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와 페미니즘은 절대 구별될 수 없다.

건강한 페미니즘과 불건전한 페미니즘을 구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페미니즘은 언제나 자유로운 성의 세계, 즉 성 유토피아를 꿈꾼다

김삼열 목사(고신대 신학과 B.A. 고려신학대학원 M.Div, 영국 아버딘 대학교M.Th, 벨기에 루뱅카톨릭 대학교Pre-Doctoral Program,한울교회 부목사)
김삼열 목사(고신대 신학과 B.A. 고려신학대학원 M.Div, 영국 아버딘 대학교M.Th, 벨기에 루뱅카톨릭 대학교Pre-Doctoral Program,한울교회 부목사)

 

 

2. 반(反) 실재주의

1편에서 살펴본 것처럼, 페미니즘은 이성이 파악한 실재에 대한 강력한 회의를 품는다. 실재를 묘사하는 범주와 개념들은 이성이 구성한 것(construction)일 뿐, 실재 그 자체를 묘사하지 않는다고 본다. 특히 이성의 자리에 위치한 특정 주체, 즉 남성의 시선과 관점에서 파악되기 쉽도록 실재는 왜곡 및 변형 되었다고 주장한다. 실재를 묘사하는 보편적이고 지배적인 범주와 개념들은 남성의 시선과 관점에 적합하도록 고안해낸 것이다. 그러나 실재는 특정 주체가 구성한 범주와 개념에 의해서 파악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다. 따라서 남근주의중심의 이성이 구성한 개념과 체계, 범주는 실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그러므로 남성의 인식 중심으로 형성된 보편적인 범주와 개념에 의해서 묘사된 실재의 그림들은 해체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는 결국 현재의 모든 담론과 인식론을 해체하고 전복해야 한다는 주장에 이른다. 왜냐하면 모든 담론과 인식론들은 남근중심주의의 개념과 범주 위에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남성의 자기 중심의 그릇된 인식론 위에 기초한 것이다. 따라서 남성이 지배하는 현재 세계에서 지배적이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 지는 어떤 체계도 존속할 수 없다. 기존의 모든 것을 해체하고 새롭게 실재를 묘사할 개념과 범주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 페미니즘의 주장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페미니즘은 니체의 철학에 크게 빚을 지고 있다.

연속선상에서 기존의 gender system 역시 해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남성과 여성의 실재에 적합한 담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성의 관점에서 남성과 여성으로 분류되었고, 역할이 부여된 것일 뿐이다. 환언하면, 성 구별과 역할에 대한 사회적 담론 역시 남성 중심의 이성과 문화에 의해서 구성된 것일 뿐이다.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는 것도 남성이라는 특정 주체의 임의적인 분류일 뿐이며, 각 성에게 부여한 역할 역시 남성 중심의 가부장 중심 사회에 부역하도록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기존의 gender system은 실재를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실재에 부적합한 것을 강요하고 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한 연유로 전통적인 성 구별 담론을 해체하려 든다. 여태까지의 성적 정체성의 경계선을 거부한다. 성 구별과 차이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젠더 유동성(Gender-fluidity)이다. 기존의 성 담론이 남성과 여성 사이에 무 자르듯이 경계선을 딱 그어 버리고, 절대적인 차이를 부여 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경계선은 아주 유연하고 절대적이지 않다. 두 성 사이에 놓인 경계선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언제든지 넘나들 수 있다. 이를 다공성(porosity)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방식으로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절대적 차이의 의미를 퇴색시켜 버린다. 페미니즘의 젠더 이론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담론에 그치지 않는다. 반 생물학적 태도로 나아가고 만다. 

해외에서 판매되는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에 관련된 소설들(사진=forr eading addicts.co.uk)
해외에서 판매되는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에 관련된 소설들(사진=forr eading addicts.co.uk)

3. 성 유토피아
 

이렇게 남근중심주의와 가부장제의 성 구별 담론에서 해방된 주체는 새로운 성의 세계로 돌입한다. 남녀 간의 구별이 퇴색되면서, 여성이 남성이 되기도 하고 반대도 가능하다. 성 정체성과 역할이 유동적으로 변하면서, 더 이상 기존의 남자와 여자 간의 사랑의 독특성은 말살된다. 남성과 남성 간의 사랑에서, 한 쪽이 성 정체성의 경계선을 넘어가서 여자가 되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여성과 여성 간의 사랑에서 한 쪽이 성 정체성의 경계선을 넘어가서 남자가 되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더 이상 생물학은 여성과 남성을 구별할 수 없는 경계선이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생물학적 성에 구애 받지 않는 자유로운 사랑의 담론이 형성된다. 여성이 여성을 사랑할 자유, 남성이 남성을 사랑할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지향한다. 그리고 여태까지의 전통적인 성 구별 담론은 동성애적 지향성을 가진 이를 탄압하고, 자유로운 사랑을 억압한 체계와 질서로써 해체와 전복의 대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페미니즘은 여성에 대한 담론을 넘어서서 동성애 담론이다. 동성애와 페미니즘은 절대 구별될 수 없다. 페미니즘은 언제나 레즈비언 유토피아를 꿈꾼다.

페미니즘은 동성애 유토피아를 넘어서 더 극단적인 성 유토피아를 꿈꾼다. 여태까지 강조해왔던 바처럼, 페미니즘은 이성의 권력을 해체한다. 이성이 구성해온 모든 사회적 체계와 범주를 부정한다. 그리고 이성의 몰락을 재촉하기 위해서,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도입한다. 이성을 의식의 영역에, 본능을 무의식의 영역에 둔다. 그리고 무의식에 뿌리 내린 인간의 본능이 인간 실재를 더욱 근본적으로 묘사하는 개념과 범주라고 주장한다. 이성은 의식의 영역에 머물면서 인간 존재 심층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본능을 억압해왔다고 주장한다. 이성은 도덕과 질서, 법과 제도를 통해서 인간의 본능을 통제하면서, 인간이 본연의 모습대로 살지 못하도록 무의식을 지배해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사유의 중심축을 의식에서 무의식의 영역으로 이동 시킨다. 이성이 왜곡하고 변형시켜 온 인간의 실재에 더욱 심층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 의식의 영역에서 이성이 묘사하고 반영하지 못한 더욱 근본적인 인간의 실재에 닿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무의식에 뿌리 내린 성적 욕망이 인간을 더욱 심층적으로 묘사하는 적절한 범주라고. 의식에 영역에서 성에 대한 억제와 금기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탄압했다고 강변한다. 그러므로 의식의 영역에서 이성이 만들어 낸 성과 관련된 모든 종류의 질서가 전복되어야만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본연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귀결로서 의식의 영역에서 인간에게 부과된 모든 종류의 금기와 억제에서 해방될 것을 촉구한다. 그 결과 무의식에 존재하는 근친상간에 대한 욕망, 동성에 대한 욕망, 유아들의 본능적인 성적 욕구, 다자 간의 사랑(polyamory)이 인정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질서와 사회가 도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들이 꿈꾸는 세계는 결국 어떤 법률과 도덕, 금기에도 구애 받지 않는 자유로운 성의 세계, 즉 성 유토피아다. 가족끼리의 성애가 허용되는 세계, 동성끼리 자유롭게 사랑하는 세계, 유아가 자유롭게 성을 즐기는 세계, 배우자를 공유하는 세계를 꿈꾼다. 그러한 사회가 인간의 본연의 실재에 더 적합하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정일권 박사가 펜 앤 마이크에서 밝힌 바처럼, 유럽 페미니즘 운동은 동성애, 근친상간, 유아 성애의 법제화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는 결코 개인과 국지적 일탈로 치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법제화 운동은 페미니즘의 근본적인 사고 방식에 뿌리 내린 것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서 일부일처제의 결혼 제도를 비판적인 면을 과도하게 부각하는 것도 일맥 상통한다. 그러므로 건강한 페미니즘과 불건전한 페미니즘을 구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근본적인 사고 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가족 공동체의 해체, 성적 금기의 해체, 배타적인 사랑의 해체는 표출하는 강도가 다를 뿐, 그들의 비전은 동일할 것이기 때문이다(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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