면에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신비를 논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둔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칸트는 우리가 보는 것과 실재 사이의 간격을 파악한 철학자입니다. 인간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대로 사물을 이해하고 파악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이해한 사물과 사물의 실제 사이에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 중에 각각 저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가진 김삼열에 대한 이해와 이미지는 여러분이 생각하고 이해해온 방식대로 그려낸 김삼열일 뿐, 실제 저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죠. 이처럼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들과 타인은 실제로 나에게 제대로 이해된 적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말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찼음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신비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나의 인식과 이해의 한계를 인식하는 순간, 내 주변의 모든 것들 심지어 아주 일상적인 것들조차 나의 이해, 인간의 지혜와 언어를 넘어선 신비한 존재로 다가옵니다.  

여러분이 한 번쯤은 이름 정도는 들어보셨을 법한 포스트 모더니즘을 위시로 한 포스트 담론은 이러한 종류의 인식론을 발전시킵니다. 우리의 이해와 인식 그리고 실재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타자를 우리 방식대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자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해와 인식은 항상 불완전하기에 타자의 모습 그대로 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보여지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만 타자를 그려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려낸 타자의 모습은 항상 우리의 시각을 벗어난 타자의 모습을 잘라내고 생략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타자에게 가하는 인식론적 폭력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포스트 담론의 철학자들은 우리의 방식대로 타자를 이해하고 정의하던 습관을 멈추고, 타자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추자고 권면합니다. 대신에 조용히 타자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자고 제안합니다. 그제서야 우리가 볼 수 없는 타자의 진정한 모습이, 신비라는 베일에 쌓여 있던 타자의 본질이 우리에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우리의 불완전한 이해에 기대는 대신에, 타자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드러내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자는 것이죠. 이를 포스트 담론에서는 attentive listening, 즉, 경청의 인식론이라고 부릅니다. 그제서야 우리의 지혜로 파악할 수 없던 신비로운 타자의 모습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이죠. 

여기서 신비를 담아내는 침묵이라는 습관의 본질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침묵이란 그저 조용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고요와 적막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에 침묵은 경청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내가 타인의 목소리를 온전히 듣기 위해 내 목소리를 낮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자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나의 틀과 렌즈로 모든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습관을 버리고, 타자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 그들이 보여주는 대로의 모습을 믿어주는 것이죠. 받아주는 것이죠. 따라서 신비를 담아내는 침묵이란 내 생각을 고수한 채,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을 비워내고, 타인의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그들의 주장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죠. 

우리는 외면적으로는 침묵하나 실상 침묵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말을 아끼지만 여전히 내 생각은 변하지 않고 굳건합니다. 이러한 침묵 속에 자리 잡은 당신의 완고함은 타인의 목소리를 모두 튕겨낼 뿐입니다. 그 동안 내게 보이지 않았던 신비로운 타자의 새로운 모습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 있을 뿐입니다. 내면에 나의 목소리들이 요동치고 있는데, 굳이 꺼내지 않을 뿐인 상태를 침묵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죠. 말을 하지 않을 뿐 실상 내 목소리가 너무 커서 나의 내면까지 타자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듣지 않는 침묵에 익숙할 뿐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절대적 타자인 하나님의 신비로운 목소리가 들어갈 공간이 우리 안에 없는 것입니다. 절대적 타자이신 하나님의 신비가 들어갈 공간을 자아가 모두 잠식해버린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설교 시간에 청중은 절대적으로 침묵하는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비를 담아내기에 아주 적합한 자리와 상태에 놓여있지요. 설교자보다 청중이 은혜가 많은 이유는 말하는 자리와 침묵하는 자리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많은 청중들이 은혜에 이르지 못합니다. 침묵하고 있으나 여전히 나의 목소리가 가득하기 때문이죠. 설교와 충돌하는 나의 목소리, 내 자아가 펄펄 살아 숨쉬는 나의 주장들이 여전히 내면에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한 내 목소리가 잠잠하게 울려 퍼지는 신의 목소리를 방해합니다. 커다란 내 목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는 신비의 음성을 덮어 버려, 신비는 여러분의 심령 깊은 곳에 닿지 못합니다. 심령에 울리는 신의 목소리를 방해하는 잡음은 사실 여러분 주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목소리였던 것입니다 (설교가 은혜 안되는 것은 1차적으로 전적으로 목사의 잘못입니다. 다만 시끄러운 침묵이 습관이 되면 막상 신비가 다가올 때 담아내지 못합니다. 그렇게 은혜를 흘려 버리게 됩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목사가 설교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것들까지 여러분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결론

침묵은 신비를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묵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신비를 담아내는 침묵이란 것은 그저 외면적으로 조용한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비워내고 나의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경청이라는 것도 함께 배워보았습니다. 우리가 신비로운 침묵의 시간으로 들어가기 전에, 여태까지 끝내 비워내지 못하고 내뱉었던 말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들이 타인에게 그리고 하나님에게는 어떤 것이었을까 곰곰이 묵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무심코 내뱉었던 말들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을까 고민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를 지적하고 잘못을 드러냈던 말들, 나를 드러내고 자랑했던 말들, 내가 주장하고 내세웠던 말들이 어떤 것이었을까 생각해보자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내가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말들, 내 안에 가득한 내 목소리들을 한 번 조용하게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어떤 목소리들이 내 안에서 요동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욕망으로 가득 차있던 내 음성들이 하나님의 음성보다 컸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는 시간이기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형제와 자매를 통하여 내게 다가왔던 하나님의 음성을 튕겨낸 것은 아닌지, 설교 시간을 통하여 나를 어루만지시려는 하나님의 조용한 음성을 묻혀버리게 했던 것은 아닌지 묵상할 수 있기 원합니다. 

그렇게 내가 뱉었던 말들이, 내 속에 간직하고 있던 말들이 얼마나 아름답지 못한 것인지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침묵의 영성으로 돌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제서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의 말로 이를 수 없는 신비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신비로 가득 채워진 신앙 생활 속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신비로운 기쁨과 환희, 평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고 찬양 한 곡을 각자의 처소에서 부르면 좋겠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라는 찬양 입니다. 오늘 나누어 본 신비를 맛볼 수 있는 나의 영혼이 잠잠히 침묵하고, 하나님을 경청하는 은혜가 내게도 임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간청하며 찬양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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