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역사(5): 샬롬을 잃어버린 형제들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야곱이 작은 아들 요셉을 사랑하여 채색옷을 입히는 것으로 인해 요셉의 형들은 평안함(샬롬)을 잃어버렸다(4). 여기에 두 번의 요셉의 꿈은 형들로 하여금 그를 더욱 미워하고 시기하게 만들었다. 야곱이 요셉을 양을 치는 곳으로 보내면서 형들과 양 떼가 잘 지내는지를(샬롬) 알려주기를 원한다. 요셉에 대해 샬롬을 잃어버린 형들과 형들의 샬롬을 전해야 하는 요셉의 만남이 어떻게 될 것인가? 형들은 요셉을 상인들에게 팔아버린다.

 

1. 요셉을 죽이려는 형제들의 악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한다. 원인은 아버지의 사랑과 꿈이다. 그 결과 언사가 편안할 수 없었다. 동생 요셉에 대한 샬롬을 잃어버렸다. 요셉이 작은 자였기 때문에 야곱이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하나님도 요셉을 통해 야곱의 집에 꿈으로 계시하신다. 요셉의 높아짐으로 먹을 것이 해결되는 길을 보이셨다. 야곱의 집에 약속된 번성은 작은 자 요셉의 높아짐과 연결된다. 형들은 이것을 저항하면서 시기하였다. .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칠 때에 야곱은 요셉을 보내어서 형들과 양떼들의 안부를(샬롬) 확인하려 한다. 헤브론에서 세겜까지 가서 찾아 보았지만 찾을 수 없어 방랑한다. 그때 어떤 사람의 도움으로 형들이 도단으로 갔다는 정보를 얻는다. 세겜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도단까지 약25-30km 거리이다. 형들이 요셉이 오는 것을 멀찍이 있을 때 발견한다. 가까이 오기 전에 형들은 요셉에 대한 미움을 살인으로 발전시키는 계획을 구상한다. 동생을 부르는 호칭이 "꿈꾸는 자"이다. 얼마나 요셉의 꿈에 대한 미움이 컸는지 보게 된다. 그를 죽여서 구덩이에 던지자고 계획한다. 아버지 야곱에게는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다고 입을 맞추었다. 마지막으로 요셉을 죽이는 목적을 발설한다.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다. 결국 꿈에 대한 저항이다. 꿈은 족장 시대에 하나님의 계시 수단이다. 아브라함도(15:12), 야곱도(28:12) 꿈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경험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의 꿈을 책망하면서도 그 말을 간직했다(37:11). 그런데 형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꿈을 무너뜨리려고 한다.

형들의 모의 내용에는 아버지에 대한 염려가 들어 있다.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은 것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정리하도록 한다. 형제들이 죽였다는 것과 천지 차이이다. 실제로 야곱도 요셉의 피묻은 옷을 보면서 그렇게 이해를 한다(37:33). 악한 짐승은 형들의 죄를 대신하는 수단이다. 결국 형들의 행위가 악함을 증거한다.

야곱의 역사를 시작하면서(37:2) 17세의 소년인 요셉은 형들에 대한 악한 보고를 아버지에게 한 것을 보았다. 그 악한 것에 다른 하나를 더 축적하고 있다. 자기의 미움과 시기 때문에 형제를 죽이려 했던 사건은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했던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실제로 에서는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것으로 인해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 그를 죽이려 했다(27:41, 42). 축복과 꿈은 연결된다. 요셉도 형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위기에 몰리게 된다.

형제들의 악은 하나님의 계획을 무산시키는 일이기에 더욱 문제이다. 번성을 위해 하나님은 요셉을 높이 세움으로 양식의 어려움을 극복할 계시를 주었다. 이것은 번성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계획이다. 야곱을 밧단아람에서 번성하게 하신 것처럼 요셉을 통해 야곱의 집을 번성하게 하신다.

 

2. 르우벤의 개입; 장자권의 회복

형제들이 꿈꾸는 자가 오는 것을 보고 죽여 구덩이에 던지자는 논의를 할 때, 르우벤이 나선다. 요셉을 형제들의 손에서 구원하려고 시도한다. 구원은 죽이자는 상황에서 살리자는 것이다. 네 개의 부정 명령법을 사용해서 제안한다.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자.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네 가지의 명령을 감싸고 있는 것은 구원과 구출이다. 둘은 같은 단어이다(נצל). 동생을 구원하려는 것이 르우벤의 의도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구원하여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니기 위함이다. 르우벤의 제안대로 요셉을 죽이지는 않았다. 일단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다행히 그곳에는 물이 없었다. 그래서 생명을 유지할 수는 있었다. 요셉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일단 보류된 셈이다. 르우벤의 해결책은 요셉을 일정정도 혼내주고 형제들을 달래서 아버지에게 돌려 보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형제들의 미움과 시기는 르우벤의 생각을 뛰어넘었다.

르우벤은 나중에 유다의 제안대로 요셉을 팔아 넘길 때는 그 현장에 없었다. 그래서 요셉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옷을 찢었다. 그리고 동생들에게 탄식하면서 말한다. "아이가 없다. 나는 나는 어디로 갈까"(30). 나를 두번이나 강조한다. 요셉을 구출하여 아버지에게 돌리려는 르우벤의 계획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어디로 갈까라는 표현은 아버지에게 동생 요셉을 데리고 가서 잃어버린 장자의 신뢰를 회복하려는 기회를 표현한다.

르우벤은 서모 빌하와 동침하면서(35:22) 장자권을 상실하였다(49:4, 대상5:1). 르우벤은 나중에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야만 곡식을 구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베냐민을 위해 자신의 아들들의 생명을 건다(42:37). 그러나 실제로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하는 시점에서는 르우벤은 말이 없다. 유다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야곱을 설득한다(43:8-10). 르우벤은 자신의 장자의 자리를 주장하고 또한 회복하려고 다양하게 시도하지만 실제로 성취하지는 못한다. 이삭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사실은 작은 자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원이다. 이와는 거리가 먼 장자 즉 큰 자의 모습을 르우벤이 보여준다. 르우벤은 형제들의 미움도 반영하지 못했고, 또한 아버지로부터의 신뢰도 회복하지 못했다.

 

3. 유다의 현실적 타협안; 형제들의 미움 중심

요셉을 르우벤의 제안대로 죽이지 않고 일단 구덩이에 던져 놓은 상태에서 시간이 지났다. 형들이 식사를 하는 중에 길르앗에서 애굽으로 가는 대상들이 지나갔다. 오래전부터 놓인 대상들의 길 왕의 대로를 따라서 이스마엘 대상들 혹은 미디안 대상들이 무리 지어 지나가는 모습을 형제들이 발견한다. 미디안은 아브라함의 후처인 그두라의 소생이 조상인 무리들이다(25:2).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고, 미디안도 아브라함의 아들이다. 그래서 대상들이 이스마엘과 미디안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충분히 가능한 추정이다.

유다는 지나가는 대상들을 보고 제안을 한다. 르우벤과 같이 네 마디의 말을 한다. 우리 동생을 죽이면 무엇이 유익한가? 그의 피를 덮어 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자. 그에게 손을 대지 말자. 김도형은 르우벤과 유다의 발언에 대한 문학비평적 분석을 하면서 두 발언 사이의 유사함을 도표로 제시한다(구약논단, p. 72, 2011).

르우벤

모티브

유다

우리가 그의 생명을 해치지 말자

생명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죽이면 무엇이 유익할까?

피를 흘리지 말라 피

그의 피를 덮어 둔들(무엇이 유익할까?)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자

처분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자

그에게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유다는 르우벤의 제안에 따라 이루어진 구덩이라는 자리에서 한 걸음 나아가서 동생 요셉을 대상들에게 팔자고 한다. 유다도 죽이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다의 제안은 형제들의 미움을 해소하는 데에는 유익했다. 그리고 실제적인 유익도 있었다. 20을 받고 팔았기 때문이다. 유다는 미움의 해소와 이익의 추구라는 현실적인 제안을 했고, 형제들이 이를 받아들였다(27b). 유다는 우리의 동생이요 혈육이 미움과 이익의 재료 이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르우벤이 자기의 장자권의 회복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유다는 실리적이다. 모두를 설득하는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과 그의 가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간 곳이 없다. 세상의 한 복판과 무엇이 다른가?

유다가 제안한 시점은 식사를 하고 있는 때이다. 식사는 샬롬이 충만한 시간이다. 그런데 유다는 이 샬롬의 자리에 요셉을 구덩이에 버려 두거나 아니면 영구히 제거하는 계획을 세워 제안한다. 애굽으로 향하는 대상들에게 팔면 그 꿈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려는 계획이 유다의 실리 앞에 무너지는가? 후일에 요셉도 식사하는 자리에 형제들을 초대해서 형들을 압박하기도 하고,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때는 형제들 모두의 샬롬을 위한 식사 자리였다(43:31-33).

샬롬을 잃어버린 형제들은 샬롬을 구하는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단절시키고 나아가 대상들에게 팔아버렸다. 작은 자를 자기의 이익의 수단으로만 여긴다. 자신의 장자권의 명예회복과 미움과 이익의 대상으로 여긴다. 이런 세상은 평화가 없는 세상이다. 우리는 평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되고 있는가? 그리고 형제를 포용하는 평화인가? 아니면 배제하는 우리들만의 평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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