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이 연속된 글이 강해라고 한다면 이번 글의 차례는 창41장의 바로의 꿈을 다루어야 한다. 현재 다루고 있는 야곱의 역사는 요셉이 만나게 되는 세 가지 꿈이 사건 전개를 맡고 있다. 첫째는 요셉의 두 번의 꿈이고, 둘째는 관원장들이 꾼 두 가지의 꿈이고, 세번째는 바로의 두 번의 꿈이다. 요셉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바로의 꿈을 만나기에 앞서 요셉의 꿈과 야곱이 요셉을 형제들보다 더 사랑한 이유를 더 세밀하게 살펴 보려고 한다.

 

1. 요셉은 형들을 고자질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야곱이 형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이 야곱의 자녀들 사이에 생긴 미움과 시기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한 사건의 원인이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가까운 관계의 갈등을 너무 쉽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 대한 편애가 이런 비극을 불렀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편애를 하지 않아야 하는 부정적 본보기로 제시되기도 한다. 정말 야곱의 편애인가? 채색옷을 요셉에게만 입힌 것이 편애가 아니면 무엇이냐고 항변할 것이다. 그런데 한 걸음 더 생각해 보면 이런 편애의 관점이 본문을 잘 읽고 있는 것인지 묻게 된다.

그리고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가지고 왔다는 것을 어린 형제들이 서로 부모에게 고자질하는 정도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서로 고자질을 하는데도 내 버려둔 것이 결국은 서로 미워하게 되고, 시기하며 결국은 살인과 같은 일들로 커져버렸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도 본문을 정당하게 읽은 것인지 의문스럽다.

 

2. 형들의 악한 것에 대한 요셉의 부정적인 보고: 37:2에 대한 이해

37:2절부터 야곱의 족보(역사)가 나온다. 그리고 이어서 요셉을 소개한다. 요셉은 17세의 소년이다. 17세의 소년은 아이가 아니다. 후대의 입장이지만 유대인들은 12세에 성인식을 한다. 그러므로 17세의 소년은 이미 성숙한 아이이다. 그리고 형들과 함께 양을 돌보는 일을 했다. 형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런데 형들과 일하면서 형들의 악한 행위들에 대한 보고를 아버지에게 하였다. 우리 성경에는 '보고'라는 표현이 없다. 단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고 개역개정은 제시한다. 그러나 히브리 성경은 이것과는 조금 뉘앙스의 단어가 들어있다. 바로 "그들의 악한 행위에 대한 보고"(את-דבתם רעה)를 요셉이 아버지에게 가지고 왔다로 번역할 수 있다. 왜 고자질 정도가 아니라 "보고"라고 번역하는가? 악한 행위에 대한 것은 앞의 글에서(2-5) 밝혔다. 그래서 지금은 형들의 악한 행위를 보고에 관심을 가지려고 한다.

'보고'라고 번역할 수 있는 히브리 명사의 용례는 민13:32, 14:36, 37절이다. 이 본문들은 가데스 바네아 광야에서 가나안에 12정탐군들을 모세가 보낸 본문들 중에 나오는 예들이다. 정탐군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한 일에 대한 공식적인 보고를 한 내용이다. 먼저 민13:32을 보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악평하여"는 단어가 바로 호의적이지 않고 보고하였다는 뜻이다. 다시 번역하면 이렇다. "그들이(정탐군들이) 앞으로 나와서 그들이 그 땅을 정탐한 것에 대한 호의적이지 않는 보고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였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리고 민14:36, 37절도 모두 "악평"이란 단어를 쓴다. 명사인데 동사처럼 문맥에 맞게 번역하였다. 모두 호의적이지 않는 보고라는 의미이다. 민수기의 용례는 굉장히 공적인 보고를 의미한다.

그리고 잠25:10에 보면 다시 "악평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라고 기록한다. 이웃과 다툴 때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고 하면서, 남의 은밀한 일을 누설하면 누설하는 자에 대한 악평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이다. 이것은 공적인 보고이기 보다는 사적인 관계에서 어떤 사람을 평가하는 부정적인 표현이다.

 

3. 형들의 악한 행위에 대한 부정적인 보고가 가진 공적 성격

그렇다면 요셉이 아버지 야곱에게 가지고 온 부정적인 보고가 공적인가 아니면 사적인가를 더 살펴보아야 한다. 요셉에 아버지 야곱에게 가지고 온 악한 행위들의 수준을 다시 간략하게 진술한다면 이렇다. 요셉의 형제들의 악한 행위의 예이다. 르우벤의 서모 동침사건,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사람들에게 할례를 하도록 하고 학살한 사건이다. 그리고 "잘못"이란 말이 사용되는 경우가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짐승을 "악한" 짐승이라고 했다(37:20, 33).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와 동침하는 행위를 "큰 악"이라고 요셉은 규정했다(39:9). 따라서 잘못의 수준은 단순한 고자질의 수준이 아니다.

이런 악한 행위를 아버지에게 가지고 가서 발설하는 행위가 사적인가 공적인가를 살필수 있는 객관적인 사건이 있다. 바로 37장 후반부에 나오는 사건이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과 함께 있지만, 그러나 형제들이 야버지의 양떼를 치기 위해 세겜으로 갔다(37:12).

세겜으로 간 이유는 야곱이 세겜의 땅을 구입했기 때문일 것이다(33:19). 그들의 거주지는 헤브론인 이유도 헤브론에 땅을 아브라함이 사라의 매장지를 위해 구입했기 때문이다(23:16-18). 그래서 야곱의 자녀들은 세겜과 헤브론을 오가면서 아버지의 양떼를 친 것이다.

아버지의 양떼를 쳤다는 표현은(37:12) 의미가 있다. 아직 상속이 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관리하였다. 문맥은 양떼이다. 목축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재산과 관련해서 상속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형제들 사이의 갈등의 본질은 상속권에 대한 것이다. 미움, 시기, 팔아 버림의 배경은 상속과 연결된다. 아버지의 재산을 자녀들이 관리하고 있다. 세겜에서 양 떼를 먹이고 있다. 그런데 야곱은 요셉에게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다.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리라". 보낸다고 한다. 아버지의 재산을 치고 있는 다른 형제들에게 보낸다. 보내는 이유는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기 위해서다(14). 이것은 한 집안의 재산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측면을 말하고 있다. 재산인 양떼가 잘 운영되고 관리되고 있는지를 살핀다. 우리 번역에는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이라고 했다.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네 형들의 샬롬과 양 떼의 샬롬을 보고 나에게 돌아와서 말해라" 이다. 여기서 말해라는 단어가 형제들의 악한 행위들에 대한 호의적이지 않는 보고와 같은 명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아마도 37:2절에서 사용된 '보고'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뜻을 가진 보고에 사용되는 용어로 보인다. 샬롬을 보고하라는 말에는 사용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아 보인다.

37:2절도 요셉이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함께 양을 치는 장면을 말한다. 그래서 소개한 37장 후반부에 요셉을 애굽에 팔아버리게 된 사건과 동일한 장면이다. 요셉은 샬롬을 가지러 왔지만 형들은 요셉에게 살의와 팔아버림으로 갚았다. 이런 종류의 악한 행위들이 요셉이 아버지 야곱에게 가지고 간 악한 행위들에 대한 호의적이지 않은 보고에 속한다. 요셉은 17세의 정상적인 청년이었고, 아버지의 재산에 대해서 형들과 함께 운영하고 관리하는 일을 한 것이다. 그런 중에 형들에게 발생한 악한 행위들을 아버지에게 부정적으로 보고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야곱의 집, 구체적으로 아버지의 재산에 손실이 발생하지 않고, 집안에 샬롬을 만들기 위해 악한 행위를 보고하는 요셉을 야곱이 형제들보다 더 사랑한 근거가 될 수 있다.

다음에는 계속해서 야곱이 요셉을 더 사랑한 또 다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노년에 낳은 아들이기에 여러 아들들보다 더 사랑했다는 표현에 대해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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