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에서의 역사에서 장자권을 가볍게 여기고, 결혼에 약속을 담지 못하고, 아버지의 기업의 땅이며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떠나서 세일에 정착하게 된다. 거기서 번성하고 왕국을 이루지만 세상 나라와 다르지 않은 나라였다. 그러나 반면에 야곱은 그의 아버지가 머무는 가나안 땅에 있으면서 약속과 동행하는 삶을 계승한다. 에서의 역사와 구별하여 약속을 붙잡는 야곱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는가?

 

1. 17세의 요셉은 어떤 사람인가?

야곱의 역사(톨레돗, 족보)는 요셉을 소개함으로 시작한다. 톨레돗 양식은 "00의 역사는 이러하니라"이다. 여기서 00에 해당하는 이름이 야곱이다. 톨레돗 양식에서 소유격의 이름의 기원 자체는 앞의 단락(톨레돗)에서 이미 소개된다. 야곱이 어떻게 태어났으며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이삭의 톨레돗(25:19-35:29)을 보면 된다. 야곱의 역사 자체는 앞 단락에서 소개된 약속을 믿는 야곱이 가나안에 돌아와서 어떤 삶을 살고 역사를 이루었는가를 제시한다. 그래서 야곱의 역사는 야곱의 아들들에 대한 것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12 아들 중에서 요셉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야곱의 역사를 요셉 기사라고 부를 정도이다.

야곱의 역사 속에서 요셉이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만한 인물이란 사실을 단도직입적으로 제시한다. 바로 악과 싸우는 소년이다. 17세의 소년은 어린이가 아니다.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을 4~5살짜리 아이가 형들이 자기에게 괴롭힌 것을 고자질한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요셉이 아버지에게 가지고 간 악은 선악과에 나오는 악과 같다. 이런 악과 더불어 싸우고 고민했던 요셉으로 소개한다.

우리는 요셉이 어떻게 이렇게 악과 싸우는 소년으로 성장했는지를 알 수는 없다. 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셉이 태어난 과정은 이삭의 역사 단락에서 알 수 있다(30:22-24). 요셉의 이름에는 어머니 라합이 아들을 더 얻기를 원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라합은 말한다. 여호와께서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30:24). 야곱이 요셉을 낳고 6년을 더 밧단아람에서 일하고 떠난다. 요셉이 6~7살이다. 그리고 현재 창37:2에서 17살이다. 가나안에서 10년을 지냈다. 그 사이에 어머니가 동생 벤야민을 낳다가 죽는다(35:.16-20). 이런 삶의 과정을 지나면서 요셉이 성장을 하였다. 라합을 레아보다 더 사랑한 야곱이다.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히면서 사랑을 표현하였다. 실제로 성경은 아버지가 자녀들에 대해 차별대우를 함으로 교육적 문제를 야기한다고 표현한다(37:4). 더 사랑한다는 말을 창37:3,4절에서 반복하고 있다.

더 사랑하는 이유가 노년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이다(37:3). 아마도 라헬의 다른 아들이자 동생인 베냐민은 훨씬 어린 상태로 보인다. 최소 6년 터울이지만 실제는 10살 이상의 차이가 나고 심하면 라헬의 죽음이 한두 해 전에 있었다면 베냐민은 유아기에 속할 수도 있다. 노년에 얻은 아들이기에 어리다. 실제적인 막내와 같다.

 

2. 야곱과 작은 자의 관계

야곱이 막내인 요셉을 더 사랑한 이유는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29:30-31). 그러나 이것이 요셉을 더 사랑한 이유로 확정할 수는 없다. 창세기 기자는 요셉을 더 사랑한 이유는 노년에 낳은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확정한다. 노년에 낳은 아들이란 말은 가장 작은 아들이란 말이다. 물론 베냐민이 있지만, 너무 어린 상태이어서 비교가 되지 않는 것 같다. 형제들과 함께 양을 치는 아들들 가운데서 비교를 해야 한다(37:2). 17세의 소년 요셉은 형제들과 함께 양을 치고 있었고, 아버지와 형제들 사이에 중개 역할을 하고 있었다(37:12-13). 베냐민이 이런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노년에 낳은 아들은 작은 자이다. 막내와 같다. 야곱은 왜 막내에게 그리고 작은아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자신의 삶이 답변이다. 형 에서가 아니라 동생인 야곱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을 계승했다. 파란만장한 삶의 파장을 겪으면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을 이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다. 번성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에 아이가 없던 이삭과 리브가가 기도하는 중에 쌍둥이를 가지게 되었다. 둘이 뱃속에서 싸울 때 리브가는 여호와께 물었다. 이때 주신 신탁이 두 국민이 태중에 있어서 나누게 된다. 한쪽이 다른 쪽보다 강하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길 것이다(25:23). 강한 자, 큰 자가 어린 자와 약한 자를 섬긴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예정으로 말라기 선지자와 바울에게서 인용된다(1:2-3, 9:11-13).

이런 하나님의 정하심을 들었지만, 이삭은 에서를 사랑한다. 이유는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이삭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친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한다. 이삭과 달리 이유가 없다. 없다는 것은 리브가의 행동을 전체적으로 살필 때, 작은 자가 큰 자의 섬김을 받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두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할 때 이것을 속여 가로채도록 기획을 하였다. 리브가의 삶은 일관성을 가졌다. 야곱은 작은 자였지만 결국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았고, 비록 험난한 나그네의 세월을 살았지만 결국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받고 살고 있다. 작은 자이지만 형 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누리고 있다. 에서처럼 세상의 번성이 아니지만, 약속을 소망으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이삭의 역사(톨레돗)는 작은 자가 약속을 얻는다는 주제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작은 자였던 야곱의 삶이 이것을 담고 있다.

결정적인 장면은 형 에서와 상봉하는 장면이다. 형 에서가 무서워서 얍복 나루를 건너지 못하는 야곱이다. 자기를 죽이려고 결심한 형(27:41) 에서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사절을 보낸 결과 400명의 사람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32:6).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대책을 마련한다. 자기의 재산을 두 떼로 나눈다(32:7). 그리고 형 에서를 위해서 뇌물을 여러 차례 준비해서 보낸다(32:13-20). 뇌물로 형의 마음을 풀어서 자신이 받아들여지리라고 생각했다(32:20). 그러나 안심이 되지 않았다. 야곱은 가족을 건너게 하고 홀로 남았다. 그리고 어떤 사람을 만나 밤새 씨름을 하였다. 밤새 씨름하지만, 결판이 나지 않자 그 사람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결정을 했다. 그때 야곱은 그 사람에게 축복을 요청한다. 복을 요청하는 사람이 작은 사람이란 증거이다. 야곱이 밤새도록 이기던 싸움에서 막판에 한방에 가버린 것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살아왔던 형 에서를 다양한 방식으로 이기려고 했던 삶의 태도들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약속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오늘의 현재는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형 에서를 이김으로 자신의 오늘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작은 자로서 구하고 기도함으로 얻은 현실임을 깨닫게 된다(12:4). 큰 자, 이기는 자 되기를 포기한 순간 그는 작은 자로서 자신의 모친 리브가에게 주신 하나님의 신탁(예정, 25:23)의 수혜자가 된다.

야곱은 그 사람에게 이스라엘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새사람이 된다. 그는 하나님과 겨루는 사람(32:24), 즉 하나님께 구하는 사람이 되었다. 약속을 가지고 얻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생명이기에 형을 돌파하기에 충분하다. 이스라엘을 얻는 것처럼 스스로 구하는 자, 작은 자가 되면 된다. 그래서 야곱은 형 에서를 맞이하기 위해서 모든 가족들을 뒤로 하고 제일 앞에 절뚝거리는 다리를 가지고 나아간다. 도망을 가려고 했던 전날 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형 앞에 엎드려 일곱 번 절을 한다. 이것은 완전히 형의 동생이며, 낮은 자임을 고백함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낮추었을 때, 형 에서는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 맞추어 입 맞추고 서로 운다. 서로를 받아 주는 행위이다. 이렇게 형 에서를 돌파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

야곱은 작은 자로 사는 삶이 하나님의 약속을 얻는 삶을 실제로 담보한 것이다. 야곱이 상속받은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르다. 형 에서가 세상 나라와 다를 바가 없이 잘 나갈 때에 야곱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세상에서 강하고 크고 많은 것이 하나님 나라의 실제를 담아내지 않는다는 것을 평생을 통해 경험하고 알았기 때문이다. 작은 삶, 동생으로서 살아가는 삶, 작지만 진짜 중요한 하나님의 약속을 담는 삶이 바로 자기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하나님 약속의 실제이다.

야곱은 이제 막내와 같은 요셉을 형제들보다 더 사랑한다. 혈육과 세상의 질서는 장자를 더 관심을 가지지만 야곱은 이것을 거절한다. 막내를 더 사랑한다. 다른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라헬이 배경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추측이다. 창세기 기자는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라헬 때문이라면 더 사랑하는 이유를 라헬이 낳은 아들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년에 낳은 아들이란 사실 때문에, 즉 가장 작은 아들이기 때문에 더 사랑한다. 야곱이 만들어 가는 세상이다. 에서의 폭력적이며, 힘과 권력이 중심된 세상과 다른 세상을 만들어 간다. 작기 때문에 더 사랑하는 나라,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시는 선한 세상이고, 이런 세상의 꿈을 야곱은 간직하면서 구현하고 있다.

야곱의 역사는 요셉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요셉 자신이 가진 역할은 아직 소개하지는 않았다. 요셉은 악과 싸우는 사람이 더 본연의 모습이다. 그러나 야곱이 왜 요셉을 다른 형제들보다 더 사랑했는가를 설명했다. 작은 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삭의 역사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런 작은 자가 어떻게 하나님 약속의 실현, 즉 번성을 위해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야곱의 역사의 중심과제이다. 요셉은 악과 싸우면서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삶의 다양한 어려움을 극복한다. 약속은 현실을 만나서 항상 어렵고 고난이 있다. 이것을 이기는 요셉의 힘은 악을 선으로 바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악과 싸우는 요셉이란 사실을 다음번 글에서 소개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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