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복의 의미(1): 거룩의 기준
- 반복의 의미(2): 낯선 것을 소유하는 방식
- 반복의 의미(3): 오묘함을 발견하는 훈련

Photo by Joanjo Pavon on Unsplash
Photo by Joanjo Pavon on Unsplash

거룩의 기준: 반복

레위기에서 다양한 정결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결법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입니다. 그 중에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나누는 기준은 생소하기 그지 없습니다. 굽이 갈라진 것과 되새김질 두 가지가 거룩과 부정을 나누는 기준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정결한 짐승이며, 둘 중 하나라도 해당되지 않으면 부정한 짐승이라는 것이 잘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두 가지 모두를 한 번에 다루기에는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오늘은 이 두 가지 기준 중에 되새김질 하나를 택해서 함께 묵상하고 은혜를 나누어 보려 합니다. 되새김질이 대체 무엇이기에, 어떤 의미를 함의하고 있기에 거룩의 기준이 되는 것일까요? 

되새김질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먹은 것을 다시 토해내어 다시 먹는 행위입니다. 이미 먹은 것을 반복해서 먹음으로써 섭취한 음식물의 영양분을 더욱 많이 흡수하려는 생존 방식입니다. 이러한 되새김질은 구약성경에서 ‘묵상하다’와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Hagar라는 용어는 되새김질과 묵상을 연결 짓습니다. 시편에서 자주 발견되는 ‘주야로 묵상하다’라는 표현은 한 말씀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묵상하다’는 입술로 읊조리는 행위까지 포함합니다. 즉, 묵상이란 것은 생각으로 그리고 입술로 말씀을 반복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될 점은 이미 먹었던 것을 되새김질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묵상이란 것은 그들이 몰랐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들이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던 율법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여호수아 1:8에서 잘 드러납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기를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이미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들을 반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되새김질 하는 동물을 반추 동물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지점입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예를 우리는 신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등장하는 베뢰아 사람들입니다. 한글 번역에서 베뢰아 사람들이 말씀을 ‘상고하더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바울에게 들은 말씀을 계속해서 곱씹어 보고 되새김질 했다는 것이죠. 그리하여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들은 다른 이들과 구별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짐승을 거룩하게 하는 되새김질이란 인간이 말씀에 대해서 행하는 반복적 행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미 받은 말씀을 두고 계속해서 생각하고 외우고, 입술로 고백하는 행위, 즉 말씀을 영혼으로 지성으로, 그리고 언어로 반복하는 것, 그것이 되새김질이며, 그러한 되새김질이 부정한 것들로부터 구별되는 거룩함이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짐승에 대한 정결법을 통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습관이 무엇인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반복이라는 단조로운 과정이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부정함으로부터, 거룩하게 구별하는 것은 이미 받은 말씀을, 이미 받은 은혜를 반복해서 묵상하고 곱씹어 보는 것이다. 이미 깨닫고 이해했고, 따라서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다시 고민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반복의 영성을 담고 있는 것이 되새김질이며, 이러한 반복의 영성이 거룩으로 우리를 채우는 신비로운 경건의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반복의 의미(1): 낯선 것을 소유하는 방식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반복은 그다지 유쾌한 의미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따분하고 타성에 젖게 만드는 부정적인 차원이 강조됩니다. 반복되는 삶이란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이 무의미한 것의 연속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의 습관이라는 것이 어떻게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신비로움인지 함께 나누어 보려 합니다. 구약에서 거룩은 많은 경우에 구별의 담론과 함께 작동합니다. 거룩이란 세상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백성이란 세상과 구별된 백성이라는 것이죠. 거룩은 세상과 구별된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낯설고 어색한 것입니다. 급작스럽게 내 삶에 나타난 아주 낯선 타자와 같은 존재인 것이죠. 따라서 우리의 일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대신에 거룩은 내 삶의 깊이 뿌리 박힌 습관은 뒤흔들고, 내 삶의 익숙한 방식을 거부합니다. 이렇게 살면 안된다고, 이런 마음과 생각을 물리쳐야 한다고 말이죠. 그리고 다소 거북한 삶의 방식을 제안합니다. 나의 본성과 익숙한 습관을 거스르는 새롭고도 생소한 삶의 방식을 요구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은 이 세상의 지식과 진리를 거스르는 것들을 따르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식, 즉 낯설고도 생소한 지식을 받아들이라고 명령합니다. 말씀은 이성의 차원을 넘어선 신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한 사고 방식을 해체하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이죠. 이처럼 거룩과 신비는 우리에게 낯설고 어색할 뿐만 아니라, 난해한 것입니다.  

이러한 거룩과 신비는 우리에게 반복을 요구합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익숙치 않은 것들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반복의 과정이 요구되는 것처럼 말이죠. 어떤 책의 어려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그 부분을 읽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복싱을 예로 들어볼까요? 가장 기본적인 잽과 스트레이트는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아주 부자연스러운 동작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싱 스텝도 일반인에게는 아주 어색한 동작이지요. 그래서 따라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쓰지 않던 근육을 써야하기 때문에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반복적으로 이러한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조금씩 어색한 동작이 아주 자연스러워지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어렵기만 하던 움직임이 아주 편안해져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것으로 익혀가는 것이죠. 복싱 뿐만 아니라 모든 기술을 새롭게 익힌다는 것은 반복 숙달을 통해서 처음에 어색하고 어렵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지요. 이처럼 반복이란 낯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습관이며, 어려운 것을 단순하고 쉽게 만들어서 익숙한 것으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즉, 거룩과 신비는 경건의 반복적 습관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반복이라는 습관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신비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살아가는 훈련이라고 말이죠. 반복이라는 것은 멀리 있던 신비를 나의 일상으로 만드는 습관이라고 말이죠.

우리의 삶이 매일 새로운 것이 등장하여 흥분시키는 역동적인 것이 아닌 이유는 말씀의 신비와 거룩이라는 초월을 담아낼 그릇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역사인 것이죠. 언제나 새로운 것을 갈망하며, 낯선 것에 흥분하는 우리의 습성을 억누르시고, 신비를 담아낼 수 있도록 달래어 가시는 하나님의 길들이심 입니다. 우리의 삶이 단조롭고 따분한 것으로 가득 찬 것은 되새김질을 하는 짐승처럼, 반복이라는 습관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죠. 그렇게 반복을 통해서 거룩과 신비를 소유하게 하시고, 이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따스하고 세밀한 인도하심 입니다. 동시에 말씀과 기도를 지치지 않고 반복할 수 있는 체질로 만드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대서사시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반복하지 않으면 소유할 수 없는 낯선 가치들을 품어낼 수 있도록 다듬어 가시는 토기장이 하나님의 일하심, 이것이 우리의 무료하고 지루한 삶에 담긴 영적 의미인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새로운 것 하나 없는 재미없는 일상의 반복을 살아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에 순응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 신비를 부어주시는 역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Photo by Verne Ho on Unsplash
Photo by Verne Ho on Unsplash

 

반복의 의미(2): 오묘함을 발견하는 훈련

또한 반복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오묘함을 발견하는 훈련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반복은 동일한 것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게 하는 습관입니다. 음악의 예를 들어볼까요? 어떠한 거장의 음악을 계속해서 반복하다 보면 연주가의 눈에 갑자기 보이지 않던 거장의 정신 세계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단순한 박자와 음표로 보이던 것이 어느 순간 거장의 숨은 의도와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임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반복을 통해서 그저 가볍게 듣고 흘려버렸던 것들 속에서 거장의 심오한 음악적 세계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반복이라는 습관을 통하여 그저 지나쳐 버렸던 것 속에서 심오한 진리와 신비를 길어 올릴 수 있게 됩니다. 되새김질은 그저 한 번 먹고 배출 해버리면 섭취 할 수 없었던 양분들을 흡수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묵상은 가볍게 지나쳤던 진리를 반복이라는 과정 속에서 그 속에 담긴 숨겨진 보화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오묘함이란 말 그대로 심오하고 묘한 것이어서 한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한 번에 즉각적으로 파악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반복적으로 묵상하고 고찰하며, 그것을 계속해서 곱씹은 자들의 전유물인 것이죠. 반복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흡수된 오묘함은 우리를 가득 채웁니다. 그리고 오묘함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과 우리를 구별하게 만드는 것이죠. 

우리에게 세상과 구별되는 그 신비한 오묘함이 없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반복이라는 것은 우리를 너무 쉽게 지치게 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쉽게 그 지루함에 굴복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반복이 가득한 삶이 마치 무의미하고 변화가 없는 무기력한 삶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무료함으로 가득찬 반복적인 일상들이 무가치하다고 우리를 속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반복적인 삶, 즉 거룩과 신비에 다다르는 길을 걷어차버리도록 이 세상의 영성은 우리를 미혹하기 때문이죠. 더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만 세련되고 앞서 가는 사람인 것처럼, 이전의 것, 우리가 여태까지 소유해왔던 것을 반복하는 행위는 미련한 것인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더 의미 있어 보이는 것을 찾아서, 새로운 자극을 찾아서, 참신하고 기발해 보이는 것을 따라서 우리가 반복의 습관을 세워야 할 자리에서 떠나버립니다. 더 뜨거운 예배, 더 뜨거운 기도, 더 참신한 해석을 쫓아서 우리가 묵묵히 살아내야 할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말씀의 자리를 박차고 떠나버리는 것이죠. 진부한 진리를 오래 붙들고 있을 끈기가 없어서, 극적인 변화가 없는 기도의 자리를 지키기에는 너무 뜨거워서, 뜨거움이 없는 예배 자리에 만족하기에는 우리가 지나치게 열정적이어서 말입니다. 그렇게 잠깐의 만족과 자극을 위하여 신비에 이르는 길을 벗어납니다. 

그렇게 우리를 자극하는 순간 순간의 새로운 은혜와 자극들은 꺼져가는 우리를 순간순간 열정적으로 달려갈 수 있도록 할 뿐, 천국에 이를 때까지 머나먼 천국의 여정을 살아낼 수 있는 진득한 신비로운 힘을 우리에게 주지 못합니다. 도리어 그러한 자극과 새로운 것을 쫓는 습관들과 성향들은 우리에게 진득하고 우직한 신비로운 힘을 앗아가 버리고 말기도 합니다. 이처럼 새로운 것을 추구하다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게 되어 버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신비를 소유하기 위해서 반복이라는 거룩한 인내의 습관을 살아내지 못하기에, 새로운 것만 쫓다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것이죠. 짧은 순간의 강렬한 기억만 가지고 살아갈 뿐, 삶과 인격을 변화시키는 신비와 거룩의 은혜는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복의 영성에 지쳐버린 이들은 새로운 것만 추구하다가 수박 겉핡기로 거룩와 은혜를 알 뿐, 그 깊이를 맛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신비의 깊이와 오묘함은 한 번에 소유되지 않으며,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죠.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우직하게 되새김질 하는 이만 소유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수박 겉핡기식으로만 진리와 은혜를 맛보고서 모든 것을 안다는 착각에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묘함을 놓쳐버린 채, 교만한 신앙 생활을 하다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자극적인 것이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반복이라고 불리우는 단조롭고 무료한 시간을 사는 삶의 방식은 고행입니다. 지루함에 지쳐가는 자신을 어르고 달래며 계속하여 동일한 말씀의 자리,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채찍질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의미하고 무기력해 보이는 삶의 자리들을 비관하는 대신에, 그 자리를 떠나가고 싶은 욕망을 누르며 그 자리를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귀를 채워주는 아름다운 말을 쫓기 보다 진부해 보이는 말씀을 붙들고 반복적으로 의미를 반추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뿐만 아니라 저번 주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흥분되지 않는 예배 행위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나를 자극하는 새로운 것들을 부인하고, 그것들을 열망하는 내 욕망을 억눌러야만 가능한 것이 반복이기 때문에, 저는 반복을 고행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신비가들은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서 육체를 괴롭게 했습니다. 그렇게 육체의 욕망을 죽이고 거룩한 욕망을 상승시켰던 것이죠. 그러나 저는 새로운 방식의 고행을 제안합니다. 무료함을 인내하는 고행, 단조로운 습관으로 가득 찬 단순한 삶을 사는 고행을 말이죠. 우리 시대의 교회에 사라져 버린 거룩과 신비를 회복하기 위해서 말이죠. 여러분 한 명 한 명이 오묘함을 깨달아 알기 위해서 말입니다. 

 

정결법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되새김질을 하는 짐승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어 보입니까? 더 새롭고 미각을 자극하고 만족시키는 먹을 것을 찾아 떠나지 않고, 이전에 먹은 것을 토해내고 다시 먹는 짓을 반복하는 짐승이 얼마나 미련해 보입니까? 레위기의 짐승에 관한 정결법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이처럼 되새김질할 미련함이 너에게 있느냐고 말입니다. 너희의 선배들이 미련하게 했던 것처럼 말이죠. 오늘의 레위기의 정결법은 우리에게 다시 묻습니다. “정말 거룩함과 신비함, 복음의 오묘함을 맛보기 원하느냐?” “그렇다면, 너의 내면에 넘쳐흐르는 열정을 억누르고 진부한 일상과 신앙의 행위를 지속할 인내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반복으로 가득한 시간을 묵묵하게 살아낼 수 있느냐”고 말이죠. “그 지루함이 은혜가 없는 시간이라고 불평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변화하고 발전해야만, 개혁되어야만 된다는 강박 속에서 묵묵하게 그리고 은은하게 여태까지 해왔던 경건의 습관을 지켜가고 있는 이들의 가치, 그 신앙의 깊이를 다시 발견하게 해주는 질문들입니다. 많은 이들이 진보와 혁신의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전통의 가치를 모르는 이가 부르짖는 개혁이란 근본이 없는 것이라고 말이죠. 미련하게 이미 받은 것을 반복하는 이의 가치를 모르는 신앙의 개혁이란 멋있어 보이기 위한 구호일 뿐, 실제 우리가 돌아가야 할 지점을 모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글을 마무리 합니다. 현대인들이 개신교를 떠나서 카톨릭으로 몰리는 현상을 봅니다. 일반적으로 이 현상의 원인을 카톨릭이 보여준 사회적, 윤리적 책임의식 때문이라고, 행동하는 양심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그리고 카톨릭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개신교 목사와 성도들의 도덕 윤리적 수준과 시민의식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원인이겠지요.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분석을 사회적 차원에서만 해석한 단편적인 분석이라고 봅니다. 사람들은 종교와 종교인에게 단순히 도덕, 윤리, 시민의식만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 세상에서 체험할 수 없는 신비로운 무언가, 초월적인 성스러움을 기대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개신교와 카톨릭의 차이를 발견합니다. 개신교는 끊임없이 현대인의 욕구에 맞추어서 빠르게 변화해왔고,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모델과 컨텐츠를 개발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극과 변화의 모델이 한계점에 이른 것이죠. 반면에 카톨릭 교회는 오랜 기간 동안 반복되어 온 고정된 예식과 예배 순서, 전통 속에 잘 지켜져 온 예전 속에서 깊고도 심오한 신비로움을 간직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의 절기와 제사의 율례를 오랜 시간 동안 반복하며 쌓아온 영성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발견하듯이, 본능적으로 현대인들도 오랜 시간 반복하며 쌓아온 카톨릭 교회의 신앙의 전통과 습관 속에서 심오한 신비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개신교에서 느끼지 못하는 초월과 거룩을 카톨릭에서 느끼는 것이죠. 

레위기 정결법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여태까지 받아온 것들 중에 반복하며 쌓아 올려야 할 거룩한 습관과 경건의 모양은 무엇인지 말이죠. 시대에 뒤떨어졌다 해서 버려왔던 것들 중에서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말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들로부터,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다시 반복하며 쌓아 올려야 할지 질문을 던지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김삼열 목사(고신대 신학과 B.A. 고려신학대학원 M.Div, 영국 아버딘 대학교M.Th, 벨기에 루뱅카톨릭 대학교Pre-Doctoral Program, 한울교회 부목사)
김삼열 목사(고신대 신학과 B.A. 고려신학대학원 M.Div, 영국 아버딘 대학교M.Th, 벨기에 루뱅카톨릭 대학교Pre-Doctoral Program, 한울교회 부목사)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