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역사(6): 의로운 다말, 불의한 유다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요셉은 동생으로 작은 자였다. 야곱의 사랑과 하나님의 계시로 인해 형들의 미움을 받고 애굽으로 팔려 간다. 한편 요셉을 파는 일에 주축이었던 유다는 아버지의 집과 단절하고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가나안 사람으로 살아간다.

 

1. 유다가 가나안으로 간 이유는?

유다는 형제들이 가진 요셉에 대한 미움과 시기를 해소하는 것과 이를 위해 요셉을 은 20에 팔아버림으로 얻는 현실적 이익을 적절히 통합하였다. 미움의 해소와 이익의 추구는 적절한 현실적 타협으로 보인다. 요셉도 생명을 건졌기에 최악의 상태는 막았다. 유다의 중재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취할 바른 태도인가?

유다는 요셉을 제거하고 나서 형제들과 동행하지 않았다. 개역개정은 "그 후에"라고 번역하지만 "그 때에"로 번역할 수 있다. 그 때는 창세기의 문맥에서 요셉을 애굽에 팔고 나서이다. 현재 유다를 다루는 창38장은 요셉이 애굽에 팔았다는 37:39절과 애굽의 보디발이 샀다는 말로 출발하는 39:1절 사이에 있다. 의도적으로 요셉이 애굽에 팔리는 와중에 유다의 행적을 삽입하고 있다. 그래서 38:1절의 그 때도 요셉을 판 시점과 연결되는 때이다. 유다는 요셉만 판 것이 아니라 함께 요셉을 제거했던 형제들도 등을 진 것이다.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요셉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탄식을 더 볼 수가 없었을까? 창세기는 아버지로부터 물러갔다는 말보다는 형제들로부터 떠나서 가나안 사람에게로 나아갔다고 기록한다(38:1). 아둘람 사람에게로 내려갔다. 내려갔다는 말은 지형적인 이유에서 사용되었다. 야곱이 있는 헤브론은 산지이고 아둘람은 아랫쪽에 있다. 그래서 내려갔다는 말이 적합하다. 그러나 지리적인 의미만이 아니고 내려간 곳이 가나안 사람이라면 지리적 의미 이상을 함의한다. 내려감이 가지는 의미를 잘 밝히는 것이 요나의 경우이다.

요나는 느니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하라는 부름을 거절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려고 욥바항구로 내려간다(1:3a). 개역개정은 배에 올라갔다고 번역하지만 실제로는 내려가다는 동사 야랏(ירד)를 욥바로 내려가는 것과 같이 사용한다. 그리고 나서 풍랑이 일어나자 요나는 현실을 피해서 배 밑으로 다시 내려간다(1:5). 이 세 번의 내려감은 하나님의 부름을 피하는 행동을 대변한다. 물리적인 내려감의 뜻만을 가지지 않는다. 이런 요나는 결국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를 요나가 기도하는 가운데 산의 뿌리에까지 내려갔다고 고백한다(2:6, MT 2:7). 계속해서 떨어지는 요나의 삶이다. 그래서 요나는 그 구덩이에서부터 건지셨다고 말한다. 건지셨다는 말은 올렸다(עלה)이다. 가장 깊이 내려간 자리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였는데 그를 다시 올리신 것이다. 그래서 요나가 다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게 된다. 내려간 자리에서 올라감으로 원래의 부름에 응답하는 자가 되었다. 내려가는 행위는 지리적이고 물리적인 의미를 능가한다.

유다의 경우도 비슷한 해석이 가능하다. 동생 요셉을 애굽으로 팔아버린 때에, 형제들로부터 내려간 유다가 간 곳이 가나안 사람들이 사는 곳이고 그곳의 여자와 결혼을 한다. 가나안 사람이 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가나안 사람과 결혼은 아브라함이 이후 지속적으로 정상적인 상태로 인정되지 않았다.

먼저 아브라함의 경우이다. 그는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종을 밧단아람으로 보낸다. 보내면서 자부는 자신이 거하는 이 땅 가나안 사람의 딸 중에서 구하지 말라고 못을 박는다(24:3). 대신에 자신과 같이 약속을 따라 부름을 받고 땅과 가족과 집을 떠나는 여자를 구하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이삭의 아들 에서의 경우이다. 그가 가나안 사람에게서 아내들을 구하자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가 근심한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26:34). 헷족속이 가나안의 족속들 중에 하나이다(15:20). 나중에 리브가는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내면서 이 사건을 이렇게 묘사한다.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을리이까?(27:46). 또한 이삭도 야곱을 불러 당부한다.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 들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28:1).

반면에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떠나자 에서는 이스마엘의 딸 중에서 아내를 구한다(28:9). 이유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28:8).

가나안 사람에게 내려간 유다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으로 이어지는 약속과 단절하는 행동을 취한 것이다. 약속의 상속자는 가나안 사람의 딸이 아니라 약속을 따라 함께 떠나서 따라오는 자이어야 한다. 그런데 유다는 반대로 형제를 떠나서 가나안 사람에게로 간 것이다. 약속의 집에서 세상 나라로 떠나간 것이다.

 

2. 유다 집의 내린 저주

유다가 형제들을 떠나 내려가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지냈다. 그리고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여 아이를 낳았다. 첫째가 엘이고, 둘째는 오난이고 셋째는 셀라였다. 번성한다. 그러나 외적 번성에 불과하다. 약속을 따른 자녀들이 아니었다. 엘과 오난은 모두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여서 죽임을 당하였다. 오난의 경우 형수에게 씨를 주는 것을 거절했다는 구체적 잘못이 있다. 그러나 엘은 없다. 엘의 잘못을 추정할 수는 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다는 말은 사사시대를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된다(3:7, 12, 4:1 ). 사사시대의 잘못은 주로 우상숭배와 연결된다.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우상을 섬긴 일이다(3:7). 따라서 엘이 가나안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따라서 우상을 섬기는 행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동생 오난의 경우는 씨를 형수에게 주지 않은 것을 우상 섬기는 행위와 같이 본 셈이다. 씨를 주지 않은 것은 아버지의 유업을 형의 자손과 함께 나누지 않겠다는 의지로 보이고, 이는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질적인 풍요 때문에 형의 기업을 이어주지 않았다.

두 아들이 죽은 원인은 모두 형제들을 떠나서 내려가서 가나안의 삶에 동화된 결과이다. 그런데 유다의 분석은 달랐다. 첫째 아들의 자부인 다말 때문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셋째도 죽게 될 것을 두려워하면서(11)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낸다. 이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자신이 가나안으로 내려간 결과로 인해 약속을 받은 아버지의 집과 멀어졌으며, 더욱이 형제 요셉을 애굽에 팔아 넘긴 결과가 전부 연결되어 내려진 저주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모든 잘못의 명분을 다말에게 뒤집어 씌우는 격이다. 다말이 속죄양이 된 상황이다.

막내 셀라가 장성하기까지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다말이 친정에서 세월을 보내지만 유다는 다말을 부르지 않는다. 특히 셀라가 장성하였음에도 주지 않았다(38:14). 다말은 그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유다의 잘못이 드러나며 모든 저주가 설명되기 시작한다.

 

3. 다말의 권리 주장 유다의 잘못 인정

12절에 "얼마 후에"는 다말이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간 시점부터 계산된 기간이다. 이는 막내 셀라가 장성한 후라는 시점과 어울린다(38:14). 얼마 후라는 우리 말 어감은 비교적 짧은 시간을 상정하지만, 히브리어는 상당히 많은 날들이 지난 후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래서 미성년자였던 셀라가 성인이 된 후라고 본다. 유다가 다말을 부르지 않은 이유는 변함없이 셀라가 죽을 것을 걱정하는 것이고, 그 원인을 다말로 본 것이다. 그 반대편에서 셀라는 아끼는 유다의 마음도 있다. 막내 아들인 셀라를 아끼는 것인데, 이는 야곱이 요셉을 아낀 마음과 비교된다. 아버지의 작은 아들은 죽이려고도 했고, 애굽에 팔아 넘기면서 자기 아들은 살리려고 한다. 그래서 장성했지만 다말을 부르지 않았다.

셀라가 장성하는 동안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었다. 유다가 곡하는 기간이 지나 위로를 받은 후에 다시 자신의 생업에 종사한다(38:!2).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양털 깎는 자에게 갔다. 유다는 목자였다(38:18절 참고). 양털을 깎는 것은 목축에서 추수때이다. 장소는 딤나이다. 딤나로 가는 것을 올라갔다고 묘사한다. 헤브론에서 내려왔는데, 두 아들이 죽어 나가고 있지만 그러나 다시 헤브론으로 올라가지 않고 다른 장소인 딤나로 올라간다. 목축의 추수인 양털을 깎기 위해 올라간다. 이렇게 물질적인 삶을 추구하는 삶으로 인해, 약속과 구체적인 씨에 대한 감각이나 현실은 망각된다.

유다가 양털을 깎기 위해 딤나로 올라왔다는 소식을 다말이 듣게 되었다. 다말은 셀라가 성인이 되었지만 엘의 기업을 잊지 위해 부르지 않음으로 인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았다(14). 유다는 얼굴을 가린 연고로 다말인 줄 알지 못하고 창녀로 여기고 값을 치루고 그녀에게 들어가려고 한다. 다말이 값을 요구하자 유다는 염소 새끼를 주는데, 그 자리에서 주지 못하기에 담보물을 다말이 요청한다. 담보물로 유다의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를 요구한다. 이것들을 담보물로 주고 유다가 다말과 관계한다.

이로 인해 다말이 임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유다는 친구 아둘람 사람을 보내 염소새끼를 주고 담보물을 찾으려 하지만 다말이 보이지 않는다. 창녀가 원래 이곳에는 없다고 사람들이 답변을 한다. 15절의 창녀는 조나(זונה)이지만 21절에는 케데샤(קדשה)이다. 케데샤는 성창이다. 성창이 창녀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찾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유다는 담보물을 포기한다. 그런데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봐 염려하고 있음을 말한다(23). 염려는 우스게거리가 된다는 의미이다. 값을 치루지 않고 들어간 일이 우스게거리가 되는 모양새다.

그런데 유다가 창녀와 관계한 것의 의미를 살펴본다. 유다는 자신의 아내 가나안 수아의 딸이 죽음으로 인해 생기는 성적인 갈증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창녀를 택했다. 창녀와 성창이란 용어가 뒤섞인 상태이다. 성창과 연결된 행위를 한 것이라면 유다는 철저하게 가나안 사람이 되었음을 말한다. 조부 아브라함이 왜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왔는지가 망각된 상태이다. 인간의 욕망, 보이는 힘과 권력에 기반을 둔 행위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주신 번성이란 관점에서 성이 망각되었다.

이렇게 유다의 왜곡된 삶의 변곡점이 다가오고 있다. 다말이 엘과 결혼하여 유다의 집에 대한 씨에 집착하여 시부인 유다와 관계를 맺었다. 남은 씨인 셀라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집의 씨를 얻는 일은 유다만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다말의 권리 주장은 정당하였다. 그래서 석달 후에 다말이 행음하여 임신했다는 소식을 유다가 듣자 그녀를 끌어내어 불 사르라고 명령한다.

흥미로운 것은 행음했다는 말이 창녀라는 명사와 동일 어근을 가진다. 행음하다가 자나(זנה)이고 창녀는 조나(זונה)이다. 자신이 한 행동은 드러나지 않게 하고, 자부의 행동은 엄하게 벌한다. 불태우라. 유다가 창녀와 관계 맺은 것이 약속의 씨와 관계없이 자신의 성욕을 해소하는 철저히 가나안의 삶을 반여한 행동이지만, 다말의 행음은 유다의 집에 대한 씨에 대한 갈망과 정당한 권리 주장이다. 부정한 유다가 정당한 자부 다말을 심판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이때 다말이 끌려 나가면서 사람을 유다에게 보낸다. 유다가 맡긴 보증물들의 임자로 인해 임신하게 되었음을 알린다. 이 때 비로소 유다는 깨닫게 된다. 자신의 행위의 부끄러움이 드러나고, 다말의 정당함이 확인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씨가 지닌 약속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자신의 삶이 약속의 씨와 전혀 관계없이 가나안 사람들과 어울리고 살아왔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약속과 너무 멀리있는 삶을 알게 된다. 그런데 반대로 가나안 여인인 자부가 오히려 유다의 집 씨를 위한 열정과 권리 주장을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말은 저주가 임한 유다 집에 집착하고 있다. 이 저주가 그들이 섬기는 여호와로부터 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유다의 집의 내력도 들었을 것이다. 물론 추론이다. 이 추론과 더불어 분명한 것은 씨에 대한 소중함을 주장한 다말이다. 그래서 유다가 이렇게 고백을 한다. ()가 나보다 옳도다(ממני צדקה ). 다말의 행위가 행음이 아니라 씨의 보존을 위한 정당하고 의로운 행위이다. 결혼 계약에 성실한 행위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자신보다 라는 비교 행위를 통해서 자신이 행한 창녀와의 관계가 정당하지 못하고 의롭지 못한 행위라고 보았다. 의롭다는 것은 언약관계의 성실하다는 것이다. 의롭다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유다는 자신이 언약관계에 매여 있는 자임을 자각하고 있다. 아버지 야곱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에 성실하지 못한 삶을 살아왔던 의롭지 못한 인간임을 자각하였다.

그 자각은 바로 아들 셀라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란 표현이다. 이는 아들들의 죽음의 원인을 다말로 보았던 삶 전체를 반성하고 자각한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함부로 성을 사용하면서 살았던 자신의 삶에 대한 돌이킴이다. 다말은 아이를 쌍둥이를 낳게 된다. 베레스와 세라이다. 손이 먼저 나온 아이가 나중에 태어나게 된다. 순서가 바뀌게 된다. 큰 자와 작은 자의 교환이 일어난다. 족장들의 기사 속에 담긴 약속들은 작은 자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유다는 이후 말이 없지만 형제들에게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흉년이 들어 곡식을 사라 가는 일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약속의 씨를 자각하고 돌이켜 형제들에게 올라갔음을 말한다.

유다의 방황을 기록하는 창38장의 위치는 37장에서 보여준 르우벤을 대신하는 장자로서 행한 역할이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임을 고발하고 있다. 형제들을 떠나서 내려가는 삶을 통해 약속과 더욱 멀어진 그의 삶을 다말을 통해 각성시키고 깨닫게 하였다. 언약에 성실한 의로움을 일깨워준다. 작은 자인 셀라는 지키는 연민이 약속과 맞닿아 있기 위해서는 의로움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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