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인 여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페미니즘 담론과 아젠다는 결국 다른 경험과 감수성을 지닌 여성들에게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결과를 생산한다.
페미니즘은 남근중심주의의 인식론적 폭력을 답습한다.

김삼열 목사(고신대 신학과 B.A. 고려신학대학원 M.Div, 영국 아버딘 대학교M.Th, 벨기에 루뱅카톨릭 대학교Pre-Doctoral Program, 한울교회 부목사)
김삼열 목사(고신대 신학과 B.A. 고려신학대학원 M.Div, 영국 아버딘 대학교M.Th, 벨기에 루뱅카톨릭 대학교Pre-Doctoral Program, 한울교회 부목사)

 

7. 여성이란 범주의 허구성

이성의 몰락과 성 유토피아’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본고에서 여성이란 범주의 허구성, 부적합성, 폭력성을 폭로하려 한다. 페미니즘 자체 존립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려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시각에서 사회와 역사, 문화를 읽어 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페미니즘 자체적으로 여성이라는 범주의 한계성에 봉착한다. 왜냐하면 여성이라는 범주가 보편적으로 모든 여성을 담아낼 수 없다는 현실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틀로 담아내기에는 각 개별적 여성의 존재가 너무 다채롭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보편적인 여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 지리적 위치, 정치적 상황, 처한 시대에 따라서 무수한 여성상, 무수한 개별적 경험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여성의 관점도 다양한 경험과 특징, 문화, 시대만큼 다양하다. 여성의 감수성도 개별적 여성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다. 여성은 한 가지로 묶어낼 수 없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개체들이 산재해서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성의 보편적 경험과 감수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은 성별 뿐 아니라 인종, 문화, 사회적 가치 등등 다양한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서 구성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여성에게 시대와 상황을 초월해서 보편적으로 적용하기에는 “여성”이란 범주는 구멍 투성이다. 각 개별적 여성의 감수성과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더 섬세하고 정밀한 하위 개념들이 필요하다.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언제나 보편적인 범주로서 제시된 여성은 담론을 형성할 수 있을 만큼 교육 받고, 형성한 담론을 주도할 수 있을 만큼 문화적, 정치적 힘을 가진 서구 엘리트 여성의 감수성과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 즉, 담론의 주체인 서구 엘리트 여성에게만 적용될 수 있을 뿐, 각지에서 각기 다양한 문화와 경험, 감수성을 지닌 여성을 담아내지 못한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서구의 소수의 교육 받은 특정인들만의 협소한 관점이며, 페미니즘이 그려낸 세계상과 사회는 특정 여성 주체가 바라본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즉, 페미니즘은 모든 여성을 위한 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자체적 담론을 확장하고, 그에 기반한 아젠다를 강화해 나갈수록, 사회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커질 수록, 서구 엘리트 여성들의 목소리는 모든 여성을 위한 목소리로 과잉 대표된다. 반면에 여성들의 목소리는 잠식 당한다. 서구 여성과 차별되는 3세계 여성, 노동자 여성 등의 정치적, 문화적 아젠다는 묻혀 버린다. 결국 서구 엘리트 여성들의 경험과 감수성 위에 형성된 페미니즘 담론과 아젠다는 결국 다른 경험과 감수성을 지닌 여성들에게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결과를 생산한다.

예시를 하나 살펴 보자. 서구 페미니스트들에게 혼전 순결을 강조하는 기독교 문화는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박탈한 가부장제 문화의 잔재로 취급 받는다. 따라서 여성이 성적 자기 결정권에 따라, 자유롭게 남성과 성관계를 맺는 것은 가부장제 문화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아젠다로 내세우는 것이 여성해방을 위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반면에 제 3세계 일부 지역의 여성들에게 혼전 순결은 사뭇 의미가 다르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아버지 또는 오빠에 의해서 다른 남자들에게 매매혼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경험과 문화 가운데서, 동정을 유지한 처녀는 도리어 성적 자기 결정권을 소유한 존재다. 아버지나 오빠의 결정에 의해서 동정을 잃지 않은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구 여성주의가 내세우는 아젠다는 3세계 여성의 경험과 감수성을 전혀 담아낼 수 없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는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독법과 해석에도 영향을 미친다. 서구 여성에게 동정녀 마리아는 가부장제 문화에 의해서 억압된 여성의 상징이라면, 3세계 여성에게 자유의 상징 그 자체이다. 결국 혼전 순결에 대한 서구 엘리트 여성들의 아젠다가 강화될수록, 3세계 지역 일부 여성들의 자유는 박탈당한다. 특정 주체에 의해서 과대 대표된 여성이라는 범주는 이처럼 이외의 여성들에 대한 폭력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당사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 진영의 요구로 퇴출된 그리드걸 (사진=이선옥 닷컴)
당사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 진영의 요구로 퇴출된 그리드걸 (사진=이선옥 닷컴)

 

이는 페미니즘이 그토록 비판한 남근 중심주의의 재연이다. 페미니즘은 남성이라는 주체가 모든 실재를 그들의 관점에 따라 읽어내고, 그들의 편의에 따라 범주화 시키면서 타자(여성)에 대한 인식론적 폭력을 가했다고 비판한다. 여성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남성의 관점과 편의에 따라 해석했다는 것이다. 특히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 알맞도록 해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의 진정한 모습은 왜곡되고, 여성의 목소리는 말살 당했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 역시 마찬가지로 서구 엘리트 여성의 관점에서 여성을 해석한다. 서구 엘리트 여성주의의 아젠다에 적합한 방식으로 해석된 여성의 이미지만 남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된 여성을 보편화 및 범주화 시킨다. 그 결과 다양한 여성들의 실재는 왜곡되고, 그들의 경험과 감수성은 침묵 한다. 나아가서 보편적인 범주에 담기지 않는 소수 여성의 목소리는 큰 목적을 위한 작은 희생으로 치부된다. 남근중심주의의 인식론적 폭력을 답습한다. 페미니즘은 결론적으로 같은 여성에게도 폭력적이다.

이러한 비판에 직면하면서 페미니즘 자체의 존립이 휘청거리게 된다. 여성이란 범주 자체가 다양한 여성의 실재와 부합하지 않는 허구적인 것이라면, 페미니즘 자체의 성립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는 범주를 버리고서 어찌 여성주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페미니즘이 가부장제의 독재를 재현하는 것이라면, 같은 여성에게도 폭력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면, 페미니즘은 더 이상 여성을 위한 아젠다를 형성할 수 없다. 페미니즘이라는 기치 아래에서 여성의 협력을 호소할 수 없다

이러한 난관에 직면해서, 페미니즘은 새로운 전략을 수립한다. “전략적 본질주의(strategic essentialism)”를 고안해낸다. 실제적으로는 다양한 여성을 보편적인 하나의 범주로 묶어낼 수는 없지만, 상황에 따라서 여성이라는 보편적인 범주를 사용하거나, 통일적인 아젠다를 주장해야 할 “전략적” 상황이 있음에 주목한다. 상황에 따라서 여성 보편에게 필수적인 아젠다를 제시하기 위해서, 여성이라는 보편적 범주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천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에서 여성들이 통일된 아젠다를 제시하고 그 아래에서 협력하기 위해 고안된 전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본질주의 역시 전략적으로 고안된 행동 수칙일 뿐, 범주 자체가 실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은 인정한다.  여성이라는 보편적 범주가 실체성이 없다는 것까지는 부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략적 본질주의 자체가 여성이라는 보편적 범주가 영구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맥락에 따라서 일시적인 것으로 본다. 결국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가 가진 한계성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이라는 범주의 한계는 해석학적 문제까지 수반한다. 복잡하고 미묘한 사회적 이슈와 구조에 대해서 여성이라는 렌즈를 갖다 대는 순간, 모든 이슈와 구조는 일차원적으로 환원된다. 여성의 관점에서 비쳐진 세계만 드러낼 뿐, 여성이라는 관점이 읽어낼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은 삭제 된다. 복잡한 실재를 여성의 문제로 단순화 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여성 임금 문제와 대기업 여성 임원 비율 문제는 여성의 관점에서만 보면, 즉 성별의 차원에서만 문제에 접근하면 사태의 모든 원인은 여성 차별로 환원된다. 그러나 사태의 실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여성 차별의 관점에서 환원시킬 수 없는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진 문제다. 여성이라는 범주는 복잡하고 미묘하게 얽히고 설킨 실재를 제대로 읽어내기에 매우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빨간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빨간 색으로 보이지만, 세상은 실제로 빨간색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색깔로 이루어진 것처럼.

 

이성의 몰락과 성 유토피아’ 시리즈를 마치면서

이러한 여성이라는 범주의 허구성, 부적절성, 폭력성은 페미니즘 근간 자체를 뒤흔드는 문제다. 페미니즘은 이러한 문제에 직면해서, 전략적 본질주의로 교묘하게 빠져나가거나, 다양한 여성의 모습만큼이나 많은 숫자의 페미니즘이 필요하다며 문제를 회피한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과 그 아젠다는 굳건하다. 페미니즘의 도덕적 전략 덕택이다. 앞서 3편에서 다루었던 것처럼, 페미니즘은 이 세계를 선과 악의 이분법, 피해자와 가해자의 대립 구도로 해석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선과 피해자의 위치를 선점한다. 그리고 페미니즘의 아젠다에 동의하지 않으면, 악이고 가해자의 편이라고 단언한다.  나아가서 다양성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면, 그 주체가 여성일지라도 결국 페미니즘을 분열 시키는 가부장제 기득권의 전략이라고 몰아 세운다.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여성들을 “흉자(남성의 성기를 흉내내는 여인에 대한 비속어)”로 몰아붙이는 현상은 이러한 철학에서 기인한다.

출판일 : 2020년 12월 7일· 출판사 : 글통· 페이지수 : 240p· 저자 : 오세라비 김소연 나연준· 크기 : 152*220· 정가 : 15,000원· ISBN : 979-11-85032-53-5
출판일 : 2020년 12월 7일· 출판사 : 글통· 페이지수 : 240p· 저자 : 오세라비 김소연 나연준· 크기 : 152*220· 정가 : 15,000원· ISBN : 979-11-85032-53-5

 

이러한 페미니즘의 이분법적 사고는 언제나 타자를 배제한다. 이분법의 논리에 따르면,반대편에 있는 이는 언제나 가해자 또는 가해자에 동조하는 세력 그리고 악한 세력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폭력성은 선을 이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 가해자에 맞서는 정의로운 결단으로 포장한다. 이분법에 따르면, 언제나 한 쪽은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한 쪽은 절대적으로 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복수와 증오가 사회를 가득 채운다. 반대편에 있는 자들은 나와 의견이 다를 뿐, 존중하고 이해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공격하고 무너트려야 할 악한 기득권 세력일 뿐이다. 페미니즘은 항상 증오와 투쟁의 대상이 존재해야만 동력을 얻는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이 창궐하는 사회는 갈등과 폭력에 신음한다.

이와 같은 도덕적 전략으로서 페미니즘은 교묘하게 여성인권운동으로 포장하고 정의로운 것으로 둔갑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의 각 분야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기 전까지는 그 해악이 표면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도리어 여성 인권에 대한 지적이고 세련된 담론, 윤리적인 담론으로 숭상된다. 그러한 연유로 많은 이들이 지적 허영에 이끌려 페미니즘을 해야만 뭔가 의식 있고 깨어 있는 시민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그래야만 여성에게 공감하는 멋진 신남성인 것만 같다. 그러한 연유로 문제의 심각성이 인식될 시점에는 페미니즘이 일으킨 갈등과 폭력, 증오와 복수가 이미 너무 깊이 뿌리 박혀, 치유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과 대수술이 필요한 상태에 이른다. 따라서 곳곳에서 사회가 더 이상 악화일로로 치닫지 않을 수 있도록, 페미니즘의 해악을 드러내는 이론적, 신학적 작업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이러한 차원에서는 필자는 이성의 몰락과 성 유토피아 시리즈를 연재했으며, 앞으로는 여성 신학의 결과물들을 소개하고 비평하고자 한다. 미력한 나의 작은 몸부림이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기를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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