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역사(7): 큰 악으로부터 떠나는 요셉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유다를 비롯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애굽에 팔아버렸다. 명분은 요셉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는 것이다. 요셉의 꿈이 하나님의 계시로서 역할을 한다. 형제들 간의 미움이 번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성공할 것인가?

 

1. 요셉의 형통과 임마누엘

요셉은 애굽으로 내려갔다.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이 요셉을 사서 자기 집을 관리하는 자로 삼았다. 노예의 신분에서 가정 총무가 되었다. 이렇게 신뢰를 받게 된 원인은 그의 형통이었다. 창세기 저자는 저자의 관점에서 요셉의 형통을 먼저 진술하고(2), 다음으로 주인인 보디발의 관점에서 다시 형통을 진술한다(3). 형통은 요셉이 하는 일이 잘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형통의 근거가 더 중요하다. 저자와 보디발이 일치하게 진술한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2,3). 여호와라는 신명은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임과 동시에 언약의 하나님이다. 출애굽 상황에서 애굽과 전쟁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언약의 성취를 위해 전쟁하시는 용사로서 여호와로 이해된다. 요셉이 처한 이 상황에서 언약의 하나님인 여호와는 어떤 의미인가?

주인인 보디발이 요셉에게 모든 것을 위탁하였을 때 여호와의 복이 그 애굽 사람의 집에 있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치게 되었다. 번성하였던 것이다. 애굽 사람 보디발은 요셉을 얻음으로 번성을 함께 얻었다. 반대로 요셉을 팔아버린 유다는 자녀들이 죽어 나감으로 번성을 잃어버렸다.

요셉의 형통에는 임마누엘이 있었다. 임마누엘은 해결해야 할 시대적이며 현실적인 과제를 돌파하는 힘이다. 야곱이 요셉의 초대를 받아 애굽에 내려갈 때도 임마누엘이었다(46:4). 모세를 출애굽의 과제로 인도할 때 임마누엘이 있었다(3:12). 여호수아가 모세의 과제를 이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이다(31:8, 1:9). 다윗에게 왕조를 허락하여 영원한 나라를 세울 때에도 임마누엘이었다(삼하7:9). 아하스 왕 때에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국의 침략으로 인해 다윗의 왕조가 위기에 처할 때에도 이를 돌파하는 힘은 임마누엘이었다(7:14).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바벨론의 포로 상태에 있는 자기 백성에게 와서 포로의 원인이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일을 이룰 때에도(1:21) 임마누엘이다(1:23). 사도들이

복음을 받아 땅끝까지 증인이 되는 부름에도 임마누엘이 있다(28:20).

요셉의 형통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으로 가능하였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으로 자신의 삶의 과제를 해결하였다. 여호와의 복이 그를 통해 그의 주인의 집에 임하였다.

 

2. 요셉에게 닥친 시험: 큼의 유혹

애굽에서 요셉은 형통하였다. 주인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요셉의 손에 맡겼다.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그 만큼 주인은 요셉을 신뢰하였다. 이런 요셉에게 어려운 시험의 때가 찾아왔다. 주인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였다. 그 아내의 이름이 소개되지 않는다. 번성이나 형통이 가지는 일반적인 시험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눈짓하였고, 이어 동침하기를 요청했다. 요셉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주인이 자신에게 모든 소유를 맡긴 뜻을 확인하였다.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않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다. 그래서 이 집에서 나보다 큰 이가 없고, 아무것도 금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주인의 아내만은 금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주인이 모든 것을 요셉의 손에 맡겼지만 맡기지 않은 것이 하나가 있었다. 자신이 먹는 양식이다. 그런데 요셉은 주인 보디발이 먹는 양식과 같은 차원으로 금한 것이 있는데 바로 주인의 아내였다. 따라서 주인의 양식과 아내는 같은 차원에서 다루어진다. 그리고 이것이 형통한 요셉을 향한 시험의 내용이 되었다. 주인에게 속한 모든 것이 요셉의 손에 있었다. 그러나 주인이 먹는 양식 혹은 그의 아내는 아니다. 모든 것이 허락되는 세상은 없다. 그 허락되지 않은 것, 그 하나의 부족이나 결핍이 바로 시험의 대상이다.

이런 시험이 창세기에서 발견되는 첫 사건은 아담이 에덴의 모든 실과와 선악과에 대한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실패하였다. 이제 창세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요셉은 이 실패를 어떻게 수습하는가?

창세기에서 애굽은 여호와의 동산과 같은 곳이다. 아브라함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왔던 조카 롯이 기근으로 애굽에 갔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올라왔다. 애굽에서 얻은 많은 소유로 인해(12:16) 아브라함에게는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다(13:2). 조카 롯과 동거할 수 없을 정도였다(13:6). 조카 롯과 아브라함이 헤어지게 되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였는데, 근거를 이렇게 설명한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 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13: 10). 여기서 여호와의 동산과 애굽 땅이 물이 넉넉한 소돔과 고모라와 비교된다. 애굽 땅이 여호와의 동산과 유비가 된다. 물이 넉넉하여 먹을 것이 있는 곳이다. 롯에게 소돔은 시험의 장소가 되었다.

애굽은 풍요로움의 자리이다. 여호와의 동산 에덴과 같은 곳이다. 여기서 요셉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 주인의 먹거리는 아니다. 마치 에덴에서 모든 것을 먹을 수 있었지만 선악과를 먹을 수 없던 것과 비교된다. 39:6절과 9절의 상호 관계를 보면, 보디발의 음식은 보디발의 아내와 평행이 되었다. 음식이 바로 아내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금해진 음식 혹은 아내를 취하면 큰 악을 행하며 죄가 된다 (39:9). 선악과를 먹으면 악이 되는 것과 같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오게 된 것 이유가 바로 형제들의 악을 아버지 야곱에게 알린 것으로 출발한다(37:2). 그리고 사람을 잡아 먹는 악한 짐승들이 바로 형들이었고, 이 악한 짐승의 피와 대체되어서 요셉이 애굽으로 왔다. 야곱은 악과 거리를 두고 살고 있다. 그런데 다시 악이 요셉에게 등장하고 있다. 요셉이 건드려서는 안되는 주인의 아내이자 그의 먹거리였다.

주인의 아내와 먹거리는 요셉의 것이 아니다. 선악과가 아담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먹거리라고 보았던 것과 같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큰 자였다(39:9). 모든 것을 주관할 수 있는 자였다. 아담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스리는 자였다. 이렇게 큰 자라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 하지 말아야 할 선이 시험이다. 형통한 요셉이 이른 큰 자의 위치는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기 위함이다(12:2).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 것은 악이며 죄이다.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의 것인 동생의 생명을 취하였다. 그래서 야곱은 죽음의 자리인 스올을 생각하게 되었다. 형통한 큰 자에게 다가오는 시험의 실패는 큰 악으로 귀결된다.

이스라엘의 왕은 큰 자이다. 그에게 미치는 시험은 많음을 추구하는 것이다(17:16-17). 말을 많이 두지 말고, 여자를 많이 두지 말고 은금을 많이 두지 않는 것이다. 이런 부정적 명령이 시험의 성격을 말한다. 큰 자가 많음의 유혹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요셉은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은 단 한 가지의 음식 혹은 주인의 아내에 대한 유혹 앞에서 단호하게 거절함으로 악과 거리를 두었다. 보디발의 아내는 날마다 동침을 요청하였지만 거절하고, 함께 있지도 않았다(39:10). 마침 아무도 없는 날에 주인의 아내가 요셉이 일을 하기 위해 주인의 집에 들어갈을 때이다. 그녀가 그의 옷을 잡고 동침하기를 요청한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갔다. 주인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지 않았다. 유혹과 시험을 물리쳤다. 아담은 시험에서 졌지만 요셉은 시험을 이겼다.

 

3. 요셉의 계속되는 형통

주인의 아내가 요청하는 동침하자는 큰 악을 요셉이 거절하면서 옷을 뿌리치고 뛰어 나간 결과는 감옥행이었다. 보디발의 아내는 큰 소리로 요셉을 고소하였다(39:14). 큰 악을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서 큰 소리를 지르면서 상황을 뒤집어 오히려 요셉을 고소한다. 이것은 마치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의 꿈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자라고 말한 것과 다르지 않다.

먼저 보디발의 아내는 자기 집 사람들을 불러 자신을 희롱하면서 동침하려고 했다고 큰 소리로 고소한다(39:14). 옷을 버려 둔 것이 오히려 요셉의 죄의 증거가 된다. 반면 보디발의 아내에게는 면죄부가 된다. 자신의 책임을 요셉에게 돌렸다. 그리고 이어 주인에게 동일하게 고소를 한다. 희롱하려 했다는 고소이다(17). 주인은 이를 듣고 심히 분노한다(19). 그래서 그를 왕의 죄수를 가두는 옥에 가둔다. 무죄한 요셉이 악인이 되었다. 범죄한 여인은 고소자가 되어 의인으로 등장하는 순간이다. 형제들의 미움이 악한 자가 되어 악한 짐승을 수단으로 하나님의 선한 것을 가진 요셉의 꿈을 꺾으려 했듯이 이제 보디발의 아내의 큰 악이 선한 요셉을 감옥으로 죄인으로 내몰았다. 과연 형제들의 악이 성공할 것인가? 나아가 보디발의 아내의 큰 악이 성공할 것인가?

요셉이 애굽의 보디발의 집과 같이, 감옥에서도 형통함으로 형제들과 보디발의 아내의 큰 소리의 고소는 성공하지 못했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형통한다. 먼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다(21). 그리고 간수장에게 은혜를 입는다. 그 결과 간수장이 옥중 죄수들을 요셉에게 맡겨 제반 사무를 보게 한다. 가정총무와 같은 역할을 옥중에서 한다. 그리고 간수장은 맡긴 것을 살펴보지 않았다.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과 형통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임마누엘이 형통의 근거가 되었다.

비록 애굽에 팔려가고, 감옥으로 떨어졌지만 삶의 자리에서 악에게 지지 않음으로,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형통함을 누리는 삶을 얻었다. 위치와 신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악에게 지지 않는 언약백성의 성실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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