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요셉과 유다가 중심이 되어 그의 형제들이 애굽에 정착하면서 번성하는 것으로 전개되는 야곱의 역사를(37:2-50:26) 그늘지게 만드는 영향력은 야곱이다. 야곱에 대한 이해는 톨레돗 구조에 의하면 앞의 단락에 잘 나타난다. 작은 자를 선택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야곱이다. 그래서 야곱의 역사 시작에서 요셉을 소개하면서, 늙어서 얻은 막내인 요셉을 작은 자로 여기고 더 사랑하였다. 왜 요셉을 소개하면서 야곱의 단락이 시작하는지 더 살펴본다. 야곱의 역사 단락 주제는 분명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다(50:20). 요셉의 마지막 말이기도 하다. 요셉을 소개하는 시작도 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1. 형들의 악을 아버지에게 가지고 오는 소년

요셉은 17세의 소년이고, 형들과 양을 치고 있고, 그때 형들의 악을 아버지에게 고발한다. 여기서 형들의 악의 실제가 어떤 것인가를 살펴야 한다. 단순한 고자질의 성격으로 악(잘못)을 규정하지 않아야 한다. 17세는 유치원이나 초등학생이 아니다. 유대인의 성인식은 12살이다. 이것이 비록 후대의 설정이기는 하다. 그러나 17세의 소년은 독립적 인격을 가진 성인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형제들은 레아의 자녀들을 포함한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함께하는 소년으로 소개를 하기에 레아의 자녀들은 없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37:2절은 이렇게 번역될 수 있다.

야곱의 역사는 이러하다. 십칠 세인 요셉은 그 형들과 함께 양을 쳤고 그는 (또한) 그 아버지의 아내인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함께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악을 아버지에게 말하였다.(사역)

잠시 후 요셉이 애굽에 팔리게 되는 장면을 보자. 그때 르우벤이 여러 번 등장하고(37:21, 22, 29) 유다가(37:26) 등장한다. 르우벤은 요셉을 건지려 했고(37:21-24), 유다는 죽이지는 않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 버리는 역할을 한다(37:26-7). 르우벤과 유다는 언급된 빌하와 실바의 자녀들이 아니다. 언급되지 않은 레아의 자녀들이다. 이들 레아의 자녀들이 빌하와 실바의 자녀들과 함께 양을 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요셉이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는 상황으로써 양을 치면서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만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도 함께 있었다로 번역해야 상황에 맞다.

이렇게 형제들 전체가 포함된 상황임을 확인하고 나면 요셉이 아버지에게 가지고 온 형제들의 악을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장자였던 르우벤의 악이다. 그는 서모인 빌하와 동침하였고, 야곱이 이 사실을 듣게 되었다(35:22). 어떻게 듣게 되었을까? 이 악은 르우벤이 장자권을 박탈당하게 되는 근거였다(49:4).

둘째로는 다른 형들인 시므온과 레위의 악이다. 동생 디나가 가나안 사람에게 성폭력을 당하게 되자 이를 분해하면서 할례와 통혼을 수단으로 철저하게 보복 살인 약탈하였다(34:25-29). 이 사건에 대한 야곱의 평가는 분명하다. 시므온과 레위가 야곱에게 화를 끼쳐 야곱으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34:30). 야곱의 집이 멸망할 수 있는 위기를 만들었다는 평가이다. 번성이란 약속 성취의 최대의 걸림돌을 만든 것이다. 야곱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서원을 한 벧엘을 기억하고 그리로 올라가게 되었고, 모든 우상들과 장식들을 제거하여 세겜 상수리 나무에 묻고 떠나간다. 그때 하나님이 사면 고을들을 크게 두려워하게 함으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지 않도록 했다(35:5).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다면 야곱의 집은 할례라는 언약적 수단을 폭력적 보복의 수단으로 사용함으로 멸망할뻔한 악한 사건이다. 이것으로 인해서 시므온과 레위의 폭력은 르우벤을 대신하여 장자권의 자리를 계승할 권리를 잃었다(49:5).

다음 유다의 경우를 보자. 유다의 경우는 요셉이 악을 아버지에게 가지고 온 이후에 행실만이 알려져 있어서 그것을 참고로 그의 행실을 미루어 짐작해 볼수 있다. 요셉을 팔아버린 후에 유다는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 형제들로부터 떠나서 가나안 사람들과 사귀었다.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지냈고,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그래서 엘과 오난과 셀라를 낳았다. 그런데 엘과 오난은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했다(38:7). 오난도 씨를 형수 다말에게 주지 않음으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다(38:10). 그래서 그들의 악함이 죽음을 불러왔다. 시므온과 레위의 악이 살인을 포함하듯이 유다의 아들들의 악은 죽음을 불러온다. 유다는 이렇게 철저하게 가나안으로 동화되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씨를 고집하는 다말을 통해 약속의 씨와 집이 가진 소중을 깨닫고(38:26)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식량의 위기와 요셉과의 화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유다와 그의 아들들의 악이 가진 실체를 보여준다. 유다가 요셉을 팔기 전에는 판 후와 달랐는가? 유다의 변곡점은 오직 다말 사건이다. 그전에는 일관성에 의해서 다르지 않다고 본다.

레아의 아들들의 악만을 성경은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이 어떤 악을 저질렀는지는 말하지 않기에 모른다. 그리고 언급된 레아의 아들들의 악들이 모두 요셉의 고발에 의해서 알게 된 것이라는 증거도 없다. 단지 요셉이 가지고 온 악이란 것들이 이런 종류의 것이라는 확인뿐이다.

 

2. 요셉이 가지고 온 악의 의미들

야곱의 역사를 진행시키는 사건들에 등장하여 사건의 의미를 밝히는 단어 중에 하나가 악이다. 악이란 단어가 사람이 아니라 짐승에게 적용이 되면서 악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요셉을 상인들에게 팔아버린 후에 형들은 아버지에게 거짓 보고를 하게 된다. 악한 짐승이 요셉을 잡아 먹었다(37:20).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죽이기로 하면서(18) 대안으로 내 놓은 말이다. 악한 짐승은 사람을 죽이는 짐승을 말한다. 악은 죽음과 연결된다. 비록 야곱을 죽이지 않고 대상들에게 팔았지만 형들은 여전히 같은 전략으로 야곱에게 보고한다. 숫염소를 죽여서 그 채색옷을 피에 적신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가지고 간다. 자기들이 발견했다고. 아버지 야곱이 보고 이렇게 말한다.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33). 형제들은 숫염소의 피가 묻는 옷을 보였을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지만 야곱이 알아서 발언을 한다. 악한 짐승이 잡아 먹었다. 악한 짐승이 사람을 죽이는 짐승이란 표현은 형제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야곱도 동일하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악한 짐승은 사람을 죽일만큼 잔인한 짐승을 말한다.

요셉이 나중에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된다. 바로는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나일 강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풀을 뜯고 있다. 그 뒤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올라와서 먼저 올라온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를 먹어버린다(41:2-4). 아름답고 살진 소들을 잡아먹는 흉하고 파리한 소들이 있다. "흉한(רעות)이란 표현은 "악한"것과 같은 단어이다. 요셉을 잡아먹은 것으로 간주되는 악한 짐승(חיה רעה과 같은 단어이다. 단지 일곱마리 소이기에 복수형이 쓰였을 뿐이다. 사람을 잡아 먹는 짐승이 악한 짐승이고, 같은 소들을 잡아 먹는 소가 흉악한 소이다. 바로의 꿈에 나타난 흉한 소는 칠년의 흉년을 의미한다. 근동을 굶어죽게 만들수 있을 정도의 흉년이다. 악 혹은 악한 것이 가진 의미는 죽음과 파멸이다.

 

3. 요셉이 직면한 현실로서 악

요셉이 아버지에게 가지고 온 악이 야곱의 역사 단락에서 사용되는 용례를 살피면서 그 의미가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지를 보고 있다. 악은 요셉이 직면하는 현실과 관련해서 사용된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서 결국 애굽에 가게 되고, 시위대장 보디발이 사게 된다. 요셉은 그 집에서 형통하였다. 그래서 가정 총무의 역할을 맡아서 집의 모든 일을 처리하였다. 그런데 주인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한다. 눈짓하면서 동침하기를 청하지만 요셉은 이를 거절한다. 나에게 위탁한 것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아내라고 답변을 한다. 그리고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39:9). 큰 악은 바로 주인의 아내를 취하는 일이다. 불륜이다. 요셉은 주인의 아내와 눈이 맞아서 동침하는 것이 큰 악이라고 표현하면서 이 악은 하나님께도 연결되는 것으로 보고, 죄를 짓는 것으로 간주했다. 악은 악한 행위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서 의미있는 행위인 죄가 된다고 요셉은 보았다.

요셉이 왜 애굽에 팔려오게 되었는가? 출발을 보자. 요셉이 형들의 악을 아버지에게 가지고 온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야곱이 노년에 낳은 아들인 요셉은 작은 자였기에 아버지가 사랑을 하였다. 그런데 이런 사랑을 받음을 인해 미워하였다(37:4). 그리고 꿈을 꾼 것을 말함으로 인해서 더욱 미워하고(37:8) 시기하였다(11). 그 결과 요셉이 도단에 나타날 때에 형들은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그를 죽이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악한 짐승으로 가리자고 한다(19-20). 이런 일련의 형제의 악들이 있다. 나아가 형들은 악한 짐승을 핑계로 해서 요셉을 팔았다.

이런 행위들에 대해서 창세기 저자의 판단은 악이 분명하다. 그러면 요셉 자신은 어떻게 판단하고 있었을까? 나중에 요셉의 형들이 식량을 구입하기 위해 애굽에 내려온다. 처음에 간첩으로 몰아서 결국은 베냐민까지 오게 만들고, 베냐민의 부대에 은잔을 넣어 다시 요셉에게 돌아오게 만들었다. 이때 요셉이 형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44:4). 이것은 단지 은잔을 훔쳐간 행위만을 언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분명히 알고 있다. 일단 지나가자.

형들은 베냐민을 데리고 가기 위해서 애를 쓴다. 결국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하겠다는 말을 한다. 아버지와 베냐민의 생명이 묶여있는데(44:30),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44:20). 만약에 베냐민과 함께 가지 못하고 잃어버리면 아버지에게 악을 행하는 것이라고 마지막 진술을 한다(44:34). 이때 요셉은 무장해제가 되어 자기를 밝히고 형제들과 화해한다(45:1-4). 유다는 아버지에게서 사랑하는 아들을 빼앗은 것을 악으로 이해하고 있다. 가해자인 유다가 자기의 행위를 악으로 이해한다면 피해자인 요셉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비록 자기를 알리는 장면에서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근심하지 말라고 하지만(45:5) 그러나 이것이 악이 분명하다.

나중에 야곱이 죽게 된다. 야곱을 장사하고 난 후에 형제들은 권력을 가진 동생 요셉이 자기들의 악한 행위를 갚을 것을 두려워한다(50:15). 자기들이 미워한 것과 같이 자기들을 미워할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유언을 이용한다. 아버지 야곱이 이렇게 말했다고 간접화법으로 전달한다. 네 형들이 네가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50:17). 야곱도 형제들의 행위를 악으로 규정한다.

이제 요셉의 입장을 볼 차례이다. 요셉은 아버지의 유언까지 들먹이면서 자신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형들을 향해 울면서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당신들이 나에게 악을 행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서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50:19-20).

요셉은 분명 형제들 지신, 아버지 야곱 그리고 창세기 저자의 입장과 같이 언급한 형제들의 일련의 행위가 악한 것임을 인지하고 있다. 요셉은 형제들의 악을 현실에서 직면해서 애굽에 팔린 것이다. 악한 짐승이 이를 말해준다. 그리고 다시 애굽에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앞에서 큰 악의 현실에 직면했다. 그의 삶은 악과의 싸움으로 고단한 삶을 보내고 있다. 더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그는 형제들 앞에서 분명히 고백하듯이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약속을 믿는 신앙은 악을 이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번 글의 문제제기로 돌아간다. 요셉이 17세의 소년으로서 형들의 악을 아버지에게 가지고 왔다. 그 악의 실체를 야곱의 역사 단락 전체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악은 요셉을 죽이려했고, 요셉이 가진 약속을 믿는 신앙을 뿌리채 뽑으려고 하고 말살하려고 했지만 요셉은 이것을 극복했다. 야곱의 역사 시작은 이것을 열면서 시작한다. 악이 과연 약속의 백성들을 죽일 것인가? 순결한 주의 백성들이 참된 역사를 계속해서 이끌고 갈 수 있는가를 질문하고 있다.

 

이제 다음 글은 악과 싸우는 요셉의 근본 동기를 약속과 관련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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