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였다. 큰 악을 피했다. 보디발의 아내와 보디발이 먹는 음식은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금해졌다. 이것을 건드리는 것을 악으로 규정하고, 거절한 결과 요셉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악을 거절한 요셉은 옥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거기서도 그는 형통하였다. 감옥이란 새로운 환경에서 요셉이 가진 형통은 어떤 일을 만들어 가는가?

 

1. 두 관원장의 범죄

감옥에 두 관원장이 들어온다. 이들은 바로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이다. 이들이 왜 감옥에 들어왔는가? 이들의 주인 애굽 왕 바로에게 범죄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포도주를 관리하는 책임자와 빵을 굽는 일을 관리하는 책임자는 상당한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포도주를 관리하는 책임자는 포도주병을 따는 자로 왕에게 주기 전에 포도주의 맛을 본다. 그리고 기록상에는 왕의 음료뿐 아니라 왕실의 음료와 식사를 감독하기도 했고, 많은 수의 식기와 음료를 준비하는 종들의 감독이기도 했다. 후기로 갈수록 권력이 강화되어 사제의 위치에서 역할을 하면서 정치적 역할도 했다. 왕의 자문관과 왕의 비서, 그리고 왕이 원정을 할 때 동행하였다. 특별한 목적을 수행함에 왕을 대신하기도 한다. 왕의 장례나 건물들과 광산의 감독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고 빵을 굽는 책임자는 다양한 빵을 구워 왕의 식탁과 왕궁에 공급하고, 또한 신들에게 바치는 의식에서나 사자들을 위한 의식에도 공급했다.

그리고 이들은 왕의 측근에 있으면서 하는 기능에 비해서 과도한 권력을 누리게 되는데, 정치적으로 특히 그러하다. 이집트는 아니지만 느혜미야는 페르시아 수산궁에서 왕에게 술을 따르는 역할을 했다. 그가 왕을 가까이 섬기면서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는 책임을 부여받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이집트에서도 술이나 빵을 만드는 책임자들이 왕의 측근이었다. 이들이 왕에게 범죄를 하였다.

범죄하다는 단어가 사람을 목적어로 취할 때 사용되는 경우들을 보면, 이 두 관원장들의 범죄의 내용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할 때(삼상19:4-5), 시므이가 압살롬이 다윗을 대신해서 왕이 되길 바라면서(삼하16:5-12) 다윗을 저주할 때, 다윗에 대해 범죄(하타)했다고(삼하19:21) 한다. 그리고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 왕 산헤립을 대항해서 반역할 때, 그 자신의 행동을 앗수르 왕에 대한 범죄라고 고백한다(왕하18:7, 14). (이상의 해석은 N.Shupak, A Fresh Look at the Dreams of the Officials and of Pharaoh in the Story of Joseph (Genesis 4041) in the Light of Egyptian Dreams, 2006130쪽과 각주 100번의 내용을 참조하였다). 따라서 애굽 왕에 대해 범죄했다는 것은 왕에 대한 반역이나 왕을 죽이려 하거나 혹은 왕을 모독한 경우라고 볼 수도 있다. 에스더서에 보면 왕의 내시 박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원한을 품고 아하스에로 왕을 암살하는 음모를 꾸미다가 모르드개에 의해서 발각되는 장면이 있다(2:21-23). 왕을 독살하려는 시도는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많이 있다.

특히 술과 빵이라는 일상의 먹거리로 왕에게 범죄하였을 것이다. 이런 범죄가 드러나게 되어 재판을 받아 유죄가 되어 감옥에 갇혔고, 아마도 사형을 기다리는 상황일 것이다. 삼일 후에 떡 굽는 관원장이 사형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그 사흘 동안 술 맡은 관원장은 사건의 혐의를 벗게 되고 복직이 되었다.

여기서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두 관원장이 먹거리를 가지고 살리는 것이 아니라 왕을 헤치려고 했다는 혐의로 감옥에 들어온 사실이다. 먹거리는 살리기 위한 것이다.

 

2. 꿈의 해석

요셉의 두 관원장의 꿈을 차례로 듣고 해석한다. 먼저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이다. 술 맡은 관원장 앞에 포도나무가 있다. 그리고 세 가지가 있어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다. 관원장의 손에 바로의 잔이 있어 관원장이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다. 포도나무에서 포도즙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지나간다. 특히 포도를 따서, 짜서, 잔을 드린다.

이 꿈을 듣고 요셉은 해석한다. 세 가지는 사흘이고, 사흘 안에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되어 바로에게 술잔을 드리게 된다는 해석이다.

이어 좋은 해석을 듣고 있던 떡 맡은 관원장이 자신의 꿈을 말한다.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는데, 맨 위의 광주리에는 바로을 위해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어버렸다. 요셉이 해석한다. 세 광주리는 사흘이다. 그리고 사흘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어 나무에 달 것이다. 새들이 와서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을 것이다.

두 해석은 천지 차이의 결과이다. 둘 다 바로가 그의 머리를 든다(13, 19). 그러나 술 맡은 관원장의 경우는 복직이지만, 떡 맡은 관원장의 경우는 그의 몸 위에 머리를 드는 것이어서, 목이 잘리는 경우이다.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결과가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

꿈을 해석하기 전에 요셉이 두 사람을 만난 아침에 두 사람에게 근심의 빛이 있었다. 그래서 이유를 물었더니 꿈을 꾸었지만 해석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요셉은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고 선언한다(8). 해석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은 해석이 참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해석이 하나님 계시의 성격을 가진다는 말이다.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은 무죄가 입증되어 복직이 결정되고, 떡을 굽는 관원장은 유죄로 사형이 집행된다라고 해석을 했기에 떡을 굽는 관원장이 무언가 잘못을 했으리라 판단된다. 앞서 본대로 먹거리를 가지고 왕을 죽이려 했거나 반역을 꾀하는 일에 참여했거나 혹은 왕을 모독했을 경우이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글을 보았다. 다이아나 립톤(D. Lipton)은 바로의 두 관원장의 꿈에서 음식을 해석하는 일이란 논문에서(Sweet Dreams? Interpreting Food in the Dreams of Pharaoh's Cupbearer and Baker, 2018) 이런 주장을 하였다. 술 맡은 관원장은 나무에서 싹이 나서 포도송이가 열리는 과정과 그것을 보고 관원장이 따서 짜서 컵에 드리는 일까지 상술 된 것을 꿈에서 제시한다. 그러나 떡 굽는 관원장은 머리 위에 광주리 셋이 있어 새들이 와서 바로를 위해 구운 것들을 먹어 버린다. 이는 떡 굽는 관원장은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떡을 새가 와서 먹어 버리도록 두었다. 관심이 없음을 말한다. 두 관원장의 목표는 섬김(services)인데, 술 맡은 관원장은 자기 손으로 직접 포도에서 짜서 컵에 드리는 일에 성공했지만, 떡 맡은 관원장은 머리에 두고 새의 먹이가 되게 했다고 주장하면서 전자는 투명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역할을 감당하지만, 후자는 자신이 밀을 얻는 과정을 감독하지도 않고, 밀을 통해 빵을 만드는 과정에도 참여했다는 보장도 없고 또한 광주리의 빵을 보호하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pp.3-4).

흥미로운 주장이다. 두 관원장의 꿈을 더욱 들여다보면 일리 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직분을 세밀하게 기록한 꿈과 결과적으로 새가 먹어버렸다는 책임 회피와는 구별이 된다. 우리는 이런 것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꿈의 해석이 하나님께 속했다고 주장하는 요셉의 발언이다. 이것으로 인해 술 맡은 관원장의 진정성이 확보되고, 떡 맡은 관원장은 유죄로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나의 질문은 그것이다. 왜 먹거리를 담당하는 두 사람의 꿈을 제시하는가? 한 사람은 먹을 것을 성실하게 관리하여 왕에 대한 책임을 성실하게 하였다. 그로 인해 왕의 통치를 받는 모든 사람들의 안전을 지켜낸 것이다. 반대로 떡 굽는 관원장은 먹거리를 가지고 왕을 헤치는 일에 사용하였다. 먹을 것으로 다른 사람의 유익이 아니라 해치는 결과는 악하다. 다른 사람의 먹을 것에 손을 댄 것으로 창세기 처음의 논지에 따르면 선악과에 손을 댄 것과 같다. 먹을 것으로 장난하지 말아야 한다.

 

3.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었더라

두 관원장은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사흘 후는 왕의 생일이었다. 왕의 생일을 위한 잔치 자리에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되어 잔을 바로에게 드리게 되었고, 떡 굽는 관원장은 나무에 달렸다.

요셉의 꿈 해석의 진실됨이 증명되었다. 그런데 요셉이 꿈을 해석하면서 술 맡은 관원장에게 부탁한 일은 잊혀졌다. 부탁한 일은 숱 맡은 관원장이 해석대로 잘 되면 요셉을 기억하여 이 감옥에서 건져달라는 것이다(14). 자신은 히브리인으로 옥에 갇힐 일을 하지 않았다고 설명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요셉의 부탁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기억되지 않고, 잊혀졌다.

요셉이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하는 근거는 인자함과 은혜였다. 인자함(헤세드)은 상호 배려이며 환대이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고, 인자를 더하였고 그 결과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았다(39:21). 요셉은 이런 인자와 은혜를 근거로 술맡은 관원장에게 꿈 해석의 은혜(헤세드) 베풀었다. 그리고 이제 자신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기를 요청한 것이다(40:14, 참고 수2:12). 상호 호혜의 은혜를 요청했다.

요셉이 기억을 요청했지만 술 맡은 관원장은 기억하지 않았다.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시작하거나 진행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술 맡은 관원장이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림으로 요셉은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닌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형통은 이것으로 끝이 나는가? 사람은 잊어버리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이 술 맡은 관원장이 기억하도록 일하신다.

바로가 꿈을 꾼 후에 해석하는 자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술 맡은 관원장은 자신의 죄를 기억하면서 요셉을 기억한다(41:9). 왕에게 범죄했다는 단어와 같은 단어를 술 맡은 관원장이 사용한다. 왕에게는 범죄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요셉에게는 범죄한 상황이다. 요셉은 바로 앞으로 불려 나오게 되고,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되며, 애굽의 총리로 나아간다.

바로의 꿈을 통해 기억이 작동을 한다. 바로의 먹을 것을 통해, 애굽 전체의 먹을 것을 해결하는 길을 찾게 된다. 그리고 가나안에 있는 요셉의 식구들의 생명을 보존하는 길도 찾게 된다. 기억은 하나님의 구원 수단이며 시작이다. 하나님이 기억할 때, 노아 홍수의 물이 감해지고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자들이 구원을 받았다(8:1). 그리고 하나님이 라헬을 기억하실 때, 그녀에게 아이가 주어졌다(30:20). 애굽에서 고난 당하며 부르짖는 백성들을 하나님이 그 언약을 기억하실 때 출애굽이 시작되었다(2:24). 사람은 잊어도 하나님은 기억하신다. 요셉의 형통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기억을 통해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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