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는 훈련(1): 타인에게서 자유를 누리는 훈련
-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는 훈련(2): 타인과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단단한 삶의 기초
- 고독의 훈련: 서로가 사랑하기 위한 적당한 거리를 배우는 훈련

김삼열 목사(고신대 신학과 B.A. 고려신학대학원 M.Div, 영국 아버딘 대학교M.Th, 벨기에 루뱅카톨릭 대학교Pre-Doctoral Program, 한울교회 부목사)
김삼열 목사(고신대 신학과 B.A. 고려신학대학원 M.Div, 영국 아버딘 대학교M.Th, 벨기에 루뱅카톨릭 대학교Pre-Doctoral Program, 한울교회 부목사)

 

내 안에 내가 없다!

타인은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꽃가루 같은 존재입니다. 꽃가루처럼 보이지 않지만 떼어낼 수도, 지워낼 수도 없는 존재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영향을 미치고 조종하기 때문입니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 받기 위해서는, 미움 받지 않기 위해서는, 무시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지배합니다. 뿐만 아니라 타인이 부과한 도덕과 규율들은 우리를 통제합니다. 사회와 타인으로부터 배제 당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그러한 규범에 따르며 살아갑니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로 자유롭게 살아간다고 착각하지만, 타인에 의해서 살아지는 수동적인 존재라는 겁니다. 심지어 욕망 조차 타인에 의해 통제 됩니다. 우리는 사회와 타인이 추한 것이라고 버린 것을 욕망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아름답다고 추앙하는 것을 욕망할 뿐이죠. 바꿔 말하면, 욕망조차 타인이 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형성될 뿐인거죠. 결국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겁니다.   

배운 이들이라고, 가진 이들이라고, 다르겠습니까? 그들의 세련된 매너와 행동, 교양 있는 언어 습관 모두 고급스러워 보이나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법칙과 문화에 따라 순응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권력을 가진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야 말로 철저하게 유권자들의 욕망에 얽매여 사는 이들이죠. 목사 역시 자유롭지 못합니다. 어쩌면 가장 타인에게 얽매인 존재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원하고 바라는 모습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 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평가하는 것이 즉 나의 사람 됨, 목사 됨을 결정합니다. 진리가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강단에서 외치지만, 타인이 정해놓은 경계선 안에서 살아가는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존재일 뿐이죠.

이처럼 우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지 간에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타인으로 꽉 찬 인생을 산다는 겁니다. 타인에게 얽매인 채 살아간다는 겁니다. 타인에 의해서 결정되고 살아지는 수동적인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내 의지와 소원은 사라진 채 그저 타인이 정해놓은 틀과 경계선 안에서 살아가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 결과 진정한 내 모습이 무엇인지 제대로 직면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나답게 사는 법을 잃어버리죠. 그저 남들이 살아가는 대로, 타인이 정해놓은 기준대로, 사회가 원하는 모습대로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뒤돌아 보니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내가 없는 삶만 가득하게 남아 후회만 하고 사는 겁니다.  

 

(영화 Detachment 포스터, 사진: www.slashfilm.com)
(영화 Detachment 포스터, 사진: www.slashfilm.com)

 

영적 detachment

이렇게 타인이라는 사슬에 묶여 사는 인간이 타인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수단이 있습니다. 바로 고독입니다. 타인과의 교류를 끊고, 세계와 타인의 영향력을 차단해버리는 겁니다. 스스로를 고립시킴으로써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시도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독의 방법 또한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끊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본 영화 중 아주 깊은 여운을 남긴 작품이 있어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Detachment라는 제목의 영화인데, 분리 또는 떼어냄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떼어낸다는 뜻이죠. 이 영화의 주인공이 그러한 삶을 살아갑니다. 자신의 삶과 마음에 그 누구도 들여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모든 타인으로부터 철저하게 자신을 분리하며 살아갑니다. 최소한의 필요한 접촉만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러한 사람조차 타인으로 가득한 존재, 타인이라는 사슬 얽매여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묘사합니다. 아버지와 딸 사이에 있었던 가정 내 성폭력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태어난 아이라는 사실, 그리고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자살이 그의 내면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인 그로부터 자신을 떼어내려고 해도,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어머니이자 누나인 그녀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으려고 몸부림쳐도 그들로 인해 남겨진 상처가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음을 직면하게 됩니다. 고독을 선택해서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우려고 발버둥 쳐도 결국 타인에 의해서 휘둘리는 가여운 인간일 뿐인 겁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마가복음 1:35은 진정한 의미에서 타인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고독이 무엇인지, 진정한 detachment가 무엇인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 봅시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예수께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찾는 타인에 둘러 싸여 계셨습니다. 하루 종일 그에게 몰려드는 타인에 의해서 쉴새 없이 분주하셨습니다. 타인으로 인하여 자신의 삶과 습관이 결정되어 버린 겁니다. 그러나 잠깐 시간을 내어 한적한 곳으로 나가셔서 자신을 에워싼 타인으로부터 벗어나 기도의 시간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고독의 장소와 시간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시고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들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으시는 겁니다. 몰려드는 타인들과 자신을 둘러싼 제자들로부터 자신을 분리 하신거죠. 

여기에서 성경 한 구절 더 찾아보죠. 히브리서 3:1을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이어서 골로새서 3:2도 함께 살펴봅시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예수가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의식 속에서 분리 해내는 훈련 입니다. 위의 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훈련입니다. 즉,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고 분리하는 훈련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세상과 타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 집중한다는 것은 세상과 타인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입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깊이 집중하는 기도와 묵상에서 나옵니다.  

 

고독의 시간: 자신을 발견하다!

이러한 고독의 시간은 하나님 앞에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시간과 장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타인의 평가와 기준이 침범할 수 없는 내적이고 비밀스러운 시간과 장소이기 때문이죠. 오직 하나님과 나만이 존재하는 고요하고 거룩한 고독의 시간과 장소입니다. 따라서 세상과 타인이 나에 대하여 말하는 부정적인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시간과 장소입니다. 오직 나를 향한 “너는 내 기뻐하는 아들이라”, “너는 내가 낳은 사랑하는 딸이라” 라는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만이 가득한 시간과 장소입니다. 비로소 나의 진정한 정체성이 드러나는 겁니다. 구원 받은 존귀한 자의 모습으로 드러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깊이 침잠 할 때에 세상과 타인이 내리는 부정적인 말과 평가들로부터 온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받는 존재임을, 존귀한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세상과 타인이 규정한 부정적인 모습이 나의 모습인 것처럼 살아 갑니다. 아직도 세상과 타인에 얽매여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상처로 얼룩진 존재로, 자존감 낮은 존재로, 좌절과 절망이 가득한 존재로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깊이 집중하는 시간의 부재로 말미암아 세상과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훈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사색하는 고독 가운데 세상과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는 습관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독한 영적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따스한 음성과 확신을 누려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것도 침투할 수 없는 그 신비로운 시간을 가져본 적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부대끼며 사는 시간만 가득하기 때문이죠. 그런 고독의 훈련을 위해 시간을 내기에는 바쁘다는 핑계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신비를 부정하는 어설픈 지성주의, 세상의 흐름과 사회의 기준에 맞춰가는 세련된 목회, 세상은 기가 막히게 잘 읽어내지만 정작 기도는 등한시 하는 똑똑한 사회 운동 등이 한국 교회를 가득 메워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말과 화려한 언변으로 지식을 자랑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서, 교회가 세상에 발 맞추어 가는데 정신이 팔려서, 사회 운동 정치 운동하러 바깥에 나가 있는 시간도 모자라서, 하나님과의 깊은 고독의 신비를 통해서 누리는 참 자유가 자리할 곳이 없어진 거죠. 그래서 한국교회와 목회자들, 성도들은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은혜를 실제로 누려본 적 없는 겁니다.

 

(사진: www.shadedcommunity.com)
(사진: www.shadedcommunity.com)

 

단단한 삶

그러나 고독과 분리의 시간을 가지는 자는 더 이상 타인에게, 세상에게 휘둘리지 않는 단단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것도 침투할 수 없는 그 시간과 장소에서 누리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음성 이외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그 영적 체험 가운데 얻어지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죠. 이러한 영적 훈련이 내 삶에 습관으로 깊이 뿌리 박히면 박힐수록 내가 존귀한 자라는 것, 사랑 받기에 합당한 자라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타인은 더 이상 나를 부정적인 말과 평가들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휘둘리거나 동화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로써 당당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치만 보며 살아가는 한심한 모습, 타인의 평판만 신경 쓰면서 타인의 말에 휘둘리는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단단한 삶의 모습을 성경에서 수 차례 발견합니다. 죽음도 뒤흔들 수 없는 구원 받은 자의 삶을 발견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깨달은 자는 타인의 인정과 수용을 얻지 않아도 당당하게 그에게 맡겨진 사명의 삶을 감당합니다. 모두 죽이려 들 때에도, 모두가 조롱하며 부정할 때조차 좌고우면 하지 않습니다. 아합과 헤롯 같은 악한 권력의 탄압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뿐이죠. 이들은 모두 세상과 분리된 영적 고독의 시간을 가졌던 이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광야의 고독한 시간을 거쳐간 구약의 선지자들과 세례 요한처럼, 아라비아에서 3년이라는 긴 고독의 시간을 거친 바울처럼,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 깊은 독대의 시간을 보낸 예수처럼 말이죠. 

우리는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 정국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강제적으로 타인과 분리되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타자의 영향력과 개입이 최소화 되는 이 시점은 하나님에게 깊이 집중하고 묵상하는 고독의 시간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시간들은 자신을 발견하고 단단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우리는 현재 최적의 환경을 맞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 권면 드립니다. 부디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영적인 고독의 시간을 마련하십시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을 마련 하십시오. 그러한 고독의 시간이 쌓일 수록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은혜, 흔들리지 않는 결단력, 그리하여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삶의 관성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진: 1freewallpapers.com)
(사진: 1freewallpapers.com)

 

: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거리

글을 쓰다보니 20대 초반에 만났던 고등학교 동창의 말이 기억이 나더군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저희 반 반장이었던 친구 였는데, 졸업 이후 전혀 왕래가 없었던 친구였죠. 그런데 제가 신학 공부를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며 꼭 만나고 싶다고 연락이 왔더군요. 그 친구는 아주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고 저는 목사 후보생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신앙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자신은 신부들과 일부러 거리를 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너도 사제의 길을 걷는 이기 때문에 거리를 둘 것이라고 하더군요. 마지막으로 사제가 아닌 친구로써 만나고 교제하고 싶어서 연락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사제들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싶어서 그렇답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실망하고 상처 받을 것을 알기 때문이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또한 본능적으로 압니다. 서로가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적당히 떨어져 있을 때, 서로를 아름답게 볼 수 있음을 말이죠.

다만 소유욕, 독점욕, 애정, 인정 욕구 등으로 인하여 그 거리를 지키지 못할 뿐입니다. 상대를 소유하고 독점하고 싶은 마음에, 상대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욕심 때문에 제 멋대로 바싹 다가가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가까이서 보이는 상대의 연약함 때문에 제 멋대로 실망해 버리는 것이죠. 혼자 잘해주고 괜히 상처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방식으로 성숙하게 사랑하지 못합니다. 뒤틀린 방식으로 타인을 욕망할 뿐인거죠. 그러한 연유로 타인을 나에게서 분리해내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인으로써 우리는 얽히고 설킨 타래와 같은 관계 속에서 타인을 분리해낼 수 없습니다. 나의 묵은 감정과 욕망을 배제하고 타인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언제나 어긋난 방식으로 타인을 욕망하고 소유하려 들 뿐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서로에게 실망하며 상처 받고, 미워하는 겁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해독제는 고독한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 위의 것에 집중하는 훈련입니다. 하나님에게 더 깊이 집중하면 할수록, 자연스럽게 나의 인간적인 감정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점점 나의 뒤틀린 욕망과 증오, 미움과 집착으로부터 분리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시간을 낭비하는 고독의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타인을 향한 나의 인간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동시에 그와 나 사이에 얽히고 설킨 실타래와 같은 이해 관계 바깥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제서야 나의 주관적인 판단과 감정이 배제된 타인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니다. 즉, 나에게서 거리를 두고 타인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내가 만들어 놓았던 타인의 괴물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나약한 타인의 모습을 발견 합니다. 긍휼이 여겨야 할 대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거죠.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타인을 향해 가진 비정상적인 감정들로부터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깊이 집중할 때에, 점점 하나님의 시선과 감정에 동화되기 마련입니다. 오랜 시간을 보낸 부부가 서로를 닮아가듯이 말이죠. 하나님의 시선으로 타인을 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대하는 방식으로 타인을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하나님이 보셨던 것처럼, 형제와 자매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그제서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기 원하는 자는,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원하는 자는 나의 시선이 하나님의 시선과 완전히 일치될 때까지, 나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완전히 일치될 때까지, 깊은 영적 고독의 시간을 쌓아 올려야 하는 겁니다. 사랑은 우리의 의지와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비밀스러운 시간을 보낸 자가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진정한 detachment는 attachment!

글을 맺으려 합니다. 본고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훈련을 통해서 타인으로부터 나를 분리할 수 있다고 나누어 보았습니다. 이러한 detachment를 통하여서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삶을 누리게 된다고, 그 결과로 구원 받은 존재로써 타인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삶을 살게 되는 은혜를 누린다고 배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분리함으로써 타인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 결과로 타인에 대한 우리의 비정상적인 감정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말이죠. 그리고 타인을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보내는 고독의 영적 시간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배웠습니다. 

우리는 예수에게서 이러한 모범을 발견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향하여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저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나이다. 용서하소서” 라고. 인간적인 분노와 감정에서 해방되시고 그들의 진정한 모습, 즉 죄를 용서 받아야 할 불쌍한 죄인의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그들을 향하여 사랑과 긍휼의 말을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복수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시선과 사랑으로 채워진 인간이 어떠한 고백을 하게 되는지 몸소 보여주고 계십니다. 인간적인 다양한 부면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낸 인간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지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타인과 분리하는 훈련은 타인을 멀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에서 누군가를 지워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으로의 도피는 더더욱 아닙니다. 대신에 하나님에게 밀착하는 훈련입니다. 그 결과로 타인을 건강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가 자신을 핍박하는 이들마저 긍휼히 여기며 사랑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진정한 내 모습을 발견하고, 나답게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에 더 밀착하게 되는 겁니다. 한 마디로 진정한 의미로 하나님과, 내 자신 그리고 타인에게 밀착하는 경건입니다. 하나님을 네 온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는 기적, 네 이웃이 내 몸과 같이 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이 그러한 기적의 시발점이 되길 원합니다. 여러분이 건강한 밀착과 애착을 배울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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